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발전소, 비우는 발전소, 춤추는 발전소, 끄는 발전소, 우리나라 5000만 개 발전소. 에너지를 절약하는 당신은 대한민국 발전소입니다." 요즘 흔히 듣는 광고 카피이다. 낭랑한 여자 성우의 음성은 여러 사람의 마음에서 발동기를 돌려 따뜻한 전기를 생산할 것만 같다. 어디 발전소만 그럴까.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대모산, 일자산, 앵봉산, 호암산, 우장산, 사패산, 구룡산, 대모산, 삼성산, 관악산, 남산, 북악산, 궁산…그리고 인왕산. 서울에 있는 산 이름이다. 하지만 어디 이 산들뿐일까. 서울에서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는 1000만의 시민들. 그들 모두는 하나하나의 산이 아닐까.
▲ 인왕산 정상에서 본 서울 풍경.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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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첩첩산중의 서울에서 살고 있는 요즈음,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나의 끼니를 해결해주는 식당이 있다. 인왕산 어느 자락에 자리 잡은 그곳의 식사 메뉴는 오로지 청국장과 두부찌개, 둘뿐이다. 그 식당에서 나는 오로지 청국장만 먹는다.
보통 점심때에 가다가 어제는 모처럼 저녁에 가게 되었다. 똑같은 식당인데도 햇볕이 쨍쨍한 때에 가는 것과 해가 기우뚱한 때에 가는 건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하루를 마감하고 햇볕이 졸아드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곳에 있었다.
점심때의 분주한 시간이면 식당 안은 각종 소리로 가득 찬다. 홀에선 빈자리가 거의 없고. 모두들 앉아서 밥 먹느라 바쁘다. 밥그릇을 싹싹 긁는 소리, 밥 씹는 소리, 밥 넘기는 소리, 물 따르는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어울린다. 내 입맛으로 보면 국보급 청국장인데, 그게 나만의 평가가 아닌 모양이다. 단골들이 아주 많다. 혼자이거나 둘이 가면 낯모르는 사람들과의 합석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맛에 열중하다 보니 아무도 불평을 않는다.
이곳은 식사 말고 홍어와 제육볶음도 팔지만 밥집이라서 술은 안 판다. 그러니 이곳의 그것은 안주가 아니라 반찬인 셈이다. 굳이 술을 마시려면 옆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사서 가지고 가는 게 좋다. 술을 취급하지 않으니 잔이 따로 없다. 해서 물 컵으로 잔을 대신해야 하는데 소주는 좀 불편하지 않을까.
저녁에 들러보니 아주 한가했다. 저녁이면 아무래도 술꾼으로 변신하는 이들이 많고 그래서 술집으로 더 많이 몰리는가 보다. 더구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자리가 많이 비었다. 그 고요를 틈타 주방에서 건너오는 소리가 식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점심때 듣던 소리와 그 종류가 좀 달랐다. 그릇 씻는 소리, 밥 푸는 소리, 김치 담는 소리, 그리고 두런두런 주방 아주머니들의 소리.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청국장의 향기를 만끽하며 밥을 먹었다.
점심때라면 식당 입구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러니 정신없이 후다닥 먹고 나올 수밖에 없다. 배고픈 이들의 허기진 눈빛 앞에서 이런저런 여유를 부릴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녁에 가본 식당은 사뭇 달랐다. 여유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야말로 저녁이 있는 삶의 한 풍경이었다.
이곳 식당에 혼자서 가면 움푹줌푹 파인 장난감 같은 식판 두 개에 여섯 가지 반찬을 준다. 오늘 메뉴는 호박무침, 오이절임, 배추김치, 밴댕이젓갈, 묵, 파절임, 그리고 벌건 양념에 고즈넉하게 졸아든 생선 한 토막. 아, 형님처럼 고슬고슬한 잡곡밥에 누님처럼 짙은 향의 청국장.
일금 4500원. 값을 치르고 찬물로 입을 헹구고 식당 문을 나설 때 입구 옆에 작은 화단에서 묘한 기물을 발견했다. 녹이 잔뜩 슨 그것은 자세히 보니 쥐덫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라 호기심이 일어났다. 더구나 그 쥐덫의 입구에 떨어진 낙엽 하나가 눈을 끄는 것이었다.
▲ 저녁이 있는 식당의 화단 풍경. ⓒ이굴기 |
3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하나 되겠다 싶어 우선 생태계를 일별해 보았다. 손바닥만한 땅뙈기의 화단이었지만 식물의 종류가 제법 다양했다. 단단한 흙 위로 큰 고추가 몇 개 달려 있었다. 보라색의 가지, 민들레, 괭이밥이 마구 뒤섞여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흔히 나물로 해먹는 돌나물이 노란 꽃을 활짝 피우며 있었다.
꽃의 노란색과 어울리게 양지꽃이나 그리고 채송화, 제비꽃을 기대해 볼 수도 있겠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시멘트 독을 피하거나 그 작은 땅에서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것일 테다. 그리고 이 작은 식물의 동네에서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 건 한 그루의 대추나무.
쥐덫 앞에 누렇게 시든 낙엽 하나가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그 낙엽을 나는 하마터면 쥐로 착각할 뻔 했다. 그러나 쥐는 아니었다. 내가 가까이 가도 쥐는 미동도 안했기 때문이다. 혹은 주인아주머니가 쥐를 유인하기 위한 모형 쥐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꼭 쥐가 앉아있는 모습이었고 앞에는 쥐처럼 까만 눈도 박혔고, 코털 같은 게 길게 나와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시든 낙엽이었다. 그 낙엽은 이 화단 출신은 분명 아니었고 식당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플라타너스가 떨어뜨린 잎사귀인 것 같았다.
쥐덫은 네모난 철제 상자였다. 갈치나 고등어를 굽던 석쇠 같아 보이기도 했다.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내부가 곧 외부였다. 그리고 그 천장 꼭대기에 흰 전등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실은 전등은 아니었고 무슨 애벌레인가 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돼지비계였다. 그것은 흰 기름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두부찌개에 들어가야 할 한 토막의 돼지비계가 쥐를 잡는 미끼로 달려 있는 셈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쥐덫을 오래 구경했다. 쥐는 잡힐까. 이름난 식당 주위이니 쥐가 많을 것은 분명했다. 아마 손님의 발길이 끊기고 주방 아주머니들도 퇴근하면 이곳의 밤을 장악하는 자는 쥐들일 것이다. 그러나 야무지게 닫은 식당의 문과 수납장에서 쥐들이 갉아먹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기척이 없어도 밤새 윙윙 돌아가는 냉장고 소리, 전기계량기 소리는 쥐들에겐 큰 위협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찾아드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서울 쥐들은 깜짝깜짝 놀라야 할 것이다. 과연 굳은 기름으로 범벅이 된 식은 돼지비계 덩어리의 유혹에 쥐는 넘어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그건 모두 나의 추측에 불과했다. 이제 허기를 채운 배부른 자의 나른한 몽상이었다. 하지만 내가 먹으러 가는 식당 입구가 쥐에는 어쩌면 죽으러 가는 길의 입구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이제부터 차츰 어둠이 몰려오고 화단의 녹색도 검은 색으로 변했을 때, 녹슨 쥐덫은 보이지 않고 그 천장에 매달린 흰 돼지비계만이 고단한 쥐의 눈에는 사탕처럼 반짝반짝 빛날 것이란 사실!
▲ 화단에 놓인 쥐덫.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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