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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민족주의자 이시영, 세 차례 퇴진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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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민족주의자 이시영, 세 차례 퇴진 성명

[해방일기] 1947년 9월 28일

1947년 9월 28일

임정 원로 이시영(李始榮, 1869~1953년)이 국민의회의 국무위원과 의정원 의원 등 직책을 사퇴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시영은 조선의 명문 출신으로 대한제국에서 고관을 지내다가 합방 후 여섯 형제와 함께 압록강 상류 건너편인 서간도로 망명, 경학사(자치 단체)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3·1 운동 전의 독립 운동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가진 인물이었다. 3·1 운동 후에는 상해임정에서 재정부장 등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귀국할 때는 여든 살 가까운 노령이었지만 임정 인사 중 김구와 맞먹는 권위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다.

"(…) 해방 후 정부 책임자들은 국제의 무리 압박으로 부득이 사인 자격이라는 수치스러운 걸음으로 귀국하여 떳떳치 못한 형편도 불무하였으나 지켜온 법통 정신만은 그다지 손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금회에 소위 43차 회의가 진정한 혁명자의 집단으로 개편치도 않았고 특히 국무위원회의 결재와 지시도 없이 상임위원회에서 권리를 남용하여 몇 개인이 자의자상(自意自想)대로 제반 사항을 결정하였다. 이는 30년 전래의 신성한 법통을 유린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 임정의 위신을 잃게 한 일대 유감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하자와 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망행은 용서할 수 없는 위헌 행동이다.

30여 년간 법통과 고절(苦節)을 지켜온 본인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은인 묵과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을 다 탈리하는 바이다. 다만 직무의 불충실한 과오를 일반 동포 앞에 사과할 뿐이다. 본래 국가 독립은 멸사적 헌신적이 아닌 소혜무롱(小慧舞弄)으로는 달성키 어려운 바이다. 동포 제사가 정성 단결하여 좌사우고함이 없이 대의정로로 매진하기를 빌 뿐이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6일)


이시영의 은퇴 성명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해방 1주년 때 독촉국민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사임한 일이 있었다. 독촉국민회는 총재 이승만의 사조직 성격을 가진 기구였는데, 그 간판인 위원장 노릇을 맡고 있던 이시영이 독촉국민회를 둘러싼 물의가 꼬리를 물자 사퇴한 것이었다. 당시의 성명서에도 눈여겨 살필 대목들이 있다.

"40년간 이역 표랑을 계속하면서 몽상에 그리던 고국강산을 금일에 다시 밟게 됨은 이 어찌 전일에 뜻하여 예기하였던 바이랴? (…) 이 민족적 중대위기에 임하여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란 동일한 정치 이념에도 불구하고 각 지도자들의 파지(把持)하고 있는 그 구구한 정견과 방략의 사곡 고집을 볼 때에 끝없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합류불능을 통감하는 바이다.

특히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간부로 말하면 다 당시 준초인물(俊楚人物)이라 한다. (…) 그러나 가끔 그들의 동작이 법규나 조리에 맞지 못하는 표현이 있을 때에는 물의가 훤등하여 나로 하여금 극도 불안을 느끼게 할 뿐이요 광정할 도리가 없으므로 결연히 일절 공직을 탈리 사퇴하고 동시에 3000만 형제자매에게 사과하여 마지않는다.

현하 정세는 외로 열강의 세력 대립에 국토가 양단되고 내로 경제적 파탄과 아울러 재환이 중중하여 거족 도탄에 촉목처비(觸目悽悲)한 이 광경을 보면서도 오히려 반목 투쟁하여 자당 세력 확장에 광분할 뿐 아니라 사대적 외세 의존의 누습(陋習)은 외모를 자취하여 민족적 대의조차 저버림은 개탄 통곡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18일)


이시영은 정치가가 아닌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정한 정치 노선을 주장하지 않고 독립 건국만을 희구하였으며, 중요한 직책을 맡으려 애쓰지도 않고 그저 주어지는 직책만을 맡고 있다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는 물러나는 사람이었다.

시국의 흐름에 대한 그의 자세를 알아볼 만한 대담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1949년 7월 초, 은퇴해 있던 그가 제헌의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기 보름 전의 대담이었다.

