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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평등'을 혐오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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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평등'을 혐오했다! 정말로?

[장석준의 '적록 서재'] 테리 이글턴의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책 제목이 이런데 저자가 어느 극좌파 정당의 중앙위원이거나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라면 그 내용은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할 것이다. 분명 빤한 결론의 지루한 책이리라.

하지만 그 저자가 테리 이글턴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가 이제는 어떠한 정치 조직에도 직접 속하지 않은 무소속 좌파 지식인이라서만은 아니다. 이런 유의 좌파 지식인으로서 더구나 대학 교수라는 것은 "마르크스 운운"하는 제목의 책 저자로는 오히려 감점 요인이기 십상이다. 최소한 당원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실천적 긴장감조차 없는 '좌파' 서적의 양산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글턴의 독특함은 그가 심지어 자신의 좌파됨에도 강박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좌파됨 자체를 끊임없이 성찰 거리로 삼는 그런 좌파 사상가다. 이런 사색의 과정에서 그는 어떤 마르크스 추종자들이 보기에는 신성 모독에 가까울 제스처들을 서슴지 않는다. 이글턴의 장기인 영국식 유머와 문학적 아이러니는 우파를 조롱할 때만이 아니라 '스승들'을 다룰 때도 예외 없이 구사된다.

이런 명랑한 글쓰기는 자칫 개그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카니발 같은 그의 문장들 곳곳에는,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철학적 사색의 편린이 출몰한다. 그리고 이런 대목들에서도 우리는 이글턴이 참으로 독특한 좌파 사상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가령 그는 좌파됨의 의미를 되씹기 위해 끊임없이 이를 위대한 종교, 그의 경우 무엇보다도 기독교 전통과 대조하고 연결시킨다. 지금 우리 시대에 이보다 더 비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저자도 달리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길 펴냄). ⓒ길
이런 이글턴이기에 그가 "Why Marx Was Right"라는 제목으로 신간을 냈다는 소식에 사뭇 기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원서가 나온 지 1년밖에 안 돼 우리말로 번역된 이 책(<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황정아 옮김, 길 펴냄)) 첫 장을 펼쳤을 때 이 기대감은 결코 배반당하지 않았다.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는 이야기는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것이다. 그들은 행진과 시위 대열에서 짐을 챙겨 염려하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또 한 번의 지루한 위원회 모임이 없는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상황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원하는 바다.

(…) 마르크스주의의 의미는 그것이 엄밀히 한시적이라는 데 있으며, 따라서 자기 정체성의 전부를 그것에 투여하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그 자체다. (13~14쪽)

이글턴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종교'로 만들던 이들에게는 참으로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문구다. 이들에게 "위원회 모임이 없는 행복한 저녁 시간"을 상상하기란 힘든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자들, 이를테면 장 조레스는 이미 100년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대로 된 사회주의 사회라면, 더 이상 '사회주의'란 말을 떠들 필요가 없는 사회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옳음을 증명하는 이글턴의 방식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서 이글턴은 마르크스의 사상 체계를 정연하게 정리하고 이것이 현재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현실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따지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는다. 대신 마르크스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에 흔히 따라붙는 반론들을 열 개의 물음으로 요약하여 이 물음에 답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사라진 노동 계급에만 집착한다?" 등의 물음이 곧 각 장의 제목을 이룬다.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면서 이글턴은 다양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옳음'을 증명한다. 그 중 한 방식은 마르크스 사상에서 잘못되었거나 과장되었다고 비판받는 내용들이 실은 마르크스 이전 계몽 사상가들도 이미 주장한 바임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계몽 사상가들 중에서도 특히 '계몽주의에 대한 내재적 비판자'라 평가받는 장자크 루소가 자주 동원된다. 마르크스가 역사에서 경제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거나 국가를 지배 계급의 도구로 파악했다고 해서 비판받아야 한다면 루소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턴이 구사하는 또 다른, 그리고 보다 빈번한 전략은 마르크스의 주장들 중 잘 안 알려진 내용이나 마르크스 사상의 여러 측면들 중 기존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면모를 들추어내어 비판에 맞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다?"라는 반론에 답하면서 이글턴은 계급투쟁이 투쟁하는 계급들 모두의 공멸로 끝날 수도 있다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이것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마치 역사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생각했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이 된다.

