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80년대를 회고하는 후일담 소설이나 개인의 내면을 투명한 언어로 고백하는 형태의 작품, 또는 대중 문화적 감수성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자아내는 소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박성원의 소설은 이데올로기적 주체나 근대적 자아, 자본주의적 도시 문명에 대한 냉소를 통해, 이것이 사실은 허구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인간의 소외를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박성원은 근대가 저물어가는 가을, 그것도 아주 늦은 가을의 심연을 홀로 걸어가는 순례자와 같다. 하지만 그의 여정이 탈주체와 탈이데올로기를 말하며 놀이와 유희를 주창하는 포스트모던을 향하고 있다고 재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그는 유원지의 불빛처럼 현란하게 인간을 유혹하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의 매니저 남자는 함께 공연을 다니는 성대결절의 가수와 함께 침대에 누워 이렇게 중얼거린다.
미래는 없다. 미래는 우리들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그저 서서히 다가와서 우리를 조여 오는 것일 뿐이다. 과거는 언제나 투명하고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하다. 새로운 출발은 없다. 미래가 너무 다가왔기 때문에. (116쪽)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면, 투명하게 바라보이는 과거를 희망으로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고. 근대의 가을에서 지향 없음과 불안을 느끼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보다는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눈에 보이는 고향으로 귀환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박성원에게 과거는 여가수가 앓고 있는 성대결절이라는 난치병과도 같다. 실낱같은 희망은 고문의 다른 이름이다. 투명한 시야를 통해 똑똑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허물어지는 과거의 모습이고, 걸어온 길의 흔적 위에 쌓이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리는 시간의 잔해들뿐이다.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고립감 속에서 매니저 남자는 째깍째깍 거리는 시간의 음률을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단조로운 소리로 듣는다. "흑과 백. 흑과 백,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 <하루>에 수록된 모든 단편에 미치거나 혹은 죽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공교로운 우연이나 인물의 고통을 통해 독자적 흥미를 끌어내려는 작가의 도착적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가깝다.
▲ <하루>(박성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소년이 학원을 마친 것은 오후 네 시가 막 지났을 때이다. 난독증을 앓고 있는 소년은 견인차 앞에서 네 시 이십팔 분에 걸음을 멈춘다. 소년은 견인차가 자동차를 견인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전봇대에 붙은 고지서를 떼어내 집으로 향한다. 네 시 이십구 분 은행을 빠져나온 여자는 주차장 골목 어귀에 세워둔 자동차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말까지 해고할 해고자 명단을 작성하고 거기에 포함된 친한 후배와 점심을 먹으며 이 사실을 통보한 남편이 아내의 전화를 받은 시간은 오후 네 시 삼십삼 분이다. 교통체증 때문에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이 되어서야 아내를 만난 남편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남편의 후배는 오후 여섯 시 삼십구 분 퇴근을 한다. 해고 통보를 받은 그는 난독증에 걸린 아들 생각에 번민하며 술집에 들려 맥주를 마신다.
오후 일곱 시 팔 분에 경찰로부터 아내의 자동차가 견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견인 차량 보관소에 전화를 해 차 안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병원으로 이송된 아기는 이미 숨져 있었다. 의사가 알려준 사망 시각은 오후 여섯 시 삼십구 분이다. 아기의 죽음을 알게 된 여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자정이 넘어서야 술집에서 나온 후배는 눈길을 헤치며 집으로 향하다 아파트 단지 근처의 벤치에 앉아 잠이 든다. 소년은 오전 일곱 시 사십팔 분 일어나고, 그 시각 소년의 아버지는 동사체로 발견된다. 여자는 만 하루가 지난 세 시 십구 분에 다시 눈을 뜬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간의 초침 소리를 따라 전개되는 '하루'의 불길한 서사는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의 간극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알려주며 끝이 난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여자와 소년은 버스의 옆면에 붙은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는 광고의 문구를 본다. 하지만 그것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일처럼 용이하지 않다.
시간은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휴지(休止)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여자의 아기가 있는 병원과 그(남편의 후배 : 인용자)가 있는 영안실은 팔 점 사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매년, 몇 십 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일식처럼, 하루하루는 잊혀갔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하루'의 마지막 문단이 알려주는 것처럼 시간은 현재를 스쳐지나가는 순간 어둠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박성원에게 있어 시간은, 아니 인간의 역사는, 일식(日蝕)이라는 수식어가 알려주는 것처럼 썩어 들어간 하루의 잔해가 쌓여 있는 거대한 도축장에 불과하다.