(문) 이 박사 개인에 대한 옹의 기대와 요망은?
(답) 이 박사는 좀 양보성이 있어 주길 바란다. 정부가 서더라도 태산과 같은 중임을 지고 나가는 데는 좀 벅찰 것이다.
(문) 이 박사와 김구 씨는 합작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답) 합작? 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조각(組閣) 일보 전에 듣고 아니 듣고 간에 김구 씨에게 최후로 협조를 요청하게 될 것인데 글쎄, 김구 씨가 들을라구?
(문) 선거 국회는 물론 정부 수립까지 보이콧하는 김구 씨의 태도를 어찌 보는가?
(답) 나는 여러 번 김구 씨더러 그러지 말고 마음을 돌려 반쪽 정부나마 세우는 데 협력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해 보았으나 결국 도로(徒勞)였다.
(문) 그러면 김규식 박사는?
(답) 물론 김구 씨와 함께 훌륭한 분이나 좀 더 견고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 서(재필) 박사의 신당설에 대한 소감은?
(답) 서 씨는 늦게 귀국하여 현재 군정청 최고의정관 자리에 앉아있는 만큼 해방 이래 3년 가까이 남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뒤에 참섭(參涉)하여 뭣이니 뭣이니 한다는 것은 자미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또 새로운 파당을 짓는다는 것은 불찬성이다.
(문) 38선은 언제나 터질 것이며 남북 통일은 가능한가?
(답) 38선이 터지는 것이라든가 또는 남북 통일 등의 문제는 국제 간에 해결할 성질의 것이요, 우리 독력으로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애는 써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4일 "침묵을 깨뜨린 노 혁명가 이시영 옹 담")


이승만, 김구, 김규식, 서재필 등에 대한 그의 시각이 비쳐 보이는 대담인데, 허심탄회한 발언 자세로 보아 대상 인물의 이해에 중요한 참고가 되는 시각이다. 그리고 1949년 9월의 은퇴 성명은 80세의 그에게 마지막 은퇴 성명이 아니었다. 그는 1951년 5월 9일 또 한 차례의 사직 성명을 내놓는다. 부통령직 사직이었다.

나는 국민 앞에 이 글을 내놓지 아니치 못하게 된 것을 한편으로 부끄러워하며 또 한편으로는 슬퍼하여 마지않는다. 내가 망명 생활 30유여 년 동안 이역에서 무위도일하다가 8·15해방과 함께 노구들을 이끌고 흔연 귀국하였을 때 나는 이미 노후된 몸이건만 여생을 조국의 남북 통일과 자주 독립을 위해서 바치겠다는 것을 다시금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좌우 상극으로 인한 그 혼란·분란의 파랑에 휩쓸리기 싫어 나는 귀국하자마자 모든 정치 단체와의 관계를 분연 끊고 초야로 돌아가 한 야인으로서 어느 당론에도 기울이지 않고 또 어떤 파쟁에도 끌림 없이 오직 국가를 건지고 민족을 살리려는 일념에 단성(丹誠)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렇듯 내 심경은 명경지수와도 같이 담담하던 중 단기 4281년 7월 20일 뜻밖에도 국회에서 나를 초대 부통령으로 선거했을 때에 나는 그 적임이 아님을 모른바 아니었으나 이것이 국민의 총의인 이상 내가 사퇴한다는 것은 도리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심사원려 끝에 마지아니치 못했다는 것을 여기에 고백한다. 그 뒤 임염 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대체로 무엇을 하였던가? 내가 부통령의 중임을 맡음으로써 국정이 얼마나 쇄신되었으며 국민은 어떠한 혜택을 입었던가? 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부통령의 임무라면 내가 취임한지 3년 동안 얼마나한 익찬의 성과를 빛내었던가?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야말로 시위소찬(尸位素餐)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니 이것은 그 과책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또한 솔직히 표명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매양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일을 하도록 해줌으로써 그 사람의 직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못할진대 부질없이 공위(空位)에 앉아 허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가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정부에 봉직하는 모든 공무원 된 사람으로서 상하계급을 막론하고 다 그러하려니와 특히 부통령이라는 나의 처지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하게 만들어 이 이상 시위(尸位)에 앉아 국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참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국가가 흥망 간두에 걸렸고 국민이 존몰단애에 달려 위기간발에 있건만 이것을 광정할 홍구할 성충(誠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동량지재가 별로 없음은 어떤 까닭인가? 그러나 간혹 인재다운 인재가 있다하되 양두구육의 가면 쓴 애국 위선자들의 도량으로 말미암아 초토에 묻혀 비육(肥肉)의 탄식을 자아내고 있는 현상이니 유지자로서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뿐만 아니라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그 적소에 등용된 것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도비(都鄙)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경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영향을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것을 그르다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하되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던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기가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 워낙 무위무능 아니치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나는 이번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의 직을 이에 사퇴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직책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엔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謝)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는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사생을 같이 하려 한다. 그러나 내 아무리 노혼(老昏)한 몸이라 하지만 아직도 진충보국의 단심과 성열은 결코 사그러지지 않았는지라 잔생(殘生)을 조국의 완전통일과 영구독립에 끝내 이바지할 것을 여기에 굳게 맹서한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은 앞으로 더욱 위국진충의 성의를 북돋아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여 주었으면 흔행일까 한다. (<동아일보> 1951년 5월 11일)