이글턴의 이러한 반박 전략 덕분에 우리는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서 우리가 이제껏 잘 몰랐던 마르크스를 새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유대교 예언자들에게서 정신적 유대감을 느끼는 마르크스(148~149쪽)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윤리를 계승하는 마르크스(149쪽)를 만나게 된다. 마지막 제10장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성주의나 탈식민주의, 생태주의에 무심하거나 적대적이라는 탄핵과는 달리, 마르크스, 엥겔스가 이들 각 주제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치열한 고민과 나름의 성취를 남겼음을 집중 검토한다.

이런 식의 접근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마르크스가 '평등' 개념을 비판했다는, 혹은 최소한 이에 대해 그렇게 열광적이지는 않았다는 지적일 것이다. 이글턴은 마르크스가 '평등'을 '부르주아적 가치'라고 규정한 언급들을 풍부히 제시한다. 심지어 청년 마르크스는 평등의 기계적 실현이 "문화와 문명 세계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경제학 철학 수고>)이라고까지 힐난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흔한 비판을 마르크스 자신에게서 듣는 것만 같다.

물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다른 모든 성취들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가치'로서의 '평등' 개념 역시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일정하게 계승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타 강령 비판>).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새 사회가 딛고 일어설 출발점일 뿐이다. 정작 새 사회가 모든 노력을 다해 다가가야 할 목표는 이런 유의 '평등'을 넘어선 '다양성'의 만개다. 이글턴의 표현에 따른다면, "마르크스에게 평등은 차이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글턴은 이러한 반박 전략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마르크스 사상의 단순 옹호가 아닌 그 재구성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마르크스 사상에서 이미 잘못된 시도임이 분명해진 것은 과감히 잘라내 버리고(가령 사유가 물질적 상황의 단순한 반영인 것처럼 정식화한 것 따위(136쪽)) 마르크스 자신이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영감에 찬 단편들을 확대하여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려 한다. 즉, 우리가 따르거나 선택해야 할 '체계'로서 마르크스의 옳음이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사색과 실천의 '재료'로서 그 옳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글턴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19세기식 기계적 유물론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이 만나는 장으로서의 '몸'의 사상으로, 혹은 현실의 카니발적 측면을 들춰내는 '속된 것'의 사상으로 재구성한다(모두 제6장의 논의다). 또한 수직적 비유인 '토대-상부 구조' 도식을 변형시켜, '토대'를 '(자본주의에서의) 정치적 가능성의 외부적 한계'라는 수평적 비유로 제시하기도 한다(147쪽).

이러한 '창조적 변형'의 시도들 중에는 사뭇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와 단순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성취를 계승하면서도 그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87~88쪽)이다. 여기에서 이글턴은 마르크스의 파편적 언급으로부터 사회주의/코뮌주의의 윤리적 기초라고 할 만한 사상을 뽑아낸다. 아니, 어쩌면 이글턴이 마르크스로부터 얻은 것은 사상 내용 자체라기보다는 자신의 사유를 밀어붙일 용기 쪽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글턴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표현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된다." 이렇듯 사회주의는 개인에게 열렬히 헌신한다는 측면에서 자유주의 사회의 단순한 거부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주의 사회를 토대로 삼아 이를 완성한다. 그럼으로써 자유주의가 가진 모순, 즉 너의 자유가 오직 나의 자유를 대가로 삼아서만 번영할 수 있다는 모순이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오직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만 마침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줄이는 게 아니라 풍부하게 만드는 일을 뜻한다. 이보다 더 멋진 윤리를 생각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층위에서는 이것이 사랑으로 알려져 있다. (88쪽)

이글턴이 옳다고 한 '마르크스'는?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서 가장 압권은 "마르크스는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제5장),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사라진 노동 계급에만 집착한다?"(제7장), 이 두 반론에 대한 응수다. 이 두 물음에 맞서며 이글턴은 위의 다양한 전략들을 총동원한다.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중심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대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주장의 이면에서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마르크스의 진의를 재조명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글턴 자신이 적극 개입해 마르크스 자신의 주장은 아니지만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라 할 만한 새로운 명제를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경제 결정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이글턴은 우선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실제로 경제적인 것이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래서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상가들이 이미 마르크스보다 먼저 경제적 요인을 강조했음을 환기시킨다.

