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땅'이라는 뜻이지만, 경작 가능한 전체 땅은 2퍼센트에 불과한 얼음의 땅이다. 심지어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섬은 아이슬란드(Iceland)라고 부르는데 유독 북쪽 끝에 위치한 거대한 대륙에는 왜 그린란드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지금 스칸디나비아의 이주민이었던 에리크(Erik)가 연안 지역의 푸른 풀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의도된 작명설(作名說)'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수배 중이던 에리크가 푸르고 사람이 살만한 땅이란 환상을 심어 이주민을 끌어들인 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세기의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최근 일고 있는 '녹색'과 '초록'의 붐을 보고 있자면, 혹한의 땅에 '그린'이란 이름을 붙인 에리크의 거짓말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과연 그 중에 정말로 녹색의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녹색'을 가장 명시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지난 3월 창당했던 녹색당이다. 총선에서 정당 등록 유지 조건을 맞추지 못해 지금은 '녹색당+'로 이름을 바꾸고 재창당 준비에 여념이 없지만 여전히 전망은 암울하다. 현실 정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운동권 정당, 혹은 등대 정당으로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녹색당이 정책 정당으로서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방증한다. 지난 얘기긴 하지만 녹색당 창당 당시에도 아직 이르다는 입장을 수차례 피력했다. 대중적으로도 정치, 정책 능력으로도 더 추슬러야 할 것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녹색당의 행보는 "논의의 효율성보다는 소통과 과정을 중시"하는 정당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지난 창당 과정이나 작금의 재창당 과정의 다양한 의견 대립이 이를 보여준다. 그래도 녹색당은 생태적 지혜와 사회 정의, 비폭력 평화와 풀뿌리 민주주의 등 누구나 다 인정할 만한 녹색의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 다소 미련해보이지만 끊임 없는 걸음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녹색당은 능력이 없을지언정 에리크의 그린란드는 아니다.
또 하나의 진보 정당인 '진보신당'은 어떨까? 정책은 여전히 '적색'에 가깝고 현실 정치에선 무능하다. 진보적 가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진보가 몰락하는 것을 무력하게 방임했다. 그래도 스스로를 "녹색 가치의 깃발을 든 전태일"(홍세화 대표)을 표방하기도 하고, 당내에도 적록 연대를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 등 녹색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 지난 3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수명 만료 핵발전소 폐쇄 법안' 발표 기자 회견에서 녹색당 비례대표 이유진 씨를 비롯한 당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이 두 정당이 우리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또 한 번 죽어가고 있다. 대선 이슈에 묻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해도 두 정당 모두 재창당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작금의 무관심은 다소 놀라울 정도다. 그간 같이 녹색을 주창하던 우리는 마치 그들이 내세웠던 녹색의 가치는 처음부터 녹색의 가치가 아니었다는 듯 관심조차 황급히 거둬버렸다. 그들이 대선 후보를 낼 가능성이 낮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녹색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약한 외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긴 하지만 대선 정국에서 정책 활동을 벌일 계획도 가지고 있다. 왜 이런 안타까운 상황까지 오게 된 걸까?
문제는 사회의 녹색 담론을 주도하는 세력에게 있다. 그간의 발전 혹은 개선만으로도 주류 녹색 세력은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력주의나 자연 파괴 문명을 극복해야 한다는 거대환 전환, 즉 녹색의 가치를 도외시하기 시작한다면 사회는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해주고 활동을 지지해줄 이유가 사라진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도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에는 정책 제안이나 협조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녹색의 가치를 표방한 녹색당과 진보신당은 각각 0.48퍼센트와 1.13퍼센트의 처참한 성적표를 손에 얻었다. 가장 큰 문제야 두 당의 능력 부족인 게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녹색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해줬다는 이야기 역시 들어본 적이 없다. 녹색은 선거를 위해 존재하는 가치였던가. 현실화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 녹색을 액세서리로 만드는 것 아닌가 우려스럽다.
녹색당이나 진보신당에 대한지지 선언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프레임은 도저히 녹색의 가치를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국회나 정부로 보내는 관심 중 일부는 프레임 자체를 뜯어고치려는 노력에 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풀뿌리 변화를 지향한다면 이를 표방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와주겠다, 관심이 있다는 제스처 정도는 있어야 한다.
단지 지인 관계라는 이유로 지나가는 말로 '고생한다' 치하해 주는 수준은 너무 고약하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가 '선거'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가치'에 주력하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근본적인 것은 외면하고, 녹색인양 꾸미는 목소리에 집중한다면 그 때 우리는 에리크의 그린란드가 될 것이다.
먹물 좀 먹은 사람인양 녹색의 가치를 중언부언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런 지적 능력은 있지도 않거니와 내가 이해하는 녹색의 가치와도 상충된다. 내가 알고 유일한 건 녹색이 거대한 전환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녹색당과 진보신당은 무능하다. 그래서 느리고 힘들다. 그래도 현 대선 정국에서 녹색의 가치가 현실화될 가능성보다는 높지 않을까? 짐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건 녹색이 아니다. 미몽에서 깨어날 순간이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 진행하는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 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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