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눈을 깨끗하게 해주는 사진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글로 독자 여러분의 사랑을 받았던 '꽃산행 꽃글' 연재가 다시 시작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
다시 만난 설악반가사유상
이번 주말은 그냥 집에서 쉴까, 했다. 지난주에는 지리산을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월 첫 주말이 가까이 올수록 마음먹으려는 대로 마음이 먹어지질 않았다. 내 마음의 주소는 나의 관할지가 아닌가. 홑이불을 덮고 누우면 저 아래에서 발바닥이 저절로 꼼지락거려졌다. 특급 태풍이 접근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천왕봉-중봉-써리봉-치밭목으로 쏘다닌 지난 주말의 걸음들이 떠올랐다. 내 발목은 며칠 전의 산길을 되새김질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어둑한 능선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소리들이 자장가처럼 들렸다.
결국 파라택소노미스트 설악산 야외 실습에 따라붙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백담사를 지나 한계령 아래 마을에서 잤다. 작년 실습 때 왔던 그 민박집이었다. 그때 어둠에 잠긴 설악산을 배경으로 호젓하게 피어있던 해바라기는 올해는 태풍에 꺾였는지 밭 가운데 축 늘어져 있었다. 내일도 비가 오려나. 바람이 세게 불고 구름이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 한계령 아래에서 본 설악산 일대. ⓒ이굴기 |
새벽 4시 40분. 식당에 들러 아침과 점심의 도시락 2개를 싸서 한계령으로 갔다. 안개가 자욱하고 간간이 비가 뿌리고 있었다. 어둠이 질펀했다. 그 속에서 산행객들의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준비 운동을 가볍게 하고 천천히 설악산 속으로 진입했다. 바람이 몹시 불기 시작했다.
그 까닭을 잘 모르겠지만 지리산에서 곰이 생각난다면 설악산에서는 공룡이 생각난다. 오늘처럼 안개가 촉촉하면 길에 즐비한 돌이나 바위도 물기로 번들번들하다. 그게 꼭 공룡의 뒤집힌 발바닥 같다. 그리고 길가의 촘촘한 나뭇잎들 또한 공룡의 손바닥이나 발바닥 같다. 특히 생강나무 잎사귀나 곰취, 단풍취를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 생강나무 잎. ⓒ이굴기 |
잠깐잠깐 쉴 때마다 부족한 잠을 벌충하러 눈을 감았다. 오늘의 기상 상황을 뭐라고 할까. 비보다는 가늘고 안개가 짙은 이 상태, 바로 는개다. 작년에도 설악산은 맑은 얼굴을 보여주질 않았다. 올해도 아마 그럴 모양이었다. 지금 설악산을 휘감고 있는 공중을 는개가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그 는개가 얼굴을 흠뻑 부비고 적시는 기미에 눈을 뜨면 어둠은 차츰차츰 밝아졌다. 어둠은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있다가 차례차례 벗는 것 같았다.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서북능선에 올라서니 운무가 일순 걷히고 우리 올라온 한계령 고개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또 다른 운무가 덮치고 세상은 오리무중으로 변한다. 멀리 백두대간 쪽으로는 햇살이 짱짱한데 이곳 설악산에는 가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지나는 바위마다 바위떡풀이 간잔지런하게 피어있고, 금강초롱이 외로운 등을 달고 부복해 있다. 때로 사위어가는 불빛인양 흰 금강초롱도 있다. 구절초인가 했더니 까실쑥부쟁이였다. 병조희풀은 꽃을 활짝 벌리며 열매를 맺으려 한다. 길가에 흔한 투구꽃에는 벌들이 왱왱대며 활짝 벌어진 꽃잎 속을 서슴없이 공략한다. 꽃잎 속으로 쏙 들어갔을 때 짓궂게 꽃잎을 닫았다. 꿀에 취했는가. 벌은 아랑곳 않고 꽃만 탐하더니 화 한번 아니 내고 다음 꽃으로 향한다.
▲ 투구꽃과 벌. ⓒ이굴기 |
은분취는 설악산에서 처음 얼굴을 익힌 풀이다. 잎의 앞면과 뒷면이 확연히 다른 풀. 작년 공룡능선의 바위틈에서 바람에 나부끼다 뒤집어질 때 그것을 보고 놀랐었다. 오늘은 그 은분취의 꽃을 보았다. 대궁이 잎에서 쑥 올라와 고결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도처에 새며느리밥풀꽃이 흐드러지다. 노루오줌도 속절없이 시들어가고 있다. 여기저기 수줍게 자리 잡은 고본. 가는 잎사귀를 건드리니 냄새가 은은하다. 오리방풀이 흔하다. 그리고 나래회나무, 민둥인가목, 이노리나무, 박쥐나무, 배암나무. 산앵두나무가 빨간 열매를 반짝반짝 켜고 있다. 물 묻은 열매를 하나 따서 입에 넣으면 지친 등산객의 발끝에까지 향기와 힘을 전달해준다.
