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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운명, 드디어 유엔으로!

[해방일기] 1947년 9월 17일

1947년 9월 17일

8월 이래의 좌익 검거가 저인망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언론계와 교육계에서 시작된 좌익 색출 작업이 모든 공직으로 확대되어 갔다. 검거가 시작될 때는 이것을 8·15 기념행사에 대한 '예비 검속'으로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이상 대규모 검거가 계속되면서 이제는 '좌익 박멸'로 여겨지게 되었다. 9월 17일의 검거 보도를 보면 범죄 사실에 대한 아무런 발표 없이 '음모 혐의'로 검거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8·15 전후를 기하여 수도경찰청에서는 좌익 정치 단체에 관련된 모종의 혐의로 수백 명의 국민 중등학교 교직원을 검거 취조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시 본청에까지 검거가 확대되어 시청 직원이 대량 검거되었다. 즉 17일 시내 마포 용산구를 비롯하여 각 구청원이 100여 명 모 좌익 정당에 가입하여 미군정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계획하다가 미연에 발각되어 검거를 당하고, 17일 오전에는 소방국 서울소방서 서장을 비롯하여 동 서원 약 20명과 영등포·용산·성동서원 등 약 10여 명이 역시 모 좌익 정당에 가입하여 좌익에서 폭동을 일으켜 방화할 때에는 태업을 하여 폭동을 조장하는 음모를 꾀하였다는 혐의로 검거하였다고 하는데, 수도청 측의 말에 의하면 아직 미체포의 용의자가 상당히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상은 아직 판명 안 되었으므로 이번 검거당한 용의자들의 범죄 사실이 어느 정도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18일)

40여 명 소방대원의 체포 사태에 대한 서울시 소방국장의 발언을 보면 소방국에서는 진즉부터 좌익 대원을 색출해서 쫓아내려 해 오다가 이번 좌익 탄압 사태를 맞아 체포하기에 이른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모든 공공기관에서 대동소이한 사정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소방서 내에 이러한 분자가 있다는 것을 이미 내탐하고 그들에게는 벌써부터 권고 사직을 요구하여 왔던 터이라 소방 작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더구나 600여 명의 소방종업원 중 40여 명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기정 방침에 따라 이들은 단연 처치하고 건실한 새사람을 등용할 터이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0일)

경찰도 좌익 색출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평택경찰서의 검거 보도를 보면 '불순한 조직체'의 탐문을 근거로 경관들을 체포, 취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찰관과 남로당원이 결탁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폭동을 봉기하려다가 일망타진된 사건이 있다. 즉 제1관구경찰청 관하 평택경찰서 문석제 서장은 취임 이후 서내 직원에 불순한 조직체가 있음을 탐지하고 수사주임 최무증 경사 김장묵 형사 최병근 등을 인치 취조한 결과 의외에도 남로당 평택지부원과 결탁하고 폭동을 봉기하려던 무서운 음모가 발각되어 일당을 체포하였는데 무기로는 엽총 9정과 지령서 계획서 화약 등도 압수하고 제1관구경찰청에 넘겨 엄중 취조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16일)

미소공위에서 미국 측이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회담장을 공격한 반탁투위를 감싸주고 있는 동안 이남의 학교, 관청, 경찰에서는 좌익 구성원들이 쫓겨나고 있었다. 아니, 좌익만이 아니었다. 10·1 사태 때 대구사범 교수로 있다가 시민 협상 대표로 나섰던 이종하는 학교를 사직한 후 부산으로 가서 경남여중 교사로 취직했지만 이 무렵 다시 그만둬야 했다. 좌익 활동의 증거가 아무것도 없더라도 미군정-경찰에 밉게 보인 사람들은 견뎌낼 수 없는 분위기였던 모양이다. (이용태, '아버지의 삶', <민중의 벗 여민 이종하 선생>(장정렬 엮음, 한국에스페란토협회 펴냄), 32~33쪽)

8월 20일 미소공위 회담에서 스티코프 소련 수석대표는 좌익의 대대적 검거를 사례까지 나열하며 항의하고 이틀 후에는 항의 내용을 언론에 공표했다. 8월 22일자 일기에서 이 항의를 다루며 제목을 "소련 대표 : '회담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하고 달았는데, 미국 측의 회담을 말자는 뜻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9월 17일 모처럼 열린(9월 5일 이후 처음) 회담에서 스티코프 소련대표는 미국 측의 공위 파괴 의도를 비난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앞부분만 옮겨놓는다.

