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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부처님 발바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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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부처님 발바닥이 있다!

[꽃산행 꽃글·26] 길바닥에서 발바닥을 생각하다

지리산으로 갔다. 새벽 중산리에서 출발해 벽계사를 거쳐 천왕봉 오르는 길. 며칠 후면 무시무시한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덮친다고 했다.

미리 기별이라도 주는 것일까. 습한 안개가 중산리 계곡을 가득 뒤덮었다. 가늠할 수 없는 거리의 골짜기에서 몇 가닥의 안개가 뻗어 나와 코끝을 간질였다. 서울에서는 집집마다 유리창에 신문지를 붙였다. 종이 신문들이 모처럼 쓸모를 만났다. 통인동 어느 골동품 가게는 이사할 때 쓰는 노란 테이프로 X자를 그리기도 했다. 전깃불 아래 휘황한 문명의 도시가 온통 난리법석을 떨었다.

전깃줄이 아니라 바람결로 공중을 통해 전해오는 소식이라도 들었는가. 지리산 나무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그저 잎사귀를 조용히 흔들 뿐이었다. 무언가 큰 변화의 기운이 골짜기에 흠씬 했다. 삐딱한 비탈을 세상으로 알고 사는 뿌리와 그 뿌리를 누대로 덮고 있는 썩은 잎사귀들. 그 중의 혹 몇몇은 볼라벤을 타고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갈 수도 있겠다.

지지난 주 <경향신문>에 짧은 칼럼을 실었다. "발바닥에 관한 5가지 단상"이란 제목이었다. (☞관련 기사 : 발바닥에 관한 다섯 가지 단상) 좀 엉뚱한 곳을 건드렸기 때문인지 내 글에 대해 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아내도 조금 아는 체를 해주었다. 태풍으로 인한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는 모두 죽는다. 드물게 좌탈입망(坐脫立忘)을 한다고도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운 채 숨을 거두고 누워서 저세상으로 간다. 얼굴 들고 가는 게 아니라 발바닥을 들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곳에서는 망자의 얼굴이 아니라 발바닥을 가장 먼저 보게 되지 않을까. 피둥피둥한 살집이나 조각 같은 몸매는 거들떠도 아니 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물을 것 같다. 그대는 과연 얼마만큼 그대의 세상을 돌아다녔는가?"

▲ 와불의 발바닥. 누우면 발바닥은 환히 드러난다. 모두는 죽어서 흙으로 간다는데 그렇다면 발바닥은 늘 우리를 대표해서 죽음의 입구를 서성거리는 셈이 아닌가. ⓒ이굴기

이번 산행은 망설임 끝에 나선 길이다. 그래서 그런지 힘이 몹시 들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천왕봉을 거쳐 치밭목 대피소에서 일박을 하기로 되어 있다. 모처럼 산장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이다. 소소하게 챙겨야 할 물품이 많아 배낭 무게가 만만찮았다. 고비가 여러 번 찾아왔다. 힘든 고비를 만나면 108번을 세면서 갔다. 그러면 그런대로 그만큼 전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칼럼에서 했던 한 문장을 속으로 더듬었다. "그대는 과연 얼마만큼 그대의 세상을 돌아다녔는가?" 그러자 마음의 면적이 조금은 넓어지고 가슴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길을 오래 걷다보면 발에 모든 하중이 실린다. 그러니 발바닥에 피곤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솝 식으로 말해서 같은 인체에서 누가 수고를 더하고 덜하고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무릎의 관절이 스프링처럼 완충 작용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래도 최종 부하는 발바닥에 걸리기 마련이다. 오래 걸어본 사람은 안다.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으로 돌등을 밟아주면 아주 시원해지는 것을.

