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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보리의 거부권, '비민주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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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보리의 거부권, '비민주적'인 것인가?

[해방일기] 1947년 9월 21일

1947년 9월 21일

엊그제 일기 끝에 유엔 창립 당시 가입국 중 소련의 뜻에 확실히 동조할 나라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4개국뿐이라 했는데 하나 빠뜨렸다. 유고슬라비아다. 현재 회원국 193개국 명단을 검토한 것이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는 그 명단에 나타나 있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생각이 났는데 유고슬라비아를 깜빡했다.

1947년 9월 23일 총회에서 조선 문제 유엔 상정이 41대 6으로 가결되었다. 소련과 위 5개국이 반대했고, 7개국이 기권했다. 당시 회원은 55개국이었다. 미국 대표로 참석한 마셜 국무장관의 9월 17일 조선 문제 상정 제안에 대한 각국 대표의 반응이 국내 언론에 소개된 것을 보더라도 이 제안의 적절성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그런데도 압도적 표결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유엔에 대한 미국의 입김이 얼마나 거센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플러싱 18일 중앙사발 공립] UN총회에 있어서의 마샬 미 국무장관의 연설에 대한 반향은 아래와 같다.

중국 대표 王世杰 : 마샬 장관의 연설은 자못 심각한 인상을 주었다. 동씨가 기초한 문제는 우리의 심심한 주의를 요한다.
소련 대표 비신스킨 : 나는 18일의 연설을 통하여 소련의 태도를 표명할 예정이다.
영국 대표단의 측근자 : 마샬 장관의 조선에 관한 제안에 대하여 이는 의외이며 영국 대표단을 놀라게 하였다.
불란서 대표단 : 언급을 회피하였다.
호주 수석 대표 : 마샬 장관의 거부권에 관한 견해에 대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나는 특히 안보이사회에 있어서의 국제 분쟁의 평화적 조정과 신 멤버의 가입 신청과 같은 사무적 문제에 관한 거부권의 폐지에 대한 마샬 장관의 견해를 주목하고 있다."
유태인 대표 :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마샬 장관의 성명은 美國이 금번 회기 중 본문제의 해결 방안을 발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 업서버 임영신 : 조선을 위한 마샬 장관의 노력은 청사에 남을 것이다. 조선인은 자유 선거를 통하여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조선 통일 완전 자유 총선거 조선 독립 정부 수립 열국의 조선 독립 정부의 승인 UN의 조선 참가에 관한 제안을 UN 총회에 급속히 상정하도록 미국 기타 제국 대표와 회견을 교환하였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19일)

당시 조선인들이 접할 수 있던 외국 반응을 재현하기 위해 요점을 벗어난 유태인 대표의 발언이나 무조건 미국을 지지한 중국 대표의 반응을 포함해서 기사 내용을 전부 옮겨 놓았다. "의외"라고 한 영국 측의 반응과 프랑스 측이 언급을 회피한 점이 눈길을 끈다.

미국 제안의 적절성에 대한 의문은 '평화와 안보'에 관한 사안은 총회가 아니라 안보리 소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안보리 운영의 특징은 5대 상임 이사국의 '거부권'에 있었다. 거부권은 주권 국가 간의 평등이라는 유엔의 기본 원리에 저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화의 현실적 보장을 위해서는 모든 강대국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 거부권 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당시 그리스 문제가 안보리에서 소련의 거부권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안보리를 회피하고 총회에 조선 문제를 상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안보리의 기능을, 나아가 유엔의 평화 보장 기능을 위협하는 조치였다.

주권 국가 간의 평등 원칙에는 대표성 문제가 있다. 현재 유엔 회원 193개국 중 인구가 가장 적은 97개국이 뜻을 합친다면 세계 인구 3.4퍼센트의 대표들이 총회에서 원하는 결정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10억 인구의 대표와 100만 인구의 대표가 같은 한 표를 가진다는 것은 민의의 효과적 수렴 방법이 될 수 없다. 근대 국가주의의 유제라 할 수 있다.

국제연맹은 이 대표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만장일치제를 채택했었다. 모든 나라가 거부권을 가지는 셈이었다. (의안에 해당된 나라를 제외하고) 숫자의 힘보다 설득을 통해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 국제연맹의 이상이었다. 이것이 대표성의 불균형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길이기는 했지만, 실제 운영을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있었다.