그러면서도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의 경제 만능론의 단순한 '거울상'이 아님을 애써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좁은 의미의 경제적 지평을 넘어서는 인간 행위에 대한 마르크스의 숨어 있던 언급들을 풍부히 인용한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대안 사회의 주된 목표로 바라봤던 것은 "경제적인 것이 이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독점"(121쪽)하지 않게 되는 것임을 일깨운다. '경제 결정론'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의 결정성을 극복'하려 한 게 마르크스의 진심이고, 그래서 그가 옳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계급 환원론'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거리도 비슷하다. 일단은 신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가장 조야한 계급 환원론에 따라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비꼬면서 마르크스의 계급론을 옹호한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계급론 중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옳음'을 주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 작업을 병행한다.

그래서 청년 마르크스가 애초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주목하게 된 그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캐묻기도 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어원이 고대 사회에서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남성 노동자가 아니라 하층 계급 여성(!)을 의미했다는 뜻밖의 사실을 함께 부각시키기도 한다. 이런 재검토와 재발견이 서로 부딪혀 불꽃을 튀기는 가운데 우리는 단순히 기존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을 검증하는 게 아니라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의 탐색을 우리 자신의 생각 속에서 다시 전개해볼 수 있게 된다.

이글턴의 경우 이러한 사고의 재전개는 지구 자본주의가 대량 생산한 슬럼 거주자들에 대한 주목으로 나타난다. "저임금 비숙련의 일용직 서비스업" 노동자가 중심을 이루는 이들 슬럼 거주자들은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중시하는 '공장 노동자'들과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애초에 프롤레타리아트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자본주의 체제에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배제된다"는 이중성에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 본다면, 어쩌면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자리에 합당한 것은 오히려 이들 슬럼 거주자들일지 모른다.

이렇게 이글턴 식으로 '옳음'을 확인한 마르크스는 결국 '어떠한' 마르크스인가? 두 쪽짜리 짤막한 '결론'(216~217쪽)은 이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는 평등의 화신이 아니었다. 그는 "평등이란 관념을 경계"했다. 그는 "등에 사회 보험 번호가 찍힌 작업복을 입는 미래를 꿈꾸지 않았다." 그가 꿈꾼 것은 "다양성"이었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의 주창자도 아니었다. 그는 "국가에 대해서는 우파 보수주의자들보다 더 적대적이었다." 그는 물질적 생산이나 경제적인 것에 애착이 있지도 않았다. "그의 이상은 여가이지 노동이 아니었다." 그는 폭력 혁명 유일 노선의 제창자도 아니었다. 그는 "어떤 혁명은 평화적으로 완수될 수 있다고 믿었고, 사회 개혁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이런 마르크스라면, 흔히 그의 정신적 자손들로 이야기되는 군상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당 간부나 문화 대혁명의 홍위병도 굳이 친부 확인을 위해 DNA 검사까지 받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들에 비해 한 번도 권력을 직접 잡아본 적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미덕인 상투적 극좌파 추종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글턴 자신의 언급들 속에서 이러한 마르크스 상의 좀 더 간명한 집약을 찾아본다면, 다음의 문장을 들 수 있겠다.

18세기 유럽 중간 계급의 가슴 속에 솟구친 자유와 이성과 진보를 향한 그 엄청난 운동은 폭정에서 벗어나려는 매혹적인 해방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미묘한 형태의 전제 정치였고, 어느 누구보다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이런 모순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자유와 이성과 진보라는 위대한 부르주아의 이상을 옹호했지만, 어째서 그것들이 실천에 옮겨질 때마다 스스로를 배반하는 경향을 보이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계몽의 비판자가 되었지만, 가장 효과적인 형태의 비판이 그러하듯이 그의 비판은 내부로부터의 비판이었다. 그는 계몽의 확고한 옹호자이자 사나운 반대자였다. (204~205쪽)

마르크스는 한 마디로 역사적 계몽에 대한 내재적 비판자였다. 여기에서 '역사적' 계몽이란 유럽의 백인 남성 자본가로부터 시작돼 확산된 지난 400여 년간의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을 말한다. 그것은 전 지구적으로 개인의 해방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분명 '계몽'이기는 하되, 유럽 백인 남성의 자본주의-제국주의를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계몽, 즉 '비극적' 계몽이자 '저질러진' 계몽이었다. 그래서 이글턴 같은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본주의적 근대는 정말로 필요했을까?"라는 물음(66~67쪽)을 던지게 만드는 인류사의 갈림길이었다.

