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일본 자본주의의 '성공'을 뽐내는 이 선샤인빌딩 입구에 자리한 히가시이케부쿠로(東池袋) 중앙공원 구석에는 풍요로움과 첨단 문명을 상징하는 이 고층빌딩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하고도 조그마한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비석 앞면에서 새겨져 있는 "영구 평화를 바라며"라는 글귀를 읽어보아도 이 비석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는 없다. 다소 뜬금없다. 뭐지? 비석의 뒷면에 새겨 있는 글귀를 읽어야 비로소 이 비석의 정체에 어슴푸레 짐작이 간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도쿄 이치가야(市ヶ谷)에서 극동국제재판소가 부과한 형벌과 기타 연합군 전쟁범죄법정이 내린 일부의 형벌이 이곳에서 집행되었다. 전쟁에 의한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곳을 앞서 말한 유적으로 삼아 이 비석을 건립한다. 쇼와 55년(1980년) 6월."
"이치가야에서 극동국제재판소가 부과한 형벌". 도쿄 이치가야에서 열린 도쿄 재판에서 전범 일곱 명에게 내려진 교수형 판결을 가리킨다. 즉 이곳에서 전범 일곱 명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는 뜻이다. 이곳은 바로 전범 일곱 명을 형장의 이슬로 보낸 스가모형무소 교수대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 경시청 감옥 스가모 지서가 설치된 것은 1895년. 청일 전쟁 직후이다. 1897년에 스가모 감옥으로, 1922년에 스가모 형무소로, 1937년에는 스가모 구치소로 바뀌었다가 패전 후인 1945년 11월에 GHQ에 접수되어 '스가모 프리즌'으로 불렸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 후인 1952년 4월에는 다시 '스가모 구치소'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도쿄 구치소로 바뀌었으며 1971년에 해체되었다. 전범 일곱 명에게 교수형을 집행함으로써 일본의 '전후 번영'이 시작되었다면, 그 전후 번영을 뽐내는 고층빌딩이라는 상징물이 그 시작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럽고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이 전범 일곱 명 중에 일본의 침략 전쟁을 이끈 도조 히데키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여섯 명의 전범과 함께 이곳에서 침략 전쟁의 최고 지도자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다음날 전범으로 체포된 스물여덟 명 중, 열일곱 명이 석방되었다.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의 중압에서 벗어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침략 전쟁의 하수인들도 이들 전범에게 죄를 덧씌우고 전쟁에서 벗어나 안온한 평화의 시대를 살았다. 역사학자 요시다 유타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 일본인은 너무나도 안이하게 다음과 같은 역사인식에 기대 전후사를 살고 있다. 즉 한쪽 끝에는 항상 군도를 허리에 차고 위협을 가하는 거칠고 흉포한 군인을 두고, 다른 한 쪽 끝에는 국가의 앞날을 우려하면서 고뇌에 빠져 있는 리버럴하고 합리주의적인 시빌리언을 두는 역사인식.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었던 후자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힘으로 꺾여나가는 가운데 전쟁으로 가는 길이 준비되어 갔다는 역사인식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후자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가탁(假託)함으로써 전쟁 책임이나 가해 책임이라는 쓰디 쓴 현실을 마셔 삼켜버렸다. 말하자면 '당의(糖衣)'를 두른 것이다." (<昭和天皇の終戦史>(吉田裕 지음, 岩波新書 펴냄, 1992년), 240쪽)
여기에서 말하는 "항상 군도를 허리에 차고 위협을 가하는 거칠고 흉포한 군인" 중의 대표가 바로 도조 히데키이다. 군복이나 국민복 차림에 로이드안경을 쓴, 민머리 모습의 이 '말썽 많은' 도조 히데키를 기억할까? 아니 왜 기억해야 할까? 한 때, 수상,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등, 모든 권직을 독식하고 진주만 습격을 지휘하는 등, 2년 10개월 동안 일본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있었던 인물. 그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제작되었고 회상록이나 기록들도 많이 발굴, 공개되었다.
▲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 광기의 시대와 역사에 휘말린 초라한 지도자의 초상>(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페이퍼로드 |
일본에서 단행본이 문고판으로 다시 출판되는 경우는 '고전'으로 소장 가치가 있거나 스테디셀러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 책은 '독서 시장'에서 오랫동안 읽힌, 혹은 앞으로 읽히는 '고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적어도 도조 히데키 연구에서 이 책은 독보적이다. 더구나 한국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도조 히데키론이다.
