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꽃들은 이미 몸단장을 끝낸 뒤였다. 작은 개울을 따라 벚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데 아직 꽃은 피지를 않았다. 얼마 전에 가 보았던 장성의 백양산이나 주흘산 등의 남쪽 지역은 피었다가 이미 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곳은 이제 겨우 꽃봉오리가 조금 돋았을 뿐이다. 태백에는 여름에도 서늘해서 모기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태백이 그만큼 추워서 개화 시기가 늦는 것이다.
봄이 더디게 오는 태백. 아무리 날씨가 쌀쌀하다고 해도 개울에서 물 흐르는 소리마저 위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찬 기운을 파고들며 더욱 청량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은 아래로 흘러가고 물소리는 위로 굴러가고. 태백에는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연못과 한강의 그것인 검룡소가 있다. 지금 내 눈앞을 지나가는 물은 그 물줄기들과 동무하면서 부산으로, 서울로 재잘재잘 흘러갈 것이다.
그 우렁찬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로 주변에 몇몇 꽃들이 피어 있었다. 노란 꽃을 막 터트리고 있는 것은 생강나무. 생강나무의 새로 돋아나는 잎사귀는 순한 짐승의 귀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송아지의 귀에 난 잔털처럼 하얀 솜털이 빽빽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제비꽃이 있었다. 알록제비꽃과 호제비꽃.
▲ 알록제비꽃. ⓒ이굴기 |
▲ 호제비꽃. ⓒ이굴기 |
아침 식전에 더 눈을 맞출 꽃이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다 허물어져가는 산소가 눈으로 들어왔다. 후손들의 돌봄이 없었는지 쇠락한 티가 역력했다. 궁리에서 펴낸 <한시 365일> 중 3월 29일치에 소개된 백거이(白居易)의 '고분'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겠다.
古墳何代人 (고분하대인) 이 무덤의 주인은 언젯적 사람일까
不知姓與名 (부지성여명) 성도 이름도 알 수가 없네
化爲路旁土 (화위로방토) 길가의 흔한 흙더미로 변해
年年春草生 (년년춘초생) 해마다 봄풀이 돋아나네
나는 무덤의 생태에 대해서는 특히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 흔한 양지꽃도 하나 없었다. 할미꽃도 없었다. 그저 잡풀과 낙엽만 무성했다. 빈약한 생태계 사이로 언듯언듯 보라색 제비꽃만 몇 송이. 그런데 그 무덤에서 약간 벗어난 둔덕에 내 눈을 확 끌어당기는 꽃이 하나 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당골광장의 길목식당에 가니 황태북어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해장을 겸해 뜨거운 국물로 속을 달랬다. 우리가 밥을 먹는 사이 식당의 아주머니가 한 켠에서 부산했다. 우리가 먹을 산중 도시락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밥을 빨리 먹는 편인 나는 후다닥 밥그릇을 비우고 빈 도시락을 들고 그곳으로 갔다.
취나물무침, 멸치볶음, 계란말이, 콩자반 그리고 김치. 반찬을 담고 대형 밥솥의 뚜껑을 열었다. 김이 물씬 퍼지고 흰 밥알들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물 묻힌 주걱으로 한 바퀴 돌리고 나서 밥을 도시락에 담았다. 내가 좋아하는 고두밥처럼 아주 고슬고슬했다. 점심 도시락을 싸서 나오는데 옆집 식당은 텅 비었다. 의자를 식탁위에 올려놓고 아주머니가 대걸레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바닥이 물로 번들거리는 가운데 허리를 구부린 뒷모습이 쓸쓸했다.
유일사 입구로 이동해서 산행을 시작했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한 무더기의 꽃을 만났다. 피나물은 노란 꽃잎을 활짝 피웠다. 너무 강렬해서 사진을 찍으면 오히려 흐릿했다. 그리고 털개별꽃, 금괭이눈, 호랑버들, 현호색, 갈퀴현호색.
홀아비바람꽃이 지천에 깔렸다. 이 꽃은 보통 잎에서 하나의 꽃대가 올라오는 게 대부분이다. 어느 한 녀석은 두 개의 꽃을 달고 있었다. 새로운 종은 아니고 그저 작은 변이종이라고 했다. 어느 모퉁이를 돌았더니 노루귀가 밭을 이루었다. 노루의 귀를 닮았다고 그 이름을 얻은 노루귀. 잎과 대궁에 빽빽한 솜털이 촘촘했다. 키는 생강나무보다 작았지만 털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 호랑버들. ⓒ이굴기 |
▲ 홀아비바람꽃. ⓒ이굴기 |
▲ 노루귀. ⓒ이굴기 |
키 작은 그것들을 찍으려고 납작 엎드렸다. 미끈했다. 낙엽에서 미끄러지니 발밑에 드러나는 것은 낙엽, 그리고 그 낙엽 밑에는 얼음. 겨우내 거대했던 얼음은 이제 뼈만 남아 낙엽이불을 덮고 있었다. 밤에는 얼었다가 낮에는 녹기를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겨울 기운. 가까이 철쭉나무 무더기 그늘에선 시꺼멓게 변한 흙탕눈이 겨울의 패잔병처럼 눈치를 보며 뭉쳐 있었다. 태백산이기에 볼 수 있는 겨울의 뒷모습. 그 모습이 몹시 홀쪽했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니 드디어 장군봉이 나타나고 천제단이 나타났다. 배가 무척 고팠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태백산 정상은 칼바람으로 유명하다. 바람이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잠잠하고 기온도 아주 따뜻했다. 그 흔치않은 날씨를 밑천으로 산중 식당이 차려진 것이다. 간판도 없고 유리창도 없고 더더구나 지붕도 없는 식당.
자리에 털썩 앉고 보니 산중 식당 정도가 아니었다. 천상의 식당이라고 해야 옳겠다. 물을 마시고 반찬부터 먼저 푸는데 옆자리에서 소주잔이 건너왔다. 지붕이 없었기에 맑은 술잔엔 구름도 얼비쳤다. 하늘의 주점에서 두레박처럼 내려오는 술이라고 생각하고 얼른 마셨다. 달큰했다. 그리고 밥을 담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조금 눌리기는 했지만 고슬고슬한 밥알이 꿈꾸듯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햇빛도 참 고슬고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젓가락 뜨는데 아침에 내 눈을 확 끌어당겼던 그 꽃이 생각났다. 그러자 그 꽃은 순식간에 내 마음마저 확 끌어당겼다. 바로 도시락 속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밥 알갱이와 그 식물의 흰 꽃밥이 너무도 닮지 않았겠는가. 4장의 녹색 꽃잎을 오무려 밥그릇처럼 만들고 수술대에 꽃밥을 쌀밥처럼 달고 있는 그것의 이름은 홀아비꽃대! 하늘의 구름이 도시락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이 광경을 본다면 한 마리 꿀벌로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겠다. 꽃에서 꿀을 따듯 꽃밥을 맛있게 먹었다.
▲ 홀아비꽃대. ⓒ이굴기 |
▲ 천상의 식당.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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