마르크스(그리고 이글턴 자신 부언하는 것처럼, 그의 벗 엥겔스)는 이 '역사적' 계몽의 위선과 역설, 한계와 모순을 누구보다 직시했던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이 '역사적' 계몽의 전개 과정 그 속에서, 즉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이 역사 안에서, 이 역사(마르크스의 표현에 따르면, 차라리 '전사前史')를 극복할 희망을 찾아내려 한 인물이다. 희망은 다름 아닌 비극적 모순 그 속에 분명히 있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동료 인간들에게 외친 인물이다.

어쩌면 이글턴이 마르크스에게서 끝까지 그 '옳음'을 증명하고 옹호하려 한 것은 어떤 명제나 착상만은 아닐지 모른다. '역사적 계몽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는 근본적인 포즈야말로 이글턴이 정말 끝까지 지켜내려 한 핵심이 아닐까. 이미 저질러진 이 비극적 역사 한 가운데에서, 다름 아닌 거기에서 희망을 찾고 그 겨자씨 하나를 키워내려 분투한 삶의 방식(way, 道) 말이다.

그러나 과연 '마르크스주의'는 옳았는가?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통상적인 선입견 정도만을 지닌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쉽고 재미있으며(유머 코드가 영어권과 우리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마르크스 사상의 초심자가 입문서로 읽으면 좋을 책이다.

그렇다고 입문용만은 아니다. 위에서 누누이 밝힌 것처럼 이 책에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와 그 극복의 길에 대한 꽤 깊이 있고 독창적인 논의가 가득하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는 그 자체로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의 중요한 한 성과로 평가받을만하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수호 대상에는 마르크스의 상당히 중요한 얼굴 하나가 빠져 있다. 그것은 <자본>에 주로 정리되어 있는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이다. 노동 가치, 상품 화폐, 잉여 가치,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형, 평균 이윤율,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 공황 등등.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는 이런 주제들은 다루지 않는다. 이런 쟁점들에서 마르크스가 과연 옳았는지, 얼마나 옳았는지 혹은 재구성이 필요하다면 그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이 책으로는 풀 수 없다.

본업이 문학 이론가이자 비평가인 이글턴에게 요구하기에는 벅찬 작업 과제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만을 놓고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제2권을 쓰라고 한다면, 그는 차라리 <왜 예수가 옳았는가>를 쓰면 안 되겠냐고 답할지 모른다(실제로 이글턴은 버소 출판사에서 나온 '혁명가들' 시리즈의 '예수' 편 서문을 썼다).

이글턴이 경제 쪽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만 해도 시장 사회주의나 참여 계획과 같은 경제 대안들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체계에서 비롯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세계는 이글턴 정도의 르네상스적 지식인조차 감히 손대기 힘든 전문 영역이 되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중에서도 그 경제 이론이 봉착해 있는 궁지의 핵심 중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 꼭 언급해야만 할 것은 이 책이 '마르크스'의 옳음에 대해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지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꼭 '마르크스(주의)'의 옳음까지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글턴은 책 곳곳에서 '마르크스 사상'과 '마르크스주의'를 서로 뚜렷이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있다. 더군다나 이글턴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마르크스 상에 공감한다면, 그 간극은 더욱 커진다.

비록 이글턴이 경제 결정론이나 계급 환원론을 넘어서는 마르크스의 또 다른 얼굴들을 성공적으로 복권시킬 수 있었다 할지라도, 마르크스(주의)의 큰 줄기가 역사적으로 경제 결정론, 계급 환원론의 형태를 취해왔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이런 식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바꾸는 데 그다지 강력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변혁의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의 추상적인 '노동 계급 중심성' 사상이 그렇다. 이것은 현실의 노동자들을 쉽게 이론 속의 변혁 주체와 등치시키도록 만들었고, 이에 따라 현실 노동 운동의 노동조합주의적 실천들에 대한 환상을 양산했다. 노동 계급이 사회 전체의 대변자로서 자기 변신을 감행하도록 채근하기보다는 협소한 부문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을 '계급투쟁'을 명분으로 정당화, 신화화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희귀하게 등장한 개혁자들('종교 개혁'이라고 할 때의 그 '개혁')은 사실 이러한 환상을 타파하는 데 앞장선 인물들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안토니오 그람시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와 같은 저작만큼이나 <왜 마르크스주의는 옳지 못했는가>도 필요하다. 이글턴 식의 마르크스 다시 읽기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 및 극복과 함께 해야만 한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 대한 공감이 크면 클수록 그런 작업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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