이 책은 '도조 히데키 평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평전이 한 인물을 대체로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아니면 지나치게 악인으로 그려내는 것과 달리 이 책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되도록 도조 히데키의 '내부'에 들어가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옮긴이가 "도조 히데키라는 인물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구성"(16쪽)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그의 전 생애를 도조 히데키의 내재적인 논리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매우 꼼꼼히 다루고 있다.
이 과정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료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각종 문헌 자료에 그치지 않고 인터뷰 등을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고 재구성된 사실에서 논리적 회로를 작동시켜 그의 심정과 생각을 재구성해낸다. 그래서 한없는 칭송을 거듭해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우파의 '도조 히데키 구하기'에도, 혹은 도조를 일본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악마'로 서둘러 규정하는 전후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언설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저자가 시도하는 것은 그를 그의 시대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새삼 확인되는 것은 기존의 도조 히데키 이미지이다. 아침마다 천황에 대한 군인의 충성을 담은 <군인칙유>(1882년에 천황이 군인들에게 내린 '말씀')를 아침마다 암송하는 사람. 언제 어느 곳에서나 메모를 하고 이를 주제별로 분류해 보관해두는 '메모광',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던 전시기에 불쑥 민생 현장에 나타나 쓰레기통을 뒤져 생선가시를 찾아내 배급제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여부를 조사하던 사람.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으면서도 항상 성적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밤샘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 천황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 도쿄 재판의 법정에서도 방청석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직 재판에만 집중하는 사람. 아들에게는 엄격하지만 딸들에게는 한 없이 자애로운 아버지. 1원 짜리 한 장도 허투루 쓰지 않고 검소에 검소를 거듭하고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은 사람. 즉 꼼꼼하고 성실하고 노력파이며 자신에게 엄격하고 사생활도 없이 항상 '국가'(천황)을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도조 히데키이다. 도조에 대한 이런 이미지는 이 책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과장이나 오류가 있기 하지만 대체로 다른 기록물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것들이다.
굳이 의미를 둔다면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을 새삼 증거를 가지고 확인했다고 해서 그가 했던 역사적 역할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꼼꼼하고 성실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그의 사적 특징이 독재자라는 공적 역할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독재자는 무수히 많다. 독재자는 반드시 '괴물'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를 예로 들어 '악의 평범성'을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성격과 관계없이 그가 살았던 시대가 왜 광풍의 시대에 말려 들어갔고 그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광풍의 시대가 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이다. 저자도 이 점을 의식했을 것이다. 제목을 "도조 히데키 평전"이 아니라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라 한 것은 도조 히데키라 불리는 한 사람이 '시대', 다시 말하면 '천황'이라는 존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와의 상호 규정 속에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도조 히데키를 만든 시대', '도조 히데키가 만든 시대', '도조 히데키를 버린 시대'(7쪽)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A와 B'라 할 때, '와(과)'는 앞뒤의 명사를 아무런 관련 없이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격조사가 아니다. 그래서 A와 B가 어떻게 상호구속하고 있는가를 '신경질'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그렇다면 역시 도조 히데키는 천황이 아니라 '천황의 시대' 속에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는 생애 세 명의 천황 속에서 살았다. 무쓰히토, 요시히토, 히로히토. 천황이라는 존재를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 구조 속에서 보아야 한다면 천황의 개인명은 의미가 없다. 역시 천황제가 문제이다.
