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안철수 후보가 출마 선언을 하고 본격적인 대선 행보에 박차를 가하는 지금 이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안철수의 생각'과 '안철수의 행보'를 여러 시선으로 독해한 이들의 글이 독자 여러분이 '대통령 후보' 안철수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2012년 대선의 불사조 안철수
지지율 40퍼센트 인물이 지지율 5퍼센트 인물에게 서울시장 자리를 양보하면서 타오르기 시작한 '안철수 현상'은 19대 총선을 전후해 잦아드는 듯했다. 초대형 사건이나 이벤트들도 며칠만 지나고 나면 먼 과거형으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속도 사회' 한국에서 안철수 현상 역시 언론과 정치권만 관심을 보일 뿐 대중들은 이미 먼 과거의 일처럼 잊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4월 총선에서 야권이 참패하면서 안철수는 다시 박근혜에 맞설 유일한 대권 주자로 호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철수의 생각>(김영사 펴냄) 발간과 SBS <힐링 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출연을 통해 여론 조사에서 박근혜를 누르고 1위로 올라섰다.
정당 기반도 없고 대선 출마 의지도 모호한 비정치권 인물이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자 다시 대중들이 폭발적 관심을 보이는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마치 '불사조 안철수'를 보는 느낌이다. 수십 년간 정치를 업으로 삼아온 유력 정치인들도 지지율 1퍼센트를 올리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막상 힘겹게 획득한 지지율을 까먹는 것은 한순간이다. 대중들에게 잠시라도 잊히면 지지율도 하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철수는 서울시장 후보 양보를 통해 단숨에 과반에 육박한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했고 이후 주춤하다가 대선 출마 가능성이 높아지자 다시 지지율 1위로 성큼 올라선 것이다.
안철수라는 인물의 자질과 탁월함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내고 확산시키고 있는 저변의 힘이 무섭다. 불의의 시대, 불공정의 시대에 대한 분노, 88만 원 세대의 좌절과 분노가 안철수라는 인물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 시대의 '구원 투수'로 요구하고 있는 그 힘이 말이다. 적어도 2012년 현재의 국면은 사람이 시대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시대가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안철수'라는 인물이 아니라 '안철수 현상'을 있게 한 저변의 흐름, 민심, 시대적 요구가 중요하다. 안철수는 바로 여기, 시대가 요구하는 곳에 있을 뿐이다. 어쩌면 2007년 대선에서 사람 경제를 내세워 출마한 문국현이 지금의 안철수 자리에 있었다면 '문국현 현상'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왜 대중들은 제3후보를 욕망하는가?
안철수는 유력 정당에 기반을 두지 않기에 제3후보로 불린다. 민주화 이후 실시된 대부분의 대선에서 제3후보는 늘 대중의 열망의 중심에 있었다. 2007년 문국현, 1997년 이인제, 1992년 정주영 등은 마지막까지 완주한 제3후보들이다. 그리고 2007년 고건, 2002년 정몽준 등은 비록 출마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한동안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기록했던 강력한 주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대중들은 실현 가능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제3후보를 욕망하는가? 무엇보다 기성 정당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기득권화된 기성 정당에 대한 반감이 정치권 외부의 인물이나 정치권 내의 인물 중 비주류 인물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이 같은 욕망은 '반정치 정서'와 결합하면서 가급적 정치색이 약한 인물, 정치가 아닌 행정가, 기업가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정당, 반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해 반대하는 부정적 욕망의 표출에 가깝다.
또한, 제3후보에 대한 욕망의 근저에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대선은 변화에 대한 욕망이 유력 후보에 투영되고 집약되는 공간이다. 기성 정당에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때 대중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바로 제3후보이다. 변화에 대한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기성 정당에 대한 반감이 강할수록 제3후보에 대한 열망도 강렬해진다.
