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런 수많은 '녹색' 서적들 중에 끝까지 읽었을 때 그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은 별로 없다. 항상 결론 부분이 문제다. 뭔가 천편일률의 느낌을 준다. 문제제기는 거창하고 정세 인식도 절박하기 짝이 없는데, 결론은 모두들 개인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데 머문다. 아니면, 위기론에 비해서는 태평하게만 느껴지는 파편적인 정책들의 나열로 끝나든가 말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의 <미래를 위한 경제학 : 자본주의를 넘어선 상상(The Bridge at the Edge of the World: Capitalism, the Environment and Crossing from Crisis to Sustainability>(이경아 옮김, 모티브북 펴냄)은 그 얼마 안 되는 예외들 중 하나다.
▲ <미래를 위한 경제학 : 자본주의를 넘어선 상상>(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 지음, 이경아 옮김,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저자의 이력 때문이다. 스페스는 어느 모로 보나 '주류'에 속하는 인물이다.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의 환경 자문 위원으로 활동한 것도 그렇고,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유엔개발계획(UNDP) 사무총장을 역임한 것도 그렇다. 환경 운동 중에서도 흔히 '환경 보호주의'로 불리는 온건한 흐름의 대표자이고, 그 안에서도 최상층 엘리트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런 저자가 쓴 책이라면, 자연히 다른 환경 관련 책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론으로 끝나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바로 이 점에 이 책의 독특함이 있다. 주류 환경 운동의 대표자가 썼는데, 그 주류 환경 운동을 비판한다. 위기의 근본적이고 거대한 원인과는 동떨어진 공학적 대안이나 도덕적 훈계로 끝나고 마는 그 구조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니, 비판이기 이전에 반성이다. 자신이 40여 년간 참여해온 그 환경 운동에도 불구하고 왜 생태 위기는 더욱 확대되고만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다. 스페스에게 이 반성의 핵심은 이제까지 환경 운동 진영이 생태 위기를 고발하면서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말하지 않고 우회해온 한 가지 단어를 끄집어내는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다.
스페스는 책 전체에 걸쳐 생태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이며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생태 위기 극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이제까지 환경 운동이 시간을 낭비하며 변죽만 울린 것은 이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라도 진짜 적과 제대로 싸워야 한다고 촉구한다.
"생태 위기를 해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대결하라."
자본주의와 생태계의 모순 지점 : 성장
사실 이런 주장 자체는 이미 수많은 생태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것이다. 어쩌면 스페스는 이들의 주장을 '뒤늦게' 받아들인 데 불과하다. 하지만 다름 아닌 스페스 같은 사람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게 중요하다. 스스로 체제의 '내부자'임을 자처하는 그가 '자본주의'를 생태 위기의 뿌리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했다는 게 인상적이다.
책 첫머리에서 스페스는 오늘날 지구 생태계 위기를 여덟 가지 측면으로 정리한다. 기후 혼란, 삼림 감소, 토양 유실, 담수 감소, 해양 수산 자원 감소, 유독성 오염물질, 생물 다양성 훼손, 질소로 인한 과영양화. 이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기후 혼란이다. 이에 대해서, 스페스처럼 체제 '내부자'이면서 불편한 예언자 역할을 꺼리지 않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기후학자 제임스 한센은 이렇게 지적한다.
"현재 문명은 1만 2000년 동안만 비교적 기후가 안정적인 충적세에 들어 발전했다. 지구의 기온은 북미와 유럽에서 빙하가 녹을 정도로 상승했지만, 그린란드와 남극 대륙의 빙하를 다 녹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평균 기온이 0.6도씩 급속도로 상승함으로써 지구의 기온은 충적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 온난화로 우리는 거대한 '정점' 직전의 낭떠러지로 내몰렸다. 우리가 낭떠러지를 건너면 그 건너편에는 지금과 완연히 '다른' 지구가 나타날 것이다.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환경 말이다. (…) 우리는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기후 변화의 시작을 막을 기회를 잡기 위해 10년 안에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55~56쪽)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우리의 문명은 충적세 문명이었다. 지구 역사상 예외적으로 광범한 온대 기후대가 등장한 충적세라는 조건에 기반을 두고 우리의 문명 전체가 존립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참으로 희귀한 이 기후 균형 위에 가까스로 서 있는 꼴이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그 균형을 우리 스스로 깨뜨렸다. 인류 문명의 등장을 허용한 그 조건이 지금 인류 자신이 초래한 결과들로 인해 허물어지고 있다.
문제는 성장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인류는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성장은 지구 생태계의 모든 균형을 깨뜨릴 정도로 급속하고 거대하게 진행되고 있다. 스페스가 인용하는 경제사가 앵거스 매디슨은 이 양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제시한다.
"1000년에 지구의 인구는 고작 2억7000만 명이었다. 현재 미국의 인구보다도 적은 숫자이다. 세계 경제의 생산량은 120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800년 후에도 사람이 만든 세계는 여전히 작았다. 1820년 즈음 세계 인구는 10억 명으로 늘었지만 경제의 생산량은 6900억 달러에 불과했다. 800년 동안 1인당 소득은 1년에 겨우 200달러 정도 늘었다.