이 책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이 지점에 있다. 도조를 구속하고 도조를 규정한 천황과 천황제에 대한 분석이 잊어버릴 만하면 등장하는 마치 '에피소드'로만 단속적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도 이 점을 의식하고 있기는 하다. "전쟁 지도자 도조가 전쟁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천황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15쪽)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옮긴이가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주도한 미국이 도조를 희생양으로 몰고 가는 과정을 공들여 서술하고 있는 부분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처럼, 후반부에서 히로히토와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천황이 도조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답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573쪽)는 식으로 자료의 한계 등을 들어 천황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다. 이는 "한 권의 책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도",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16쪽)라는 옮긴이의 설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매우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조 히데키에게 모든 전쟁 책임을 덧씌운 도쿄 재판을 통해 천황 히로히토는 살아났다. 그리고 또 일본 국민들도 이 무겁고 성가신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렇다면 도조에 대한 책임 덧씌우기는 히로히토의 살아남기 과정과 분리할 수 없다. 지은이의 말을 빌리자면, '도조 히데키를 버린 시대'가 '도조가 만든 시대'라는 해석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가를 해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왜냐하면 전쟁은 '도조가 만든 시대'가 아니라, '도조가 만들었다고 해석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도조가 '억울하다'면, 전쟁 책임은 히로히토가 져야 한다. 도쿄 재판이 끝난 지 30년 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정면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이 지점에 있었다. 실제로 도요시타 나라히코의 연구(<히로히토와 맥아더>(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에는, 히로히토와 미국이 자신들의 목적, 즉 '살아남기' 위해 도조를 어떻게 교수대로 보냈는가, 즉 전쟁의 시대를 '도조가 만든 시대'로 어떻게 만들어 갔는가가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사실 지은이의 일련의 책들은 일본의 역사학계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 이유는 기초 문헌과 인터뷰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지나치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실 책 곳곳에 사실과 해석이 혼동되어 있거나 근거 없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점이 호사카 마사야스와 이 책의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역사적 상상력은 반드시 '문헌으로만 확인되는 사실적 근거'에 의해서만 증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왜 그러한 역사적 상상력이 천황 히로히토에 대한 분석에서 유독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특히 전시기에 대한 분석에서 히로히토에 대한 분석은 뒷전이다. 지은이의 말을 빌리자면, '도조 히데키가 만든 시대'이니 히로히토가 전쟁에서 자유롭다는 뜻일까?
우파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이 책의 지은이 호사카 마사야스를 가리켜 국제적 시점이 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문어 항아리' 사관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고바야시의 비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이 책이 도조를 감싸고 있던 '항아리', 즉 '천황의 시대'에 대한 분석 없이 "항아리 속에 있는 문어"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조 히데키의 인물상을 꼼꼼하게 그려냄으로써 한편에선 한국어 번역판에 실려 있는 이 책의 부제대로 "광기의 시대와 역사의 휘말린 초라한 지도자" 도조 히데키를, 다른 한편에선 실질적인 책임자 '히로히토'도 동시에 '구출'하려 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저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 책은 결과적으로 '도조 히데키 구하기'와 '히로히토 구하기'에 동시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책이 일본의 '독서 시장'에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이 점에 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무려 7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책을 번역하고 꼼꼼하게 역주를 단 번역자의 노력과 능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특히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지명을 한국어로 옭기는 데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 몇 가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자, 탈자 때문이다. 물론 번역자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일본식 한자를 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쇄상의 문제일 듯하다. 이 밖에도 몇 가지 오역이 있어 바로잡고 싶다.
하나는 '산본오십육(山本五十六)'을 '야마모토 고주로쿠'로 옮겨 놨는데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바로 잡아야 한다. 또 도조 어머니의 고향이고 도조가 보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소창(小倉)'을 '오구라'로 표기하고 있는데(35쪽의 두 군데, 652쪽), 이는 '고쿠라'가 맞다. 지금의 기타큐슈 시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금택(金澤)'을 '가네자와'로 표기했는데(89쪽, 140쪽), 이는 '가나자와'가 맞다. 이시카와 현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 지명이나 이름은 한자로만 표기되는 경우가 많고 또 반드시 읽는 방식에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나도 자주 잘못 표기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큰 흠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방 사람은 그렇지 않다 (…) 그러나 군인은 다르다"(90쪽), "천황에게 모든 생활을 바친 군인과 달리 지방인은 자신의 이해득실이나 타산에 따라 움직이는데"(114쪽), "군인은 스물네 시간 몸을 천황 폐하께 맡긴 자이다. 하지만 지방인은 다르다(422쪽)"라는 문장에 나오는 '지방'이라는 말은 한국어로는 '촌사람'이나 '지방 출신'으로 오해할 수 있다. '지방'이라는 말은 일본 군대에서 사용하던 소위 '군대말'이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사회인'이라는 뜻이다.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민간인'이나 '사회인'이 원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요시다 유타카가 쓴 <일본의 군대>(최애주 옮김, 논형 펴냄) 등의 여러 자료를 보면, "일본 군대에서 사용하는 '지방'이라는 말은 군대 밖의 일반 사회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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