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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의 시대'에서 '창녀의 시대'로! 중국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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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의 시대'에서 '창녀의 시대'로! 중국은 왜?

[프레시안 books]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허삼관 매혈기>(최용만 옮김, 푸른숲 펴냄)로 유명한 중국 작가 위화가 이번에는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로 한국을 찾았다. 위화는 유장한 입담을 지닌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파란의 중국 현대사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온 중국 민중의 신산한 삶을 따뜻한 인간애와 넉넉한 유머를 통해 풀어내는 것이 그의 장기다.

그런 위화의 소설 세계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번에 나온 그의 독특한 에세이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펴냄)는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 낯설음은 허구를 다룬 소설과 현실을 다룬 에세이라는 장르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 현실의 어둠과 비극을 직접 겨냥한 정공법을 구사하는 데서 온다. 유장한 입담과 넉넉한 유머가 아니라 현실의 비극을 직시하고 그것을 여과 없이, 때로는 차갑게 드러내는 것이다. 위화 특유의 비판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으되 그것을 더 날카롭고 더 직설적인 화법으로 전달한다.

이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그가 고른 열 개의 단어, 정확히는 중국 현실과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열 개의 키워드를 통해 중국 현실을 해부하고 있다.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가 그 열 개의 단어다. 과거의 단어도 있고 신조어도 있다. 중국 현실을 표상하는 숱한 단어들 가운데 위화는 이 열 개를 골랐다.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신기한 것은, 책을 채 읽지 않은 채 목차에서 이 단어들만 보더라도 현대 중국의 상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이들 단어가 지금의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민감하고 가장 관건이 되는 혈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렇다. 위화는 이들 단어를 통해 중국 현실의 혈에 접근하여 병들고 고통에 찌든 현실의 환부를 드러내고 치유를 시도한다. 이 열 개의 단어를 민감하게 추려내는 감식안은 언어적 감각뿐만 아니라 역사적 감각을 필요로 한다. 이 에세이집은 위화가 그 두 감각을 균형 있게 갖춘 작가라는 점을 넉넉하게 확인시켜 준다.

위화는 이들 열 개의 단어를 통해 중국의 두 개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마오쩌둥 시대이고 하나는 덩샤오핑 시대다. 하나는 정치의 시대, 사상의 시대이고, 하나는 경제의 시대, 돈의 시대이다. 두 극단의 시대이다. 두 극단의 시대의 초상을 위화는 '차이'라는 단어를 다룬 글에서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마오쩌둥 시대는 고등학생들이 '사랑'이라는 말만 써도 학교 혁명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지금은 교복을 입은 채로 여학생이 낙태 수술을 하러 왔는데, 역시 교복 차림의 같은 학교 남학생 네 명이 낙태 수술에 동의하는 사인을 하러 오는 시대다. 그의 표현대로 '극단적인 억압의 시대에서 극단적인 방종의 시대'로 급격하게 변화한 것이다. 그것이 오늘 중국의 초상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위화는 묻는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 같은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옮겨 가게 한 것일까?" 위화의 답은 이렇다. "그네를 타는 것처럼 한쪽 끝이 높이 올라가면 반대쪽 끝도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마오 시대의 극단적 편향과 덩샤오핑과 시장 경제 시대 지금의 극단적 편향을 낳았다는 것이다.

중국 작가 루쉰(魯迅)은 문화란 과거의 편향을 바로 잡으려고 또 다른 편향에 빠지면서 진행된다고 했다. 이른바 '문화의 편향 발전론'이다. 오늘의 중국이 영락없이 그러하다. 마오 시대의 극단적 편향을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또 다른 극단적 편향에 빠져 있는 것이다. 위화가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비유대로, 중국은 극단적인 수녀의 시대에서 극단적인 창녀의 시대로 너무도 빠르게 이동한 것이다.