하지만 그 후부터 비약적인 성장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 인구는 50억 명이 더 늘었으며 놀랍게도 경제 생산량은 40조 달러가 넘었다.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세계 경제의 규모는 1960년 이후로 두 배로 성장했고 곧 다시 두 배로 늘어날 것이다. 세계의 경제 활동은 50년 후면 다시 네 배가 될 것이다." (27쪽)
이런 전례 없는 성장이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산업 자본주의가 등장한 1800년 무렵부터다.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고용주들이 이윤을 내기 위해, 시장에서 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려고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경제 체제"(97쪽)인 자본주의가 인류 문명과 지구 생태계 사이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
개별 자본이 끊임없이 이윤을 확보하고 축적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 체제에는 지속적이고 폭발적인 확장 경향이 내재해 있다. 계속 덩치가 불어나야만 피가 돈다. 확장이 멈추는 순간, 곧 임종이다. 그래서 이 체제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 일단 지구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낸 뒤에는 두 눈을 가린 채 성장의 질주를 계속하는 수밖에는 없다.
이 질주를 중단시켜야 한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환경 보호주의는 이 질주로부터 비롯되는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땜질 처방만을 계속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시시포스의 노동이었다. 이곳을 때우면 저곳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한 곳을 때우면 또 다른 여러 곳에서 문제가 폭발했다. 어떤 때는 땜질한 곳이 다시 터져 더 이상 손 쓸 수 없게 되었다. 생태 위기는 항상 환경 운동을 추월했다.
책 곳곳에서 우리는 이러한 환경 운동의 한계에 대한 스페스의 회한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회한은 결코 패배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 책의 목표는 운동의 한 세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대의 운동을 시작하는 데 있다. 스페스가 염원하는 새로운 운동은 자본주의적 성장 그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탈성장 : '정지 상태' 개념의 귀환
하지만 성장 자체에 도전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성장'은 이미 자본가들만의 깃발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도전의 후보자로 제시되는 세력들도 성장에 미련을 갖는다. 한국에서도 2007년 대선 즈음에 이른바 '진보적 성장'이 유행어가 된 적이 있다. 우파만이 아니라 좌파도 '성장'을 중심에 놓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만큼 좌파의 잠재 지지자들에게도 '성장'은 호소력 있는 긍정적인 가치다.
'탈성장'이라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적 성장에 무턱대고 동의하는 입장을 논파하려면 좀 더 분석적인 접근과 차근차근할 설득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페스도 자신의 책 상당 부분을 성장에 대한 이러한 성찰에 할애한다.
그는 우리가 '성장'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이 사실은 세 가지 서로 다른 맥락을 함축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 첫째는 생산의 성장, 즉 재화와 용역 및 정부 지출의 양적 크기의 확대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성장의 표준적 의미로서, 우리는 이를 흔히 국내 총생산(GDP) 수치로 나타내곤 한다.
두 번째는 이러한 생산의 성장에 반드시 수반되는 생물 물리학적 처리량의 성장이다. 여기에서 '처리량'이란 "자연계에서 얻어서 경제에서 사용되며 조만간 폐기물로 나타나는 모든 재료"(162쪽)를 포함한다. 처리량과 처리량의 증가는 경제 확대로 인한 생태계의 부담을 뜻한다. 현 경제에서는 GDP가 증대할수록 처리량 역시 이에 비례해 증가하게 되어 있다.
세 번째는 인간 복지의 성장이다. 이것은 사실 '성장'이라기보다는 '발전'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다. 하지만 대다수 민중은 '성장'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은 이 의미를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GDP로는 결코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경제 복지 지수, 인간 개발 지수 등 대안적 경제 사회 지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상의 구분에 따른다면,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생산의 성장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처리량을 급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복지의 성장과 직결되지 않는다. 스페스를 비롯해서 생태적 탈성장론자들이 이야기하는 '탈성장'은 곧 이러한 의미의 '성장'과 단절하자는 것이다.
그럼 성장 '이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이제는 인간 복지의 성장이 첫 자리에 놓여야 한다. 처리량의 증가를 최소화하면서 인간 복지의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산의 성장은 종속 변수로서 조절된다. 이것을 계속 '성장'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절대시하는 '성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임에 분명하다. 스페스는 이렇게 말한다.