▲ 고본. ⓒ이굴기 |
▲ 민둥인가목. ⓒ이굴기 |
▲ 산앵두나무. ⓒ이굴기 |
끝청을 지나 중청산장에 도착하기 직전 휘돌아가는 고갯마루가 있다. 너덜겅이라서 바위가 제법 불룩불룩 솟은 곳이다. 그곳에 가서 우리 일행들은 모두 몸을 바위에 따개비처럼 납작 엎드렸다. 아, 이름도 어쩌면 그렇게 어울리는가. 등대시호. 실 같은 줄기에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중층의 구조를 한 꽃. 저 꽃 속으로 가만히 들어가 누워 한 나절 혼곤히 잠들고 나와 곧바로 저승으로 들 수 있다면!
▲ 등대시호. ⓒ이굴기 |
비를 몇 방울 섞으면서 점심을 중청산장에서 먹었다. 그리고 대청봉을 지나 오색으로 하산하는 길이었다. 내려가는 길에는 비가 더욱 오고 비를 피하느라 우리의 시선도 발끝에 주로 머물고, 꽃들도 외출을 삼갔다. 결국은 산오이풀, 까치고들빼기, 미역취, 물봉선, 여로를 만나는데 만족해야 했다.
오른편에서 개울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청봉에서 오색까지 딱 절반에 해당하는 설악폭포인가 보다. 다리는 작년처럼 정확히 아팠고 나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작년 그 자리에 참배암차즈기가 피고 있을까? 내리막 급경사에 있었다. 대가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혀를 낼름낼름 내밀고 독이 오른 뱀처럼 참배암차즈기는 노랗게 피어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내려오니 드디어 급격하던 물소리가 순해지더니 평탄한 길이 나왔다. 이제 오색의 입구가 바로 저만치였다. 나는 마음이 조금 조마조마하기 시작했다. 사연이 있다.
어제 나는 한계령 아래 민박집에서 잤다. 그 민박집은 어느 해 태풍에 큰 물난리를 겪고 마을이 몽땅 떠내려 간 뒤 폐허가 된 마을을 새로 복구한 집이었다. 그 집에서 누워 뒤척이는 동안 한 가지 생각에 집중했다. 그것은 작년 산행할 때 오색 입구에서 만났던 나무등걸이었다. 그것은 반가사유상을 꼭 빼닮았다. 해서 나는 설악반가사유상이라 명명해둔 터였다. 과연 그 설악반가사유상은 올해도 제자리에 있을까? 내일 고된 산행을 마쳤을 때 그 반가사유상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줄까? (☞관련 기사 : 설악반가사유상을 만나다)
▲ 2011년에 만난 설악반가사유상. ⓒ이굴기 |
설악산 골짜기에서 굴려온 돌들이 편안하게 쉬고 있는 곳, 그곳으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설악산은 그동안 숱한 물난리를 겪었을 것이다. 이 험하고 좁은 골짜기에 태풍과 비바람이 불어닥쳤다. 풀들도 자연스레 녹아 없어지듯 그 반가사유상도 거처를 옮기지 않았을까. 이 세상의 풍파가 좌대도 없이 수행하는 그 부처님을 과연 그대로 가만 두었을까. 힘없는 나무등걸은 어디론가 떠나버리지 않았을까.
나는 엎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등산객이 많이 지나가기에 사진 찍는 척하면서 절하듯 엎어졌다……말없는 반가사유상, 내가 명명한 설악반가사유상……1년 만에 다시 친견하니 거센 물살에 많이도 수척하였다. 잘록한 허리도 많이 깎여 나간 듯 했다. 피부도 새카맣게 변한 것 같았다……반가사유상은 옆구리에 무슨 보따리처럼 수북한 쓰레기더미를 끼고 있었다. 대청봉 아래에서부터 흘러온 낙엽과 잔 나뭇가지였다……그것은 설악산에서 내려왔으되 차마 세상으로 내려 보내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있는 번뇌 더미가 아니었을까.
▲ 2012년에 만난 설악반가사유상.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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