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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선 이승만과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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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선 이승만과 김구

[해방일기] 1947년 9월 7일

1947년 9월 7일

1947년 초 반탁 운동을 재개할 때부터 김구-한독당-임정 세력은 '임정 추대'를 집요하게 추진했다. 상해-중경 임시정부가 건국 과정의 임시 정부 노릇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미소공위를 통해 새로 '과도 임시 정부'를 만들도록 한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으로 보면 '반탁'이란 '모스크바 결정 반대'의 핑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1947년 초 임정 추대 노력의 전개를 서중석은 이렇게 정리했다.

김구가 반탁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우익 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이승만 측과 계속 갈등, 대립한 이유는 중경 임시정부의 '현실화'에 그 목적이 있었다. 1947년의 반탁 운동은 한편으로는 좌우 합작 운동을 봉쇄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익 세력을 통합하여 중경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추대하려고 한 것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이승만과 김구, 한민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으나, 후자에 대해서는 이승만-한민당과 김구가 1945년 말과는 다르게 이해관계가 충돌하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1947년의 시점에 와서는 중경 임시정부의 외피가 그다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본래 의도하고 있었던 남한 단정 수립 운동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김구 측은 중경 임정 추대 운동을 완강히 밀고나갔다.

2월 17일에 소집된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대회에서는 중경 임정 추대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비상국민회의의 명칭을 '국민의회'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국민의회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역사적 입법 기관이며, 또 독립 운동의 피묻은 최고 기관으로, 38선 이남에만 위와 같은 권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전 영토를 포괄한 국회이며, 임시적 협의 기구가 아니라 상설적 대의 조직의 최고 조직임을 표방하였다. 따라서 국민의회는 민족 자결의 최고 전형으로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민족의 기본법인 헌법과 선거법을 자정(自定)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천명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29~530쪽)

1945년 말 반탁 운동이 처음 일어날 때는 한민당도 이승만도 김구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구는 귀국 직후 친일파 척결과 독립 건국의 순서가 아무래도 결과가 마찬가지라는, "A+B=B+A" 산수 법칙을 표방해서 한민당 친일 집단의 숨통을 터주었다. 그리고 이승만도 임정과의 관계를 통해 애국자 '인증'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해방 직전 임정의 마지막 항일 노력이 장준하, 김준엽 등을 포함한 특공대를 국내에 투입하려는 것이었고, 이 작전은 미군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지원 하에 진행되었다. 이승만은 OSS 부책임자 굿펠로와 밀착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 작전을 비롯해 임정의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김구는 귀국 전부터 이승만이 미국, 특히 군부에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귀국하던 당일에도 미군정이 김구 등의 귀국 사실을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아무 환영 행사도 없었는데, 죽첨장(경교장)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이 이승만이었다. 친일파 척결을 늦추는 방침을 비롯한 활동 방향이 이때 이승만의 설득으로 결정된 것이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김구의 귀국 후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에서 군정청 조선인 간부들과 경찰서장들을 포함한 한민당 세력의 전폭 지지가 임정 주도 반탁 운동을 고무했다. 그래서 '국자(國字)'를 발포하며 정부 행세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이 단 하루 만에 확인되었다. 미군정의 경계 대상이 된 김구는 그 후 1년 동안 조용히 지내야 했다.

1946년 2월 민주의원과 민전을 축으로 좌우 대립이 굳어질 때 임정 비주류 인사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임정의 실체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4월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의 한독당 합당으로 민족주의 진영의 본산으로서 위상이 확충되었다.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이 임정에 의지할 필요는 줄었지만 우익이 '민족 진영'을 표방하는 이상 김구-한독당의 권위는 유지되었다.

1947년 들어 김구 세력이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다시 손잡고 반탁 운동에 나선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미소공위 좌초와 중간파 봉쇄가 그들의 공동 목표였지만, 총선거를 통해 정권을 노리는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임정 추대를 꾀하는 김구 세력은 갈 길이 달랐다. 무엇보다, 통일 민족 국가 성립이 자기네에게 불리할 것으로 보고 이를 회피하려 드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의 속셈을 이 시점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을 수는 없다.