"이미 장기간 공위 사업은 정돈 상태에 처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통일 민주주의 조선임시 정부 수립에 관한 문제를 공위에서 해결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명백히 나타난 미국 대표의 의도를 소 측 대표는 유감스럽게 지적하는 바이다. 공위는 발생된 난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또는 협정적 결정 채택에 경주한 반면에 미 측 대표는 공위의 부하된 문제 해결 불가능성을 증명할 목적으로 공위의 업무를 고의적으로 착란케 하며 지연케 하며 대표 간에 발생된 의견 불일치를 강조 및 첨예화하는 등의 방책을 취하였다. 이것은 공위 공동 보고 작성 시에 특히 현저히 나타났다. 양 대표가 제출한 공동 초안 토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미 측 대표는 공동 보고 작성을 거부키로 제의하고 공동 보고 작성에 있어서 양 대표의 협의 달성이 불능하다는 해설서를 첨부하여 소미 양 대표가 제출한 보고 초안을 양정부에 제출키로 제의하였다." (<조선일보> 1947년 9월 19일)

이날 회담에서 소련 측은 진행 촉진을 위한 두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1) 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 단체가 공위에 제출한 제 의견 강구에 즉시 착수할 것과 민주주의 조선 임시 정부 및 지방 정권 기관 구성(임시 헌장) 또는 정강에 대한 초안을 공위에 제출할 것, 그리고 (2) 임시 정부 요인과 또는 정부의 정권을 전임(轉任)할 절차에 관한 의견을 공위에 제출할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모든 정당 사회 단체에 대한 제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이상 소련 제안에 동의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소련 측은 이견이 있더라도 가능한 진행을 하자는 것인데, 미국 측은 협의 대상 문제 해결 이전에는 진행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측이 회담 진행을 위해 내놓은 최근 제안은 8월 12일의 것이었다. (1947년 8월 24일자 일기에 내용이 소개되었다) 그중에는 구두 협의를 생략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협의 대상 결정이 어려운 데 대한 대응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네 제안을 뒤집으며 소련 측 제안을 거부하고 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마음이 가 있는 콩밭은 유엔이었다. 미국 측이 9월 8일로 제안했던 4대국 대사 회담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 <런던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서방언론들이 즉각 조선 문제의 유엔 상정을 내다보는 논설과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1947년 9월 12일)

그리고 9월17일 마셜 미 국무장관이 유엔 총회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는 연설을 행했다. 군정청 공보국에서는 이 연설 전문을 9월 19일 언론에 공표했다.

"나는 여기에 조선 독립에 관한 문제를 상정하는 바이다. 미국, 영국 및 중국은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적당한 시기에 조선은 자유로운 독립 국가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 공약은 1945년 7월에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되었고 그 후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가하게 됨에 따라 이에 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12월 소련, 영국 및 미국의 3외상은 모스크바에서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고 기후 중국 정부가 이에 참가하였다. 동 협정에는 조선에서 회담할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의 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협의로서 조선 임시 정부 수립의 방법을 결정할 것이 규정되었다. 그 연후의 공동위원회의 임무는 조선에 대하여 원조와 조력을 제공하는 방법에 관하여 임시 정부와 협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합의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모스크바 협정에 참가한 4대국에 이를 제출하여 그 승인을 얻기로 되었던 것이다. 과거 2개년간 미국 정부는 모스크바 협정을 실천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는 방법에 관하여 공동위원회를 통하여 소련과의 합의를 획득하고자 노력하여 왔다. 미국 측 대표는 조선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는 결코 의사 표시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여 왔다.

우리 미국 정부의 태도는 지금도 이에 변함이 없다. 금일에 있어 조선의 독립은 2년 전에 비하여 하등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조선은 아직도 38선을 경계로 하여 공업 지대인 북조선에는 소련군이, 농업 지대인 남조선에는 미군이 각각 주둔하고 있다. 양 지역에 있어서는 물자 교류 혹은 교통 왕래는 거의 없는 상태이다. 조선 경제는 이렇게 마비당하고 있다. 조선 사람은 적이 아니다. 40년간의 일제 압제로부터 해방된 국민이면서도 아직 자유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상태는 무기한으로 계속시켜서는 안 된다.

조선 문제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미국은 최근에 모스크바 협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안하였으며 또 이러한 제안을 4대국 회의에 회부할 것을 제안하였다. 중국과 영국은 이에 동의하였으나 소련은 이것을 거부하였다. 또 미소공동위원회 양측 대표는 그 회의의 경과에 관한 공동 보고에 있어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조선 문제를 이 이상 쌍방의 교섭으로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통일 독립 조선을 수립하는데 지연시킬 것인 것이 명백한 일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독립에 관한 문제를 금반 UN 총회에 제출코자 하는 것이 미국의 의도이다.

미국은 이렇게 조선 독립의 조기 달성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의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관한 UN 총회 참가 각국의 공평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미국은 미소 양국이 합의를 보지 못함으로서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긴급하고 정당한 요구를 이 이상 지연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서울신문> 1947년 9월 20일)

지난 주 어머니 상을 당해 1주일간 연재를 중단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미안합니다. 그리고 조의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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