순두류 계곡에서 법계사 입구까지는 그리 심한 경사는 아니었다. 등산객은 물론 법계사의 신도들이 출입하는 길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발길이 지리산 다른 등산로에 비해 두 배는 많을 것이다. 조릿대가 안내하는 산길. 길바닥의 돌은 아주 맨질맨질하고 단단하고 많이 닳아 있었다. 그리고 가는비, 안개, 는개 등 공기 중의 빽빽한 습기와 접촉해서 물기가 촉촉했다. 이러한 날, 이런 조건에서 만나는 길. 길바닥에 깔린 돌의 얼굴들은 그 어느 날보다 아주 매력적으로 빛났다.

요즘의 기후 변화는 산세(山勢)를 닮았다. 호젓한 오솔길을 가는가 하더니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난다. 평탄한 능선인가 하더니 급전직하의 벼랑 끝 폭포! 올해의 그 이상 고온에 감각을 그만 잃어버렸나. 벌써 열매를 맺어야 할 노란 매미꽃이 아직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병조희풀, 물봉선이 드문드문 고개를 들고 있다. 물 풍년을 맞아 더욱 퉁퉁해진 바위에서는 참바위취와 바위떡풀이 건장하게 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올 여름 너무 심한 더위에 지쳤는지 꽃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 매미꽃. ⓒ이굴기

▲ 병조희풀. ⓒ이굴기

▲ 물봉선. ⓒ이굴기

▲ 참바위취. ⓒ이굴기

▲ 바위떡풀. ⓒ이굴기

꽃들의 기운이 팍 꺾인 산길. 나는 꽃으로 가던 관심을 길바닥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발바닥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일생에 걸친 구도 행각, 발바닥이 편평해지도록 멀리 돌아다니신 부처님. 그분의 발바닥을 닮은 돌 하나가 이 바닥에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칼럼의 마무리는 이런 대목이었다.

"부처님의 몸을 밝히던 불이 꺼지고 적멸의 순간이 왔다. 열반에 들기 직전, 부처님은 슬피 우는 제자들에게 관(棺) 밖으로 슬쩍 발을 내밀었다고 한다. 평생의 구도 행으로 편평해진 평발이었다. 부처님이 보여주려는 게 그냥 단순한 발만이었을까. 혹 발 중에서도 가장 아래인 발바닥을 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미리 경험하는 잠깐의 죽음처럼 매일 잠자기 위해 누우면 비로소 동굴처럼 환히 드러나는 발바닥. 그 안에 인생의 비의(秘意)가 숨어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려는 부처님의 마지막 동작이 아니었을까."

계속 두리번거리다가 드디어 눈으로 들어오는 게 하나 있었다. 발뒤꿈치, 엄지발가락이 흙에서 도드라지게 툭 튀어나온 돌.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길바닥의 가운데를 유의하니 발바닥을 닮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작은 두 개의 돌멩이는 엄지와 검지 발가락으로 치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세 개만 더 주워다 배치하면 영락없는 발바닥 하나를 그럴 듯하게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발바닥의 중앙 부분이 조금 패였다. 평발이 아니었다. 부처님이 아니라 사람의 발바닥이 아닌가. 내가 찾는 그분의 것이 아니었다. 사진만 찍었다.

▲ 길바닥에 한 가운데에 있는 발바닥 모양의 돌. ⓒ이굴기

비 오듯 땀을 쏟고 108 숫자를 여러 번 세며 한참을 올랐다. 로타리 산장을 지나 법계사일주문에 도착했다. 일주문이란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만든 문이란 뜻이다. 그 일주문 위에 현판이 붙어 있었다. 智異山法界寺.

법계, 法界. 많은 뜻이 있겠다. 하지만 법(法)과 비법(非法)의 한 경계를 뜻하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일주문이 성(聖)과 속(俗)의 경계인 것처럼, 이승과 저승의 한 경계가 나인 것처럼. 일주문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법계사로 가는 길과 천왕봉으로 가는 길. 길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이 길 또한 그 어떤 한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길의 어디 한 가운데에서 한 발바닥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힘줄이 뚜렷하고 편평한 평발이었다. 오호라, 내가 발견한 내 부처님의 발바닥!

▲ 천왕봉 가는 길의 길바닥에서 만난 어느 돌의 얼굴. 부처님 발바닥을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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