이승만과 하지 사이의 불화를 보며 반탁 세력을 모두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일까? 그 와중에 한독당이 깨어져 상당 범위의 민족주의자들이 김구 세력을 이탈했다.

8월이 지나는 동안 미소공위 실패가 분명해지자 김구의 임정 추대 노선과 한민당-이승만의 총선거 노선 사이의 충돌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8월 12일 이승만은 미국인 측근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김구는 마음속으로 나를 지지하고 싶어 하나 중국에 같이 있던 동지들과 귀국 전에 함께 협력해 나갈 것을 약속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떠나기가 그로서는 매우 어렵다고 느끼고 있소. 여기에 현재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요. 대표의회는 합동회의 최근 토의에서 자신이 어디에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으며 국민 감정도 즉시 선거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요. 여론에 의해 김구 자신도 대표의회에 억지로라도 합세하게 될 것을 나는 굳게 확신하고 있소.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로버트 올리버 지음, 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 135쪽)

이승만은 임정에 대한 김구의 집착을 억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9월 1일부터 5일간 열린 국민의회 임시 대회 진행을 보면 그의 자신감에 상당한 근거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임정 세력의 대표 기구인 국민의회는 개회 직후 아래와 같은 긴급 제의를 채택했다. 분단 건국의 위험이 있는 총선거 안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본 의회는 금차 미국에서 제의한 4대국 회의 개최안을 절대 지지할 뿐 아니라 동시에 38선을 존속시키고 조국을 영구 양분할 위험성이 있는 남조선 단독 정부의 노선으로 향하고 있는 입의의 보선법에 의하여 실행하려는 남조선 총선거는 중지함이 당연하다는 것을 주장하기로 결의함." (<조선일보> 1947년 9월 2일)

그러나 주석에는 이승만을 다시 선출했고, 임정 요인들이 주로 맡아 온 국무위원 자리에 김성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대회가 진행 중인 9월 3일 이승만이 메시지를 보내 왔다.

"민중 공의로 정부를 수립-이 박사 국민의회에 멧세지"

국민의회에서는 보선 실시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어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 3일 이승만 박사는 여좌한 내용의 멧세지를 동 의회에 보내어 입의에서 통과한 보선법에 의하여 총선거를 단행할 것을 종용하였다.

"국민의회에서 국권 회복을 촉성키 위하여 개회하신 이때에 내가 진참치 못함을 유감으로 여깁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김 주석과 나는 미소공위에 대처하기 위하여 민의대로 정부 수립을 최중 최급의 문제로 알고 민족대표대회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내외 정세가 순응되어 미군정과 협동으로 조일일(早一日) 성공될 수 있는 희망이 보이므로 우리 민족 전체의 통일 단결로써 총선거를 시행하여 국권 회복하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위 해방 이후로 3년간을 정부 없는 백성으로 지내느라고 안으로는 민생도탄이 말할 수 없는 터이오, 밖으로는 남북 분단을 철폐하기에 우리는 언론권도 없이 지내므로 미소공위에도 정당과 사회단체들로 전 민족을 대표하라는 문제로 쟁론이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우리 민족의 수모가 아니며 이 어찌 우리 민족이 통분할 바 아니리오.

금에 총선거 준비가 거의 완성된 중이니 귀회 여러분의 열렬한 애국성충으로 모든 동포와 합작하여 우리 정부를 우리 민의로 수립하여 국제상에 우리 대표가 발언권을 가지고 38선 철폐를 연합국과 합동하여 역도해야만 될 것입니다.

