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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진보'의 이념이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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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시민적 진보'의 이념이 왜 필요한가?

[나는 반론한다] 박동천의 반론에 답한다

지난 8월 17일 '프레시안 books' 103호에 실린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의 <정치의 이동>(상상너머 펴냄) 서평을 놓고 책의 저자인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와 박 교수가 논쟁을 진행 중이다. 지난 8월 31일 박동천 교수의 답변에 장은주 교수가 다시 재반론을 보내 왔다. (☞관련 기사 : ①박동천 : 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②장은주 : '자유주의'가 한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③박동천 : 이념이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1. 나의 <정치의 이동>(상상너머 펴냄)을 두고 벌어지는 박동천과의 이 토론이 나로서는 무척 즐겁다. 무엇보다도 배움이 있고 커다란 지적 자극을 받아서다. 박동천의 이런 저런 지적과 비판은, 내가 동의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에도,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으며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생각들을 해 보도록 다그친다.

그러나 박동천도 지난 기고문 말미에 우려했듯이 이런 토론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같이 즐거워할지는 자신이 없다. 물론 그의 변명 아닌 변명처럼 꼼꼼함을 다투는 이런 토론의 의미야 명백하지만, 그리고 사실 나는 바로 그 점에서 이 토론이 정말 재미있지만, 자칫 독자들에게는 어떤 '말꼬리 잡기 놀이'처럼 여겨지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해서, 내가 생각할 때 사소하게 보이는 오해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침묵하고 넘어가련다. 저자가 책을 세상에 내놓은 다음에야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할지는 독자의 몫이고, 저자가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독자 탓을 해댈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박동천이 내 책을 아주 잘못 읽고 이상하게 수용하고 평가하지만 참겠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고,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 더 많다고 여기는 것이 내게는 더 마땅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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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이동>(장은주 지음, 상상너머 펴냄). ⓒ상상너머
앞으로 이 글에서 박동천이 내 책과 이 토론의 와중에 한 내 이야기에 대해 제기한 문제들과 비판들 가운데 내가 침묵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것에 대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그저 경청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라고 여기길 바란다.

독자들을 배려해서도 그렇고 이 토론의 생산성을 위해서도 그렇고, 토론의 큰 줄기에 집중하려 한다. 그것은 "이념이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지난 번 박동천의 (편집자가 붙인) 기고 제목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제다. 물론 이는 다시 그가 처음 서평에서 나의 책이 구체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아서 불만이라고 한 부분과 겹치는 문제다. 나로서는 지난 번 나의 반론에서 이 문제에 나름의 답을 했다고 여기지만, (얼마간 이미 짐작한대로) 박동천은 그것이 충분치 않거나 그런 해명으로는 그가 보는 내 책의 결함을 덮을 수 없으리라고 보는 듯하다.

에두르지 않고 말한다면, 지난번에 내가 했던 답은 박동천이 민주적 공화주의를 새로이 정초해 보고자 했던 나의 시도에 대해 가한 비판은 과녁을 엉뚱하게 설정하고 있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같은 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의 비판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는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또 경청하련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주문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리고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다른 과제를 위해 현실 정치에 대한 철학적 개입을 했고, 그가 지적하는 차원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침묵하는 게 사실은 더 올바르다는 생각을 바꿀 이유를 모르겠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내 생각을 말해 보기로 하자.