시국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명쾌하게 드러난 글이라서 전체를 옮겨놓았다. 그런데 이 글이 언론인 우승규의 대필이었다는 사실을 1975년 7월 18일자 <동아일보>에 그가 쓴 "나절로 만필" 제84회 기사에서 알아냈다. 기사 앞부분에서 우승규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긴급 상의할 일이 있으니 다녀갈 수 없겠느냐는 급전을 받고 부산에 내려가 서로 마주 앉은 이시영 부통령과 나. 옹은 비통한 얼굴빛으로 잠잠히 긴 담뱃대만 빨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보게 우 군, 난 부통령직을 그만 내던질 테야. 그러니 날 좀 도와주게." 하는 것이 놀라운 첫마디였다. 나는 옹의 이 말이 하도 뜻밖이라 한때 어리둥절했다. 갑작스런 사임설에도 쇼크를 받았으려니와 도대체 내가 협조할 일이 뭣인가를 몰랐기에 다음 말만 기다린 채 침묵과 긴장이 흘렀다.

이보다 앞서 옹은 당시 여론을 와글와글케 하던 김윤근 일파가 저지른 소행-이른바 '국민방위군'의 비참한 실태를 시찰하러 대구 경주 울산 등지를 두루 다녀 돌아온 뒤였다. 그들의 갈기갈기 찢어져 헐벗은 옷차림들, 며칠씩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야윈 모습들. 살아있는 송장이나 다름없는 우리 2세들의 참상을 본 노옹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옹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의 위치도 다시금 자성해봤다. 이 박사와는 상해 임정 때부터 '옹추' 간인 데다가 부통령이 된 뒤엔 사사건건 무시를 당한 채 아무 발언권도 주질 않자 더욱 둘 사이는 빙탄(氷炭)처럼 돼있었다.

그러던 차에 소위 '제2국민병'들의 피눈물 나는 참경을 보고선 되게 흥분, 자신이 벌제위명(伐齊爲名)의 부원수 직을 팽개침으로써 국민에게 다소나마 사과하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항의요 도전이며 이 박사에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옹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우국충정, 나도 동감이었기에 "장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도와드릴 일이란?" 하고 묻자 나더러 당신의 사퇴서를 수고스럽지만 써달라는 부탁 아닌가.

1947년 9월로 돌아가, 이시영은 왜 국민의회에서 사퇴한 것인가? 그는 9월 1~5일에 열린 국민의회 제43차 회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 회의에서는 아래와 같은 안건들이 처리되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7일)

(1) 4대 국회의 절대 지지와 남조선 단독 정부 노선으로 향하는 남조선 총선거를 반대하는 긴급제의안.
(2) 미·소·영·중·불과 기타 각 약소 국가에 대하여 4대국 회의를 실현 성공케 하여 달라는 감사 격려 간구의 메시지를 보낼 긴급제의안.
(3) 조직대강.
(4) 민대(민족대표자회의)와의 통합 교섭에 대한 전말 보고.
(5) 국민의회 임시선거법.
(6) 정무위원 법무위원회 조직조례.
(7) 정 부주석 及 국무위원 보선.

어느 안건이 그를 분노케 한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아마 특정한 안건보다 회의 운영의 전반적 방식에 그가 더 큰 불만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주류가 지나치게 정략적인 태도로 진로를 모색하는 데 그의 근본적 불만이 있었을 것 같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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