상해 임정으로 말할지라도 전 민족이 다 봉대하는 바요 김 주석과 나로서는 특히 책임이 중대한 만큼 한성 계통으로 유지하여 온 것이니 의문이 없었으나 오직 국제 관계로 인하여 이것만을 고집치 말고 아직 잠복하였다고 정부를 수립하여 계통을 전임키로 할 것이며 다라서 임정이 입국하기 전에 결의한 바가 있어 국민에게 공결대로 준행하기로 한 것이니 이것이 시세에 적합할 뿐 아니라 또한 원칙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해외에서 근 30년을 두고 분투노력하여 지켜왔으니 지금에 이 정부 외에 다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라 할진대 이는 법리적 해석이 아닙니다. 원래 내지에서 피를 흘리고 그 임정을 수립한 민중에게 주권이 있는 것이니 민중이 무슨 방법으로든지 조처할 권리가 있는즉 해외에서 계통을 지켜온 우리로는 민중의 공의를 따라 정부를 세워서 계통을 전하는 것이 적법이요 순리입니다.

남북이 통일해서 총선거를 하기 전에는 남선에서만 총선거를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는 언론이 있으나 이는 사세를 떠나서 건국대업의 전도를 막는 공담일 뿐입니다. 우리 현상으로 38선 이남은 고사하고 다만 한 도나 한 군으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그 정부 명의로 국제상에 참가하여 언론권을 가져야 우리가 우방들의 협력을 얻어 남북통일을 촉성할 기회가 있을 것인데 이것을 아니하고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남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통일시켜 주기를 바라고 앉았다면 어불성설입니다.

미국인과 합작하는 것은 독립의 정신이 아니고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우리가 그 정신만은 절대 찬성하는 바이나 사세에 들어서는 참고할 점이 없지 아니합니다. 당초에 우리 힘으로 왜적을 타도하고 정권을 회복하였으면 타국의 간섭이 없을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하므로 미국이 우리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경우에서 절대 맹목적으로 단독행동을 고집하면 사세에도 어렵고 우방의 동정도 잃을 것이니 고립무원으로 야심을 가진 타국에 대립하기에 더욱 고위(孤危)할 것입니다."


끝줄에서 말한 "야심을 가진 타국"이 어느 나라를 가리킨 것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겠다. 미국은 무조건 좋은 나라이고 소련은 나쁜 나라라고 그는 주장한다. 왜적을 타도해준 것이 미국이니까 미국의 간섭은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해외에 있던 임정은 정부 자격이 없으니 민중의 '공의(公議)'를 따라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의 분단 건국론이 확고한 틀을 잡은 것이 이 글에 보인다. 국토의 절반이 아니라 조그만 한 부분을 갖고라도 주권을 일단 세워놓고 통일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국가를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다. 왜 불가능한가? 소련의 야욕 때문이다. 소련을 악마로 만듦으로써 무슨 짓이라도 할 핑계를 삼는 그의 반공주의가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총선거 조기 실시에 반대하는 국민의회나 김구와는 더 이상 길을 함께 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승만은 분명히 했다. 국민의회에서는 지난 3월에 이승만을 주석으로 선출했고 이번 임시대회에서 그를 다시 뽑았는데, 그는 취임을 거부하는 성명을 9월 16일에 발표했다.

"지난 3월에 조직되었다는 정부에 내가 주석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니 나의 고충을 여러분이 양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남한만으로라도 총선거를 행하여 국회를 세워 이 국권 회복의 토대가 생겨서 남북통일을 역도(力圖)할 수 있을 유일한 방식으로 믿는 터이므로 누구나 이 주의와 위반되시는 이가 있다면 나는 합동만을 위하여 이 주의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김 주석은 이에 대하여 이의가 별로 없을 줄을 내가 믿는 터이나 임정을 지켜 오던 몇몇 동지와 갈리기를 차마 못하는 관계로 심리상 고통을 받으시는 중이니 일반 동포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요,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문로를 열자는 것이며 만일 이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지마는 아무 다른 방식이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니 전 민족이 다 합심해서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총선거에 대하여 나는 개인적 무슨 욕망을 두지 않는 터이요, 또한 나는 자초로 평민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므로 정부 밖에서 정부를 옹호하는 책임을 자담하는 것이 나의 원하는 바이니 일반 동포는 나의 고충을 양해하기 바란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17일)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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