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숙제로 독후감을 제출해야 하는 학생도 아닌 내가 '수난이대'를 검색한 이유는 따로 있다. 보는 이들에게 '어레스트(arrest, 심정지)'를 불러일으키는 '최인혁 교수님'이 등장하는 드라마 <골든타임>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의 다리를 절단하는 장면을 함께 시청하던 여자 친구가 난데없는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잠깐, 다리를 절단하는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고? 덕분에 드라마와 <최강전설 쿠로사와>라는 제목의 만화책을 번갈아 보던 나는 현대 문화와 인간성에 대한 피상적이지만 심각한 고찰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 친구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부지, 이래가 우째 살까 싶습니더."
그건 바로 <수난이대>에 나오는 대사였고, 비로소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물론 현대 문화와 인간성에 대한 피상적이지만 심각한 고찰에서 한국 현대 문학에 대한 얕은 지식으로 넘어간 후, 그녀의 연상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잡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을 그 시간 동안 나는 적지 않은 상념에 사로잡혀야만 했지만. 뭐,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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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난이대>(하근찬 지음, 아이세움 펴냄). ⓒ아이세움 |
만도는 아들을 기다린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이 돌아온다고 편지를 보낸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다. 이웃의 아무개는 전사 통지를 받고, 다른 아무개는 생사 여부를 확인할 길 없는데 아들 진수는 당당히 살아 돌아온다니 만도의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일제 강점기 오키나와에 징용으로 끌려가 한쪽 팔을 잃은 만도는 아들이 성히 돌아온다는 생각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산을 넘고 개천을 건넌 만도는 장에 들러 고등어 한 손을 산다. 아들에게 구워줄 고등어를. 남은 손에 달랑달랑 고등어를 든 만도는 기차역에 앉아 아들을 기다린다. 기차 도착 시간은 아직 멀었고, 만도는 하릴없이 옛 생각에 빠져든다. 십수 년 전, 바로 이 기차역에서 끌려간 오키나와의 살인적인 태양과 잠자리만큼 크던 모기와 형편없는 음식과 비행장을 닦던 노역을. 이어지던 공습과 공습을 피해 자신이 설치한 발파용 폭탄 옆으로 몸을 던지던 어느 날을. 어렴풋이 뜬 눈에 보이던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져서, 마치 이끼 낀 나무토막" 같았던 자신의 팔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그 팔을 바라보며 혼절했던 그날을.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고, 만도는 아들을 찾는다. 시꺼먼 열차 속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오지만 만도는 아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두 개의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절룩거리는 상이용사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는 만도.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만도를 부른다. 돌아보는 만도. 그곳에는 아까 보았던 그 상이군인이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낀 채 서서 만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바로 아들 진수였던 것이다. 만도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이는 것을 본다. 사라진 다리. 만도는 복받쳐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지만, 떨리는 입을 열어 고작 이렇게 내뱉을 뿐이다. "에라이, 이놈아! 이기 무슨 꼴이고 이기……."
만도는 화가 난다. 마치 그것이 진수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자, 라는 무뚝뚝한 한 마디와 함께 만도는 지팡이에 의지한 진수가 절름절름 따라오는 것도 아랑곳 않고 혼자 앞장서 걷는다. 주막집 앞에 도착해서야 만도는 돌아본다. 길가에 오줌을 누고 있는 진수. 지팡이를 던져놓고 나무 둥치를 붙잡은 채 오줌을 싸고 있는 진수의 모습이 을씨년스럽게만 느껴진다.
만도는 주모를 재촉해 빈속에 술 한 잔을 들이켜고, 다시 한 잔을 들이켜고, 다시 한 잔을 들이켠다. 그제야 도착한 진수에게,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아들에게 이리 들어와 보라고 소리를 지르는 만도. 아무데서나 묵으라고 이르고는 주모에게 국수를 시킨다. "꼬빼기로 잘 좀……. 참지름도 치소, 알았능교?"