2. 사실 내 책이 박동천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구체적인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 무언가 손에 잡히는 메시지나 시사를 주지 못한다는 유의 지적은 몇 몇 다른 독자들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군색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저 '정치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이 본디 그렇다'는 정도의 답변만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침묵이나 절제를 나는 오히려 정말 잘한 일이라고 여기는데, 그것은 내가 '철학자로서' 정치와 관련해서 정열과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나서 얼마간의 책무조차 떠맡기도 하면서 나름 잘 할 수 있는 역할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동천은 정치 현실의 개선을 위해서는 또는 많은 정치적 현안들의 해결을 위해서는 철학이나 이념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현실에 '잘' 적용하고 '잘'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책에서 그리고 다른 어디에서도 철학자로서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가능한 절제했다. 아마 박동천에게 설득당하든가 해서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그 동안 때때로 이런 저런 공론장에서 내 스스로 구체적인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 발언을 자처하고 나서는 일이 아주 드물지는 않았고 또 앞으로도 가끔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 때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보통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적 정치 과정에서 다른 모든 시민들과 똑같은 발언권밖에 없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했고 또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경우, 그러니까 그의 표현을 쓰자면 "구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심층적인 현안들"에 대해서나 또 다른 어떤 현안들에 대해서는, 정치철학자인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최소한 좀 더 낫게 말할 수도 있다고 여겨서 그렇게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 밖의 대부분의 현실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서라면 나는 침묵하거나 절제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아니 어떤 사회에서든지, 대부분의 정치 현안들은 철학적인 수준에서만 판단되거나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반값 등록금' 정책 같은 것이 철학적 수준에서 아무리 잘 정당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적으로 제대로 평가되고 '잘' 실현되려면 국가 재정 문제라든가 국민의 문제 인식 틀이라든가 정치권의 역관계 등과 같은 다른 많은 요소들이 고려되고 작용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정치적 현안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문제 해결은 철학적 인식 말고도 그것과는 본질적인 성격을 달리하는 다른 여러 차원의 숙고와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을 필요로 할 것이다. 정치철학이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답을 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전문성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가 언급한 퇴임 후 이명박의 사법 처리 문제를 보자. 이에 대해 나로서는 큰 방향에 동의하고 그 당위를 나름의 방식으로 철학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나 방법 그리고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는 설사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 다지 심각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더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박동천이 이와 같이 그 부당함이 너무도 명백해 보이는 '지적 월권' 행위를 주문했을 것이라고는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면 나는 그의 주문이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가 나의 시도와 비교하여 내가 아주 높이 평가한 아이리스 마리온 영이 나보다 더 나은 정치철학적 작업을 했다고 보는 데 대해 나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영의 정치철학적 작업이 내가 했던 것과는 그 본성상 다른 종류의 것이고 오히려 박동천이 주문하는 그런 과제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틀림없이 내가 지금보다 구체적인 정치 현안들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더 잘 판단할 수 있기 위해 더 많은 식견과 소양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정치철학을 더 잘할 수 있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이번의 내 책은 이런 점에서 많이 부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내 책에 대한 쓴 소리를 바로 이런 차원에서는 수용하고 싶기는 하다. 나아가 그런 일은 내 책에서 강조하기도 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더 잘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시간과 열정이 생길 때 마다 여전히 나는 그것들을 그가 제안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더 많이 쏟고 싶다. 무슨 오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 또는 (나로서는 이런 표현을 꼭 쓰고 싶지는 않지만) '이념'이,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할 일이, 그것도 아주 중요한 할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이념의 역할이 제한적이고 또 내가 그 점을 잘 자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거나 아무렇게나 수행되어도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3. 박동천은 우리 사회의 그 동안의 "이론적이거나 철학적인 담론들이 정치 현실의 (…) 개선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고 여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 책의 출발점을 이루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그 이유로 "정치의 개선을 위한 관건이 무슨 이념을 채택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념이든지 어떻게 해야 '잘' 적용하는지에 있는 것임을 간과했(음)"을 든다.

나아가 그는 그렇게 "무슨 이념이든지 '잘' 적용하는 것이 관건임을 직시하게 되면, 결국 이념 여하는 다 접어두고 현안을 '잘'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 사항이라는 깨달음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는 그에게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보기에 이런 추론은 너무 성급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정치적·철학적 담론이 보인 실천적 무능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금 첨예화해서 말한다면, 나는 그 원인이 단순히 어떤 철학적 담론이나 이념의 잘못되거나 덜 떨어진 적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반(反)실천적 출발점 그 자체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당연히 실천적 본성을 가진 철학적 담론이나 이념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내가 책에서 얼마간 주제에 대한 몰입도 같은 것을 희생하며 앞세운 '방법으로서의 한국'이라는 제목의 제1장은 바로 그 문제를 다루었다.

요점은 무슨 반(反)이론주의를 주창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논의 맥락에서라면, 한국에서는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제대로 된 정치적 철학 담론이나 이념이 없어서 문제이고 이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의 통상적인 진보 이념들을 보자. 나는 그 이념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그 서구 중심성이라고 본다. 문제는 어쩌면 단순하다. 그 동안 우리 사회가 발전시킨 근대성과 그 사회적·정치적 토양은 그 진보 이념들이 암묵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서구와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피식민화의 경험, 개발 독재와 그를 통한 자본주의적 고도성장, 지체된 민주화 등과 같은 역사적 궤적을 훑어만 보아도 그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 진보 진영의 정치적 지식인들 일반은 자신들의 진보 이념들을 우리 사회의 이와 같은 고유한 현실과 조건에 맞게 제대로 진화적으로 적응시켜 발전시킨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우리 사회 진보 진영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이른바 민족해방(NL) 계열은 그와 같은 통상적인 진보 이념들의 서구 중심성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좌파-민족주의적 대안을 추구하고 심지어 일부는 '우리 식'을 강조하는 '주체사상' 같은 것을 수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향의 (그 정치적 위험성은 따로 두더라도) 문화적-지적 민족주의는 매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데, 무엇보다도 서구에 대한 역설적인 포섭이 제대로 성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그런 접근은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실천적인 주체성을 문화적인 주체성으로 혼동해 버림으로써 서구에 대한 유치한 반작용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오히려 서구 중심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동천과의 토론에서 다루었던 우리가 흔히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지식인들 일반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나빴던 것이, 이들 대부분은 내가 보기에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에 대해 매우 불투명했다. 그들은 박동천처럼 '이념 여하는 다 접어두고 현안을 잘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임을 통찰해서 현안 해결에만 매달려서라기보다는 올바른 이념 문제를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나는 이런 경우 '자유주의 세력' 같은 일반 범주를 사용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 결과 그들 역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한 정치적 방향을 설정하는 데서 많은 혼란을 보였고 대중들의 굳건한 신뢰를 얻는데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물론 이런 사정은 박동천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식인들 일반이 "동양과 서양의 고전적/근대적 이념에 조예가 부족해서"는 아닐지 모른다. 나는 실제로 그런 측면도 크다고 보지만, 어쨌든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요컨대 우리 사회에서 진보 이념 일반은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 속에 제대로 착근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진보 이념 일반이 지닌 관념성과 추상성 그리고 그 실천적 합리성의 결여와 실천적 무능함은 당연한 결과다.