유엔은 총회 운영을 쉽게 하기 위해 다수결제를 채택했지만 대표성 문제 때문에 실효성의 한계가 있는 점을 감안해서 평화 보장에 직접 관계되는 사안에 한해서는 거부권을 운용하는 안보리에서 다루게 한 것이다. 그러니 안보리의 거부권은 유엔의 평화 보장 기능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 불가결한 제도였다.

그런데 미국은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데 방해가 된다 해서 거부권 제도를 '비민주적'인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안보리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 조선 문제의 총회 상정이었다. 마셜의 9월 17일 총회 연설 중 군정청 공보국에서 공표한 조선에 관한 내용을 9월 17일자 일기에 소개했는데, 9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거기에 담기지 않은 연설 내용 9개항을 뽑아놓았고, 그중에는 안보리 및 거부권에 관계된 항목이 몇 있다.

(2)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 있어서의 5대국의 거부권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
(3) 55개국 UN 총회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계속적으로 회의를 개최하라. (이는 전 UN가입국으로 감시위원회를 설치코 연중무휴로 속개하여 세계를 감시코 안보이사회가 실패하는 때에는 하시라도 건의를 행하여 문제 해결에 관여하려는 것이다.)
(5) 소련은 희랍에 대한 적대적 침략적 행위를 중지시키려는 UN의 행동을 방지하고 있다. ("조선 문제 유엔 상정-마 장관 총회에 정식 요구" 중)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3국과 그리스 사이의 분쟁을 3국의 침략으로 안보리가 규정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소련이 이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총회에 '제2의 안보리'(거부권 없는)를 만들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사태의 윤곽을 1947년 3월 12일자 일기에 그려놓았거니와, 3국을 침략자로 명쾌하게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상황이었다. 충분한 조사와 토론도 없이 그리스의 반공 정권을 유엔이 지지하고 나서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안보리의 거부권이 패권주의적 결정을 억지하는 효능을 가진 것이다. 미국이 무력과 재력으로 군소 회원국들을 조종해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것을 막아야 유엔의 권능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다수결로 통하지 않으니까 다른 길을 만들기 위해 온갖 획책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길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안보리를 회피하고 조선 문제를 총회로 가져갔다.

마셜의 제안은 신탁 통치 없는 조선 독립 방안을 주장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극우파만이 아니라 중간파의 지지도 받았다. 합작위 선전부에서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고 한다.

"미 국무장관 마샬 장군이 조선 문제를 UN에 제출하여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의 '신탁' 문구를 말소시키고 조선의 완전 자주 독립을 촉성시키려는 호의에 대하여 만강의 사의를 표하며 환영하는 바이다. 조선 문제가 사실상으로 UN에 상정되는 경우에는 현 당국이 인정하는 정식 대표가 비공식 혹은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참여하여 발언권을 얻어야 한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20일)

조선 문제가 총회에서 논의된다면 조선 대표가 옵서버 자격으로라도 참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 당연한 일로 인해 '민족 반역자'란 욕설을 뒤집어쓴 사람이 있다. 반탁투쟁위원회와 독촉국민회가 9월 20일 재미 조선사정소개협회장 김용중을 민족 반역자로 매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성명에서 두 기구는 임병직-임영신 두 사람을 유엔 참가대표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20일)

이승만의 추종자인 두 임씨는 유엔총회장 부근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선 대표로 행세하고 싶었는데 김용중이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워싱턴 18일발 UP 조선] 미국 당국에서는 UN서 어떠한 개인이 조선을 대표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UN 자체가 결정할 문제이며, UN에 가입치 않은 국가의 이익이 관계되는 때에는 UN 자체가 그 나라를 대표하여 누구가 진정(陳情)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당지 조선인단체 대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의견이 구구하다. 한인위원회 위원장 임병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총회에 파견된 조선국민의회 및 남조선민주의원으로부터 나와 임영신 여사를 조선의 UN총회 대표로 임명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나와 임 여사는 조선의 목적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타국과 협력하여 전력을 다할 것이다."