무엇보다, 제3후보는 한국 정치의 특성인 인물 중심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3후보는 기존 정치권에 '때 묻지 않은' 참신한 인물에 대한 기대감의 발현이다. 정당이 사회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면서 대중의 열망이 '정당' 대신 '인물'로 집중되어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인물 중심주의는 불안정하고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인물에 대한 열망은 마치 연애 감정이 그러하듯이 감정적 속성이고, 또 가치와 대의에 기반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과도한 편 가르기, 진영 논리에 대한 반감도 제3후보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토양이다. 진영 논리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 잣대, 불공정한 잣대로 이어진다. 민주진보 진영도 이 같은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내 편의 과오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상대방의 작은 실수에 대해서는 무자비하다. 그 결과 합리적 타협과 성찰이 들어설 공간은 부재하고 양대 정당에 대한 절대 지지자를 제외한 다수의 대중은 피로감과 회의감을 느끼게 되면서 제3의 중립지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역대 대선에서 제3후보는 초반에는 거대한 변화의 구심으로서 큰 기대를 모으다가 이내 거품이 꺼지고 중도에서 포기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제3후보가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제3후보는 기본적으로 후보의 힘보다는 대중의 요구, 열망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그리고 그 열망은 대체로 무엇을 원하는 적극적 욕망이라기보다는 무엇을 부정하는 소극적 욕망에 가깝다. 즉, 열망을 지속시키는 그 무엇, 가치와 지향이 약하기 때문에 지속성을 지니기 힘들다. 또한 제3후보는 대중의 욕망이 투여된 일종의 '환상'에 가깝다. 그 환상이 깨지는 순간 제3후보 지지율 거품도 사라지는 것이다.
역대 제3후보와 안철수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 <안철수를 생각한다>(프레시안 기획, 알롑 펴냄). ⓒ알렙 |
정치 경험이 없다는 점은 안철수에 대한 가장 위협적이고 강력한 비판이다. 맑은 물에서 노는 금붕어 시절에는 환호의 대상이 되지만 진흙탕 같은 정치의 장에 진입하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흙탕과 같은 정치의 공간에서는 미꾸라지가 생존할 수 있지 금붕어는 살아내지 못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안철수는 "나쁜 경험은 없는 게 낫다"고 반박한다. 안철수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강준만도 지금과 같이 낡은 체제와 새로운 미래 가치가 충돌하는 시기에는 오래된 체제의 경험은 무용지물이거나 장애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제3후보와 안철수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첫째, 안철수는 구체제와의 대척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현하는 인물이라는 대항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기성 정치에 대한 피난처 정도에 머물렀던 역대 제3후보와 결을 달리한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의 관찰처럼, "안철수는 안보와 성장의 두 축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박정희 패러다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선언의 상징"이다. 마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것 같았던 신자유주의가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구체제의 상징으로 전락한 것처럼 안철수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박정희 패러다임이 극복해야 할 대상, 낡은 것, 구체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둘째, 안철수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자질을 가졌다는 점이다. 공감, 소통 능력이 그것이다.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질이거나 내부에 존재하는 정태적인 능력이 아니라 대중들과 접속하고 그들과 교감함으로써 발현되고 확장되는 능력이다. 말로 보여주는 소통, 공감이 아니라 현장에서 행동으로 실천으로 나타나는 공감 능력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정치인들과 다르다. 현재와 같이 민심의 변화 욕구가 강렬하고 거대한 변화 흐름이 차오르는 시기에 대중들과의 접속을 통해 확보한 소통, 공감 능력은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그 어떤 자질을 뛰어넘는다.
안철수도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강연에서 "21세기는 일반 대중이 리더를 무조건 따라가지 않아요. 탈권위주의 시대가 되면서, 지금은 대중이 리더에게 리더십을 부여하지요"라고 언급한 바 있다. 대중에게 강요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대중이 부여한 리더십이라는 변화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셋째, 제3후보로 표현되는 대중의 요구가 과거와 결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과거 제3후보는 막연한 희망에 가까웠다면 안철수에게 투영되는 열망은 매우 절박하다. 그 절박한 열망을 담을 그릇으로서 야당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불의, 불공정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1차적으로는 정부 여당을 향하면서 민주당이 그 대안으로 부상했고 이는 2010년 지방 선거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치러진 각종 재·보선에서 야권의 압승으로 나타난 바 있다. 하지만 2012년 총선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이미 기득권화되고 무능력한 야당은 구체제와 낡은 프레임의 대안이 아니라 그 한 축임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 제3후보로서 안철수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더 강력해지고 있다.
2007년과 비교하면, 집권 여당에 대한 분노의 크기가 더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그 대안이 제1야당인 민주당이 되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 야권의 패배가 정당 정치에 대한 실망을 더 강화시키면서 제3후보를 기성 정당의 보완재 수준이 아닌 대체재 수준으로 강력히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착한 리더십은 정치권에서도 통할까?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현상으로만 보면 제3후보로서 안철수는 여느 제3후보와 다르며, 집권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국일보>가 8월 20일 정치 전문가 열두 명에게 올해 대선 전망에 대해 질문한 결과, 박근혜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으로 본 전문가는 네 명, 야권 후보가 이길 것으로 본 전문가는 세 명,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고 본 전문가가 다섯 명으로 나타났다.
