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안철수 후보가 출마 선언을 하고 본격적인 대선 행보에 박차를 가하는 지금 이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안철수의 생각'과 '안철수의 행보'를 여러 시선으로 독해한 이들의 글이 독자 여러분이 '대통령 후보' 안철수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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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3일 SBS의 토크쇼 <힐링 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안철수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진보와 보수) 이전에 선행돼야 하는 게 상식과 비상식을 판단해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선언이 이어진다.
"나는 상식파다."
그런데 이 말은 어딘가 이상하다. 상식의 틀을 깨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는 전위예술가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상식에 맞춰서 살아가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상식파일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좌파냐 우파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나는 상식파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그래서, 영 뜬금없는 동문서답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질문과 대답이야말로 안철수라는 어떤 독특한 대선 후보의 진면모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가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안철수가 말하는 상식의 구체적인 세목을 밝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포함하고 또 포함하지 않는지를 밝힘으로써, 현재 한국 정치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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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식의 편에 서 있다'는 안철수의 말은 그의 잠재적인 적대자인 몇몇 보수적인 언론뿐 아니라 평범한 누리꾼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불만의 목소리를 불러왔다. 아무 포털 사이트에나 들어가서 "안철수 상식"을 검색해 보자. '안철수가 말하는 상식이 뭔지 모르겠다', '그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게 아니냐' 등, 다양한 냉소와 비판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안철수의 '상식'을 짚고 넘어가는 목소리가 눈에 띈다.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은 8월 27일 "안철수, '실종 아닌가' 강호동 깜짝 놀라 지적하자"(<중앙일보>, 2012년 8월 27일)에서 안철수의 입대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두고 "그런데 정작 자신은 종종 상식에서 벗어난다"며 "세상의 중요한 상식 중 하나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선 쉽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철수는 이런 상식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안철수가 말하는 상식이 과연 무엇일까? 사실상 그의 대선 출마 선언문 내지는 공약 모음집으로 이해되고 있는 <안철수의 생각>(김영사 펴냄)을 뒤져보아도 '내가 생각하는 상식은 이것이다'라는 식의 서술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띈다.
또 하나, 기업들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받아들여 상식의 경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없는 직원들의 일자리를 줄이면서 비용을 절감했다는데, 정작 임직원들은 각종 인센티브로 지갑이 두둑해진다면 사회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인건비를 줄이는 것으로 비용절감을 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기 때문인데요, 인건비와 R&D 비용의 절감은 단기적으로 이익률을 개선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175~176쪽)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안철수의 '상식'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는 주장이나 강령의 모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가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것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느슨한 형용사에 가깝다.
안철수가 말하는 "상식의 경영"을 반박하기 어려운 것은, 안철수 자신부터가 누군가의 어떤 특정한 주장이나 행태를 공격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안철수는 최대한 둥글고 모나지 않은 화법을 택함으로써 정 맞는 일을 피한다. 게다가 본인이 자신감 있게 '상식파'를 자처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상식이 어떤 상식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대신 포괄적으로 옳은 이야기, 전체적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 속에 그의 상식을 품어두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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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철수를 생각한다>(프레시안 기획, 알렙 펴냄). ⓒ알렙 |
노무현의 '상식'은 그러나, 안철수의 상식과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를 형성한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앞서 인용된 "상식의 경영"의 내용을 보여주면 '아, 그것은 상식적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있는 법. 노무현이 '상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던 방식은 안철수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노무현의 '상식'은 대단히 공격적인 개념이었다. 그가 말하는 '상식'은 그 대립쌍으로 '특권과 반칙'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특권과 반칙'이란, 지지자들에게는 '조·중·동과 결탁해서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일제 시대부터 이어져오는 기득권층의 연장선인 한나라당'을 뜻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이렇게 '상식'을 전유해 버림으로써 노무현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대권 투쟁을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으로 순식간에 치환할 수 있었다. 노무현 본인이 1990년 3당 합당에 맞서 "이의 있습니다"를 외친 장본인이라는 것,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민주화 세력과 군사 독재 세력의 야합에 반대한 인물이라는 것이 그에게 대단히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3당 합당 이후 10여 년이 지나 치러지던 2002년 대선에서도 '군사 독재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구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대방인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군사 독재 세력이 아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고, 그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식상한 표현이 되고 말았지만, 말하자면 '군사 독재 프레임'에 걸려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 깔려 있던 것이 바로 '상식 대 몰상식'의 대립 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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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상식'은 노무현의 그것과 달리 명확한 외연과 내포를 지니지 않는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노무현의 '상식'과 달리 안철수의 '상식'은, '무적'이다. 그 상식이 적대시하고 있는 비상식 혹은 몰상식의 모습이 전혀 뚜렷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적의 상식. 그것이 안철수가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는 상식의 본질이며, 그래서 그것은 10년 전 노무현의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왜 안철수에게는 지지율만 있고 지지자들이 없을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이제는 어렵지 않다. 안철수는 상식을 자신의 기본 이념으로 삼는데, 그 상식은 앞서 말했듯 특정한 대상을 적으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 슈미트가 정의한 것처럼, 사실 정치적인 것은 적과 우리 편의 구분을 본질로 한다. 물론 안철수 또한 범야권 혹은 반새누리당 세력을 지지율의 토대로 삼지만, 노무현과 같은 핵심 지지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군'을 단결시키는 가상의 소실점인 '핵심 적대층'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힘>(개마고원 펴냄)을 쓴 강준만 같은 이는 바로 그것을 "증오의 종언"으로 보고 칭찬할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정치적인 무한대립과 증오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인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선택'하고자 하는 국민의 '선택권'이 보장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더욱 가깝다.