한편 소식통에서는 국민의회라는 것은 조선의 입법의원이 아니고 이승만 박사가 창설한 별개의 정치단체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관련하여 조선사정협회 회장 김용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약간 의원에 전보를 보내고 UN에 대한 비공인 대표의 활동을 부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하지 중장에게도 통신하였다. 입법의원의 회답은 이상과 같이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20일)

9월 19일 입법의원 회의에서는 김용중이 제기한 문제의 의안 상정 시도가 기각되었다.

입법의원에서는 19일의 제143차 본회의에서 미 국무장관 마샬 장관과 UN 총회에 감사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송하기로 가결하였다. 동 전문 내용은 기초위원회 간부에게 일임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동 회의에서 재 워싱턴 김용중으로부터 김원용(입의의원), 김규식, 하지 중장에게 보내온 'UN에 조선 문제가 상정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국제연합의 자칭 조선인대표의 활동을 부인하는 결의를 입의에 제의하기를 긴급히 건의한다'는 서한이 문제되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 개인의 서한이며 또 입의로서 대표를 선정 파견한 사실이 없으므로 상정을 기각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20일)

그리고 9월 23일에는 우익 정당-단체 대표들이 이승만을 유엔에 파견할 조선 대표로 '선출'했다.

한민 한독 조민당 등 우익정당 사회단체 대표는 17일부터 누차 마포장 이승만 숙소에서 회합하여 UN에서의 조선 문제 상정에 대비와 아울러 대표파견 문제를 토의 중이었는데 23일 오후 2시부터 한민, 한독, 조민, 여자국민당, 임협, 독촉, 대동청년단, 조선상공회의소 등의 대표자가 회합하여 UN에 조선 대표로 이승만 파견을 결정하는 동시에 24일에는 입의 의장 과도정부 정무위원장에게 이 박사 파견에 대한 청원서를, 하지 중장에게는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각각 제출하였다 하며 한편 UN 리 사무총장과 총회 의장에게도 대표파견에 관하여 특별히 고려해 달라는 전문을 발송하였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25일)

앞에서 얘기한 9월 19일 입법의회에서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법" 통과시킨 일을 덧붙여 말해둔다. 통감부 시절인 1907년 제정되어 일제 시대 내내 언론 탄압의 무기로 활용된 '식민지법'이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주장을 1947년 8월 15일자 일기에 소개했는데, 신문지법을 대치할 언론 관계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새로 통과된 법 중에는 신문지법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억압적 조항이 있어서 법조계 인사들까지도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 민주통일당 홍명희 담 "신문 기타 정기 간행물에 관해서는 현재 실시되고 있는 포고령 2호 위반으로 처단할 수 있는 이상 동 법령 6조 4항 같은 것은 진정한 언론을 구속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나는 6조 4항을 삭제하는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그리고 동법의 입법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일제의 치안 유지법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법은 더욱 악용될 우려가 많으니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 새한민보사장 설의식 담 "현재 출판계는 확실히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 대한 제약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악법이라 하더라도 운영 여하에 따라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아무리 법문이 관대하더라도 운영 여하에 따라서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요컨대 매사가 운영 여하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이 법령 중에 제일 위험하고 우려되는 점은 제6조 4항이다. 이 조항은 동 법령의 중심인데 그 지적한 범죄라는 것은 파괴, 선동, 민심현혹인데 이것은 매우 막연한 것이다. 구체적 지시가 없는 바에는 그 해석은 완전히 집권자의 해석에 달렸다. 이렇게 막연한 조문 아래에서 집권자의 방촌을 일일이 촌탁치 않고서는 붓대를 들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칙에 있어서는 내가 20여 년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가혹한 것으로 6조 4항과 8조는 시정을 요망한다."

◊ 인권옹호연맹위원장 이홍종 담 "민주 건국을 지향하는 과도기에 있어 언론의 자유를 가장 존중해야 되며 여론 정치를 해야 하는 남조선에 있어 이번 입의를 통과한 신문지법은 언론 자유를 구속할 염려가 없지 않은 법령이며 벌칙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 서울지방검찰청 엄항섭 담 "이 법령에 기사의 면책 규정이 없는 것이 유감이고 무엇보다 간행물허가 취소권을 정당인이 취임할 수 있는 공보부장이 쥐게 된 것은 그 권한이 편파될 우려가 많다. 6조 4항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규정은 형법 105조와 중복되어 있는데 이것은 입법기술의 졸렬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21일)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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