정당 기반이 없는 제3후보가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이미 박원순 모델에서 일정 부분 드러났다. 하지만 시장과 대통령은 다르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안철수의 착한 리더십이 정치권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그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해 새로운 체제, 새로운 리더십을 성공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다. 정치는 경영과 다른 영역이고 특히 대한민국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기업 경영과 비교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이 이미 CEO 대통령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 실패 사례에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안철수의 리더십과 성공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해 그의 경영 철학 등 과거의 행보를 추적해 봄으로써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는 회사로서 안철수 연구소를 시작할 때 "왜 사람들이 모여서 일할 필요가 있는가? 회사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그의 해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라는 것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존재로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크고 의미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여럿이 모여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고 답을 내린다. 이는 그의 경영의 원칙이 '공존'과 '공익'에 기반함을 의미한다.
어쩌면 이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노블레스들이 반복해 온 메시지이자 원칙들이지만 안철수의 발언이 주목받는 것은 안철수라는 인물이 주는 신뢰감 때문이다. 신뢰는 정치인이 지녀야 할 리더십의 본질적 덕목이다. 안철수의 신뢰는 그의 초인적인 성실함이 공익이라는 지향과 결합해온 데 기반을 둔다. 사실 성실함이라는 태도는 그 자체로는 선도 될 수 있지만 악도 될 수 있다. 대중들이 정치인들, 한국 사회 노블레스의 성실함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갖는 것은 성실함이 더불어 함께 사는 '공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 내 패거리들만을 위한 '배타적'인 것이 되어온 우리의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안철수의 '성실함'은 '공익', '공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성 정치인을 넘어선다.
안철수에게는 흔히 가난에서 성공에 이르는 눈물겨운 스토리가 없다. 강준만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인들이 지금껏 감동해온 스토리는 언더독(underdog) 스토리였지만, 안철수에게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해낸 톱독(topdog)의 스토리가 있고, 이것이 언더독 스토리에 물린 대중들에게 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그 도전의 궁극적 지향은 '공익'과 '공존'이었기에 '전문가 안철수'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멘토 안철수'가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정치인 안철수', '지도자 안철수'가 되기엔 부족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안철수의 역사의식, 그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 대한 상, 즉 '정체성'이 분명해야 '정치인 안철수'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안철수의 생각>은 예비 정치인 안철수로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방향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 안철수가 꿈꾸는 세상,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단면만을 보여주었을 뿐 여전히 모호하다. 그 여백은 안철수와 대중이 함께 채워나가야 하는 공간일지도 모르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기엔 대통령의 자리가 너무 크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정치인 안철수'보다는 '멘토 안철수', '전문가 안철수'에 가깝다. 사회 구조에 대한 일관된 문제의식과 본질을 뚫어보는 혜안을 갖춘 '전문가 안철수'에 가까운 것이다. 비록 그의 행위의 궁극적 지향점은 사회와 공익에 있고, 그가 공익과 이윤 추구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가장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로 읽혀지더라도 말이다.
본질을 꿰뚫는 안철수의 통찰력은 그에게 최고의 성취와 사회적 인정을 가져다주었지만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한계를 보인다. 그는 10·26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앞두고 출마 의사를 피력하면서 "정치의 본질은 행정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안철수와 '청춘 콘서트'를 같이 하는 '시골 의사' 박경철도 "안 교수는 정치는 자기 체질이 아니라고 믿지만 행정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서울시장직은 정치가 아니라 행정의 영역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의 본질은 행정이라고 보는 사고의 이면에는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자신감이 묻어 있다.
그리고 본질을 파고 들어가 그 본질에 직면하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 가능하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낙관주의가 배어 있다. 하지만 기업 경영과 국가 통치는 매우 상이한 영역이다. 윤리 경영으로 찬사를 받았던 유한킴벌리의 문국현 사장이 2007년 대선 과정에서 대중의 외면을 받았던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안철수는 문제 해결을 위해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고 원칙을 단순화하는 과정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다.
정치는 경영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이익이 아닌 가치 추구, 공존과 공익 등 핵심적인 가치를 유지하면서 본질을 파고드는 '원칙적'이고 '고독한'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정치는 정치인 혼자의 힘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을 움직임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에 대중과의 교감이 중요하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가에 대한 자신의 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원칙을 대중에게 확인받는 부단한 과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정치야말로 경험을 통해서만 검증받아야 하는 영역인 것이다.
'나쁜 경험'이라도 경험이 없는 것보다 나은 이유다. 적어도 그 '나쁜 경험'이 현재를 이루는 역사가 되어왔고, 미래를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풍부하고 밀도 있는 경험을 만드는 것, 그 경험 속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그럼으로써 대중과의 접촉면을 확장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안철수의 착한 리더십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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