박성원이 창안한 이 우주적 파국의 시공간은 말할 수 없이 불길하고 쓸쓸하며 참혹하지만 그리 낯선 풍경만은 아니다. '역사 철학 테제'(1940년)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전쟁과 학살의 참혹한 진행 속에서 모든 희망을 버리고 자살한 발터 벤야민이 마지막으로 목도한 역사의 풍경과 박성원의 '여기'가 대단히 닮았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우주적 파국의 시공간에서 벤야민이 아득하게 바라본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가 진보의 폭풍에 날려 미래로 떠밀려가는 것처럼, 박성원의 천사도 죽음과 광기의 악무한적인 반복에 순간적으로 등장하며 사라진다.
어디선가 태풍이 불어왔으면 좋겠어. 태풍이 불면 온갖 쓰레기들이 세상을 뒤덮지. 사람들이 만들고 버린 쓰레기들. 소녀는 늘 망원경을 가지고 무언가를 찾았지. 그건 희망인지도 몰라. 희망도 볼 수 없긴 마찬가진데. 그래서 망원경으로 찾는 건지도 몰라. 비에 젖은 강아지들은 불쌍하다구. 태풍에 바들바들 떨던 소녀는 참으로 불쌍했지. (191쪽)
불길한 '하루'의 순간순간에 어떤 맥락도, 연관도 없이 등장하는 "망원경을 들고 있는 낯선 소녀"는 박성원의 천사이다. 소녀는 이젠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던 여가수에게 다가와 망원경을 건네주거나('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 절망과 고독에 사로잡혀 송전탑으로 올라가 투신하려는 '나'의 절규에 화답하며('분노와 복종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줘'),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나'에게 인간의 윤리적 본성에 대한 미약한 깨달음을 준다('저녁의 아침'). 하지만 박성원의 천사를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기계 장치 신(deus ex machina)'처럼, 서사를 특정한 결말로 이끄는 조악한 장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망원경을 든 천사는 전혀 서사에 개입하지 않고 사라질 뿐이고, 어디서도 소녀를 찾을 수 없다. 소녀가 전해주는 것은 희망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저 멀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과 같은 기대뿐이다.
이쯤에서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자. 인간의 하루하루가 빠르게 잔해로 변해 쉼 없이 쌓이고, 일식처럼 잊혀간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희망이 존재하지 않고, 있더라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먼 곳에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확신하고,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시간은 서술적 방식으로 진술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시간이 되며, 반면에 이야기는 시간 경험의 특징들을 그리는 한에 있어서 의미를 갖는다"(<시간과 이야기>(김한식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는 폴 리쾨르의 말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하루>의 마지막에 수록된 '흔적'은 시간과 소설의 관계에 대한 박성원의 아름다운 화답이며, 거대한 절망과 불안을 감지하면서도 소설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의 직무에 대한 책임감 있는 답변이다. "사람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세상은 가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 냉소적 지식인이다.
그런 '나'의 생각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제자 J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서 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J는 '나'에게 "자신이 쓴 소설과 아기"를 남기고 죽는다. J는 죽기 전 '나'에게 사라지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하고, '나'는 아이와 소설을 J가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나'가 '흔적'의 마지막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인간은 아이를 통해 삶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소설을 통해 사라져 간 소중한 이들을 기억한다. 그 흔적을 따라 잔해가 쌓인 무덤을 파헤쳐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위대한 유산이 아니라 J와 함께 매장된 오르골 같은 소박한 것이 전부일 것이다.
희망을 "흑과 백"의 단조로운 소리를 뒤덮는 교향곡의 웅장한 선율로 상상하는 것은 기대가 만든 미혹에 불과하다. 희망은 레퀴엠 속에서 조용하게 울리는 오르골 소리처럼 미약할지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소녀의 희미한 체취처럼 희미할지도, 아니 영원히 그 기미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음악을 듣고, 시간의 잔해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소설가에게 내려진 천형(天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박성원은 이 고통스런 책무를 운명처럼 받아들고, 거의 알아주는 사람 없이,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왔으며, 또 가고 있다. 그의 고립감이 남긴 흔적은 아름답지만 너무도 슬프다. 그리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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