4. 나 역시 어떤 종류의 '이념 과잉'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아니, 혐오하기까지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흔히 관찰하는 바와 같은 식의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대선 국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많은 국민들의 그런 바람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나는 그것에 많은 부분에서 깊게 공감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구체적인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절제는 철학과 이념이 무매개적으로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일에 대한 경계의 표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책에서 주창했던 민주적 공화주의를 이런 맥락의 이념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민주적 공화주의도 하나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한 올바른 정치적 실천에 대해 구성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실천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내가 이 민주적 공화주의를 서구의 정치철학적 논의들에 얼마간 기대어 정초해 보려 하긴 했지만(내 책 제 1 장에서 설명한 대로, 나는 이것이 '불가결'하다고 본다), 그 시도의 참된 요점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근현대사 전체가 추구해 왔던 모종의 진보적 지향과 실천에 대한 지적·철학적 해명 또는 가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처럼 서구로부터 수입된 이념을 단순히 '적용'하려 했거나 또 처음부터 뚜렷한 체계적 지향을 정비한 야심찬 독자적 이념을 제안하려고 했던 시도의 결과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그 동안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참여하고 그것을 이끌어 왔던 많은 시민들에 의해 막연한 대로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던 어떤 정치적 진보의 이상, 그래서 우리가 '시민적 진보'의 이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이념을 담아내 보려 했던 시도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민주적 공화주의는 바로 그런 이상을 어떤 롤스의 '반성적 평형'과 같은 식의 나름의 이론적 가공 과정을 거쳐 다소간 명료화한다는 차원에서 다듬어 본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우리 사회는 자신에 대한 이론을 갖지 못한 사회다. 흔히 말하는 대로 지적, 학문적 식민성에 짓눌려 있는 사회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민성의 극복 없이는 우리 사회의 진보적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마주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인간다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 내는 데서의 실천적 무능함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식민성을 무슨 '동양적인 것'이나 '우리만의 것'을 찾자고 외치는 식으로는 극복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식민성의 문제가 단순히 어떤 문화적 나르시시즘 같은 것의 훼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 대한 답이 우리 근현대사의 민주적 전통과 사회적 실천의 문법을 제대로 성찰해 내는 데서만 마련될 수 있다고 여긴다. 제일 중요한 관건은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그 실천이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도전과 문제들 앞에서 얼마나 '창조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민주적 공화주의는 그러한 창조적 실천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제안된 것일 뿐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단순히 서구에서 이식된 것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가령 동학 혁명 등에서 표출된 전통 사회 인민들의 민주적 지향을 단순히 서구의 영향에 따른 것이라고만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심지어 유교적 조선의 '당쟁' 같은 것도 나름의 '공론 정치' 전통의 일환으로 재해석하는 일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멀리는 만민공동회 같은 데서부터 다양한 민주화 운동들을 거쳐 최근의 촛불 시위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현대사에는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 그 문범을 성찰해 보아야 할 무수히 많은 시민적·진보적 실천의 전통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마도 바로 이런 전통을 염두에 두며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을 자유주의든 공화주의든 또 어떤 것이든 서구로부터 수입된 정치철학적 틀을 통해 제대로 사유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의 시민적 진보의 전통은 그 모두를 참조하되 그 모두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되어야만 제대로 이론화되어 앞으로의 창조적인 민주적 실천을 위한 올바른 안내자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박동천이 내게 갑갑하다며 물은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 문제도 제대로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제기되고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시도가 충분히 성공적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 스스로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 부족을 메우는 것은 앞으로 나의 과제다. 그리고 그 평가는 사실 나의 일도 아니다. 확실히 그 궁극적 성패는 박동천의 지적처럼 이 이념이 현실의 과제들을 얼마나 잘 해결할 수 있는지 하는 실천적 차원에서 평가되기는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념의 역할은 우리의 실천을 안내하고 그것을 위한 탐구를 자극하고 조직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해 주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설명한 대로 그런 평가가 박동천이 역설한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념 여하는 다 접어두고"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자는 그런 방식은 이념의 과잉에 대한 하나의 역편향으로, 이념 또는 이론이 그 자체 실천일 수 있으며 그 역할 또한 나름의 것에 있음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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