안철수를 찍는 것이 유의미하려면, 안철수를 찍음으로써 다른 누군가를 찍지 않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가게에서 똑같은 음식을 판다면 사실상 소비자의 선택권은 박탈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인들이 서로 두루뭉술하게 좋기만 한 '상식'을 내세운다면, 구체적인 정책과 국정 운영의 철학을 선택하고자 하는 국민들의 참정권은 실질적으로 무시당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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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이 한없이 지질하게 흘러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안철수는 좋은 말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그의 적대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단란주점에 갔느냐 안 갔느냐', '군 입대 시 아내 몰래 나왔다고 TV에서 말했는데 네 아내는 서울역까지 바래다줬다고 하지 않느냐' 따위를 캐묻는 것뿐이다.
이것은 안철수가 너무도 올바르고 상식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 반대로, 안철수가 '상식'의 범주를 그런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반대자들이 안철수에게 '이것이 네가 말하는 상식이냐?'라고 물을 때, 그 내용이 한없이 사소하고 비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철수가 도입한 '상식 대 비상식'의 구도가 그만큼 작은 스케일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이야기한 노무현의 상식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새누리당, 당시의 한나라당은 애초부터 그 논쟁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노무현이 '상식'이라는 단어에 '군사 독재냐 민주주의냐'라는 역사적인 주제를 엮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시점에 한국 사회에서 '상식'을 바라보는 눈높이도 한 단계 나아갔다고 말한다면 과도한 평가일까? 적어도 군사 독재는 안 된다는 상식이, 노무현의 '상식 대 몰상식'의 싸움이라는 정치적 구도를 통해서, 대중들의 의식 속에 뿌리를 내렸다. 물론 그것은 정략적인 계산 하에 나온, 당시 상대방이었던 이회창 후보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밖에 없는 프레임이었지만, 어쨌건 덕분에 한국 사회의 상식의 지평은 한 단계 넓어지고 견고해졌다.
안철수의 '상식'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 양상은 그와 정반대다. 안철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상정하는 '상식'은 사실상 그 누구의 상식도 아니다. 안철수에 대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을 왜 자연인 안철수가 구현하고 있지 않느냐는 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현실 속에 없다. 그런 안철수도, 그런 '상식'도 우리의 현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식의 '검증'과 '반박'이 오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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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안철수 본인의 책임과 그를 둘러싼 상황의 논리가 모두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안철수는 자신의 인기가 바로 그런 대중들의 판타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안전한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어떤 지향성도 보이지 않음으로써 최대한 많은 이들의 지지율을 안고 가는 것, 그것이 정치인이 아니면서도 정치적 지지율을 높게 가져갈 수 있는 비결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아직까지 그 누구도 노무현이 '상식'으로 제시했던 것과 같은 시대적 주제를 짚어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도 된다. 이번 대선의 이슈가 경제 민주화라는 이야기가 무성하고, 다들 그 지점에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이 돈 받고, 일 안하는 사람이 돈 안 받는 것' 같은 상식을 내세우는 사람, 그 지점에서 상식과 몰상식의 경계를 그어서 대중들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획득하려 하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다.
매 시대마다 상식은 새롭게 정의되고 또 확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확장이 모든 주제를 다 포괄하거나,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 놀라울 정도로 말실수도 하지 않으며, 자수성가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살필 줄 아는 그런 예외적인 개인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착한 사장님'을 우리의 대표자로 삼는 것, 개인적 흠결이 없거나 매우 작은 사람을 오직 그 이유만으로 공동체의 방향타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그는 상식을 이야기하고, 토론과 합의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조율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투는 부드럽고 표정은 온화하다. 그의 '상식'은 그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고, 비록 '나는 상식의 편이다'라고 말하지만 다른 이를 함부로 비상식적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 온화하고 교양 있는 표정 속에 안주할 수 있을 만큼 '상식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안철수에게 상식을 물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안철수를 통해 상식을 물어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당선되건 당선되지 않건, 최종적인 대선 무대에 오르건 오르지 않건, 이 화두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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