두 극단의 시대는 역사의 시간표로 보자면 과거와 현재의 시간대이지만 위화의 글에서 두 시대는 여전히 서로 뒤엉켜 있다. 그의 글은 지금 현실의 어둠과 비극에서 출발하여 그 뿌리와 근원을 찾아가는 듯하지만, 그 뿌리와 근원이 어느새 현실로 육박해 오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다반사다. 마오 시대의 어처구니없는 계급투쟁과 '영수 마오쩌둥'에 대한 기이한 우상 숭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는 어느새 돈이 새로운 영수가 된 새로운 계급투쟁의 시대로 돌아와서, "오늘날의 중국이야말로 계급과 계급투쟁이 만연한 상태"라는 진술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는 것에 대해 위화는 "내가 오늘날의 중국을 얘기하면서 자꾸 문화 대혁명 시기로 돌아가는 이유는 이 두 시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과거에 "전민운동(全民運動) 방식으로 문화 대혁명을 진행한 데 이어, 똑같이 전민운동 방식으로 경제 발전을 진행"하고 있는 현실, "사회의 형태는 판이하지만 일부 정신적 내용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닮은 꼴"때문이라는 것이다.

위화가 보여주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의 초상은 대부분은 위화의 직접 체험 그리고 언론 보도나 친구의 체험 같은 간접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위화는 1960년생이다. 두 극단의 시대에 대한 기억과 체험을 가지고 있는 세대이다. 문화 대혁명과 더불어 성장하였고, 개혁 개방이 추진되던 1980년대에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추진되고 중국이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시기를 성년과 중년으로 살고 있다.

위화 세대의 독특함은 여기에 있다. 문혁과 마오 시대의 단순함과 순박함 그리고 계급투쟁의 광기와 가공할 억압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세대이자, 시장이 주는 자유와 해방, 광포함과 비인간적 야만성을 동시에 체험하고 기억하고 있는 세대이다. 두 시대를 체험하였기에 두 시대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시각을 확보하고 있고, 두 극단의 시대를 넘어서고자 과거의 역사와 지금의 현실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다. 위화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두 극단의 시대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지금 중국은 또 하나의 극단적 편향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열 편의 에세이에 담긴 일화는 모두 실제로 있었던 현실 이야기이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그처럼 위화가 현실에서 직간접 경험한 이야기들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소설 속 이야기처럼, 위화가 가공한 이야기처럼 들리곤 한다. 산문의 세계가 아니라 소설의 세계처럼 읽히는 것이다.

가령, 중국 서남부에서 위화 친구가 직접 겪은 이야기도 그렇다. 벽촌 아이들에게 승부차기 시범을 보이다가 공을 잘못 차서 공이 소똥 있는 곳으로 굴러갔고 그래서 그 공을 냇물에 씻어서 다시 찼다. 그런데 이것을 본 아이들은 축구 승부차기의 규칙이 그런 줄 알고 한 번 찬 뒤 냇물에 공을 씻은 뒤 다시 공을 찬 이야기가 그렇다.

축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중국에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오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2006년 독일 월드컵 기간에 일어난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마오쩌둥 사상 필승 선전대'라는 직인을 허리춤에 차고 화장실에 갔다가 그것을 똥통에 빠뜨려 반혁명 분자로 몰린 이야기, 학생이 걸상에 올라가 선생의 태양혈을 조준하고 걷어차 기절시키고 혁명 의식을 뽐내는 이야기 등등이 그렇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가장 소설 같은 경우는 한 실업자 부부의 자살 이야기이다. 가난한 부부는 바나나 사달라고 우는 아이 때문에 싸운다. 아빠는 아이에게 바나나 하나 사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아파트 10층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고 집안으로 들어간 아내는 의자를 방 한가운데로 옮겨 놓고 올라가 목을 맨다. 바나나 하나 사 줄 돈이 없어서 부부가 세상을 떠났고 아이는 순식간에 고아가 되었다.

아마도 이 대목을 읽을 때, 소설가 공지영이 최근에 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쓴 <의자 놀이>(휴머니스트 펴냄)를 읽은 독자라면, 전율을 느낄 것이다. 너무도 유사한 장면이 우리나라 평택에서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남편의 실직에 절망한 아내가 아이들 눈앞에서 아파트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한다. 그 뒤 아이들은 아빠가 늦잠 자는 줄 알고 깨우러 들어갔는데 아빠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순식간에 고아가 되었다. 극단의 시대는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있고, 그래서 책 속 중국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두 극단의 시대를 예리하게 투시하는 위화의 특유의 비판 정신은 무엇보다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에서 나온다. 위화는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면서, "이 책에서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고 말한다.

예전에 마오쩌둥은 인민에게 다가가 인민을 잘 아는 것이 작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위화의 글쓰기는 소설이든 에세이든 중국 인민에게 다가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삼는 데서 출발한다. 위화가 중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문학의 지평에서도 보기 드문 작가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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