"성장을 끝내야 한다고 해서 개발까지 끝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정의하는 개발은 양적 변화, 잠재력의 실현, 구조나 체제의 몸집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질적 개선 등을 의미한다. 즉, 주어진 처리량으로 재화와 용역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여기서 질이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172쪽)
이런 사회가 꼭 정적인 상태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 활동들 중에는 GDP 수치에 재화와 용역 증가로 잡히는 쪽보다는 잡히지 않는 쪽이 훨씬 더 많다. 생산량과 그에 비례한 처리량을 늘리지 않으면서도 혹은 완만하게만 늘리면서도 사회의 활기를 높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년간 인류가 경험한 상태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어떤 상태일 것만은 틀림없다. 몇 세대에 걸쳐 경제 활동의 유례없는 확대를 경험하고 난 뒤의 진정 국면. 고전파 정치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 필연적 국면을 예감하고 여기에 '정지 상태(stationary state)'라는 이름을 붙였다. 벌써 150년 전에 밀은 인류가 이 정지 상태에 익숙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순히 대지로 하여금 더 많은 인구, 그렇지만 반드시 더 낫거나 더 행복하지는 않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 부와 인구의 무한한 증가를 위해 대지에서 뿌리를 뽑혀야 하는 것들 덕분에 가능한 기쁨 가운데 커다란 분량을 상실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후손들은 어차피 필연성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이 강제되기 훨씬 전에 정지 상태에 만족하게 되기를 나는 후손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바란다." (<정치경제학 원리 4 : 사회 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나남출판 펴냄))
탈성장론은 어찌 보면 이 '정지 상태'론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 경제 활동의 예외적인 확대는 어느 시점에서는 더 이상 바람직하기도 않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 예외 국면 이후에는 반드시 조정 국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상 비대증에 빠진 경제 활동을 동결 혹은 축소하고 이를 전체 인간 활동 속에 다시 끼워 맞춰야 한다. 2008년 위기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인류사적 조정 국면의 조짐은 아닐까?
'정지 상태'라고 해서 우울해 할 이유는 없다. '정지'된 게 실은 파괴를 수반한 생산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과거의 모험의 '정지'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은 오히려 정지 상태를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자유의 왕국' 비슷한 가능성이 꽃필 기회로 바라보았다.
"자본과 인구의 정지 상태라고 해서 인간적 향상이 정지된 상태를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도 없다. 모든 종류의 정신적 교양, 도덕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공간은 이전과 같이 넓을 것이다. 살아가는 기술을 향상할 수 있는 여지는 전과 다름없이 넓은데, 정신이 살아남는 기술에 몰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향상이 일어날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심지어 산업의 기술도 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연구되어 성공을 거둘 텐데, 그것이 오로지 부의 증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 다시 말해서 노동을 절감한다고 하는 본래의 정당한 효과가 산업의 향상으로써 빚어진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일 것이다." (<정치경제학 원리 4 : 사회 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96쪽)
'비사회주의적' 대안 사회를 향해
자본주의에게 성장 광기가 필연이라면, 경제 활동의 위상 재조정은 반드시 또 다른 구조 변화와 함께 해야만 하다. 즉, 경제 활동의 팽창을 통해 등장한 권력관계의 철폐가 동시에 이뤄져야만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과제로 여겨온 영역이다.
<미래를 위한 경제학>의 후반부는 바로 이 영역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기업의 소유 및 지배 구조를 논하고, 국가의 자본 통제에 대해 짚는다. 통상의 환경 서적 결론부에 비하면 좀 낯선 논의들이다. 그러나 스페스는 이제 이런 쟁점들이야말로 '녹색'의 주된 관심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과 권력의 변혁을 이야기하지 않는 '녹색'은 쉽게 자본과 권력의 먹이가 될 뿐이다.
스페스는 앞선 논의들과 마찬가지로 대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선행 논의들을 끌어와 종합을 시도한다.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페스는 굳이 이를 '사회주의'라 부르는 것은 피한다. 오히려 '비사회주의적' 대안 사회 식으로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애써 부인하려 한다.
과거의 사회주의가 워낙 과오가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페스가 미국 쪽 저자인 것도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스의 대안은 큰 틀에서 현대 사회주의자들의 고민과 일치한다. 가령 기업의 지배 구조를 "주주, 직원, 노조, 미래 세대, 정부, 소비자, 각종 공동체와 공급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253쪽)은 자본주의적 주식회사와 현실 사회주의식 국영 기업 모두의 대안으로 공감할 만한 것이다.
스페스가 특히 의존하는 것은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가르 알페로비츠가 자신의 저서
알페로비츠는 이러한 대안적 기업들을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경제권으로 만들고 이를 확대한다면 '미국적 방식'의 자본주의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 전망한다. 스페스는 이러한 비전에 공감한다. 그래서 기업의 소유 및 지배 구조가 이런 식으로 바뀌어가면서 사회가 비로소 성장 강박에서 벗어날 것이라 내다본다.
이름이야 뭐든 좋다. '녹색 사회주의'라 하든, 스페스처럼 기어코 '비사회주의적'(더 정확히 말하면, '비-국가 사회주의적') 대안 사회라 하든, 상관없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과, 이에 따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인식과 노력 속에서 '녹색'은 반드시 '적색'의 가장 훌륭한 전통과 만나야 한다. 스페스의 '전향'은 그 살아 있는 사례이고, 그의 책은 그래서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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