말없이 국수를 먹는 진수. 주막을 나온 부자는 다시 길 위에 선다. 이번에는 진수를 앞세우는 만도. "지팡이를 짚고 찌긋둥찌긋둥 앞서 가는 아들의" 뒤를 술에 취한 만도가 달랑달랑 고등어를 흔들며 따라 걷는다. 그제야 다리에 대해 묻는 만도에게 진수는 그간의 사정을 들려준다.
멀쩡한 다리를 잃은 사연이건만, 진수의 말은 짧기만 하다. "전쟁하다가 이래 안 되었냐고. 수류탄 쪼가리에 맞았다고. 얼른 낫지 않고 막 썩어 들어가기 땜에 군의관이 짤라 버리더라고. 아부지를 부르는 진수. 와, 대답하는 만도에게 진수가 말한다. 이래 가지고 우째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우째 사냐고,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거라고,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아들을 타이르는 만도.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 대겠나" 말하며 아들을 향해 지긋이 웃어준다. 아들에게 보여준 첫 번째 웃음. 하지만 이내 요의를 느낀 만도는 손에 들고 있던 고등어를 입에 물고 바지춤을 내린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고등어를 받아드는 진수. 볼 일을 본 만도는 다시 아들에게서 고등어를 받아들고 길을 걷는다.
그때 그들의 앞에 펼쳐진 개천. 외나무다리가 놓인 시내를 건널 일이 캄캄한 진수에게 만도는 말한다. "업고 건느면 일이 다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 업히라고. 망설이는 진수에게 고등어를 건넨 만도는 진수를 업는다.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넌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들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그렇게 그들은 다리를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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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글을 쓰기 위해 <수난이대>를 다시 읽은 나는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고, 흐르지 않게 또 살짝 웃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이 나를 슬프게 했는지, 기어이 눈물 흘리게 했는지, 동시에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했는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줄거리가 넘쳐나는 고전을 요약하기 위해 다시 읽었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다. 아무려나. <수난이대>에 담긴 문학사적 의의 따위 알 리 없는 나는, 지난 여름 인천에서 보냈던 어느 하루를 떠올린다.
우리는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manic street preachers)'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내렸고, 그들의 무대까지는 아직 한 시간 반이 남았다. 다른 무대에서는 다른 팀의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와 친구는 자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우리가 들고 있던 맥주는 점점 더 묽어졌다. 우비사이로 흘러든 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나는 이빨을 맞부딪치며 저체온증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등장했다. "안녕"이라는 활기찬 인사와 함께 'motorcycle emptiness'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광분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지막 곡이 흐르고 있었다. '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라는 긴 제목을 가진 노래가.
스페인 내전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그 노래 속에서,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은 당신이 이것을 묵인한다면 다음은 당신 자식들의 차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아름답게, 그렇지만 비통하게.
그리고 바로 그것이 <수난이대>와 그 작가 하근찬이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 그는 시대의 비극 속에서 봉변을 당한 부자가 운명에 순응하며 서로를 보듬는 과정을, 그 애처로운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냈지만 시대의 비극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진수의 잘려나간 다리가 진수의 잘못이, 그렇다고 만도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 그렇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다. 진수의 잘려나간 다리가 결국 만도들의 잘못인 것처럼.
간단하게 말하자. 매닉 스트릿 프리쳐스의 예의 노래가 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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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김난도 지음, 오우아 펴냄). ⓒ오우아 |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우리들의 수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여전히 이래가 우째 살까 싶은 시간을 살고 있으니까. 똥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까. 만약 우리가 이것을 단지 인내하고 종내 묵인하며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재산을 불리려는 노력으로만 살아간다면, 그러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생각으로 참고 천 번(?)의 흔들림을 그저 어른이 되기 위한 노정이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면, 다음은 영락없이 우리 자식들의 차례가 될 것이다. 다음은, 다음은, 다음은,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은 말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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