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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어린이 성폭행, 100년 전 기자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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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어린이 성폭행, 100년 전 기자였다면…

[프레시안 books]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개인 사정 때문에 여행은커녕 휴가도 꿈조차 꾸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이었다. 내심 여행에 시큰둥하고 심지어 낯선 곳에 가서도 싸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머무르는 걸 좋아하는 나한테 맞춤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여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얘기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러니 이 글에서도 역시 '여행' 얘기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제목이나 소재만 놓고 보자면 이 책은 아주 고약한 독자를 만난 셈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내가 보기에는, '여행'에 대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꼼꼼한 취재?

2003년 그러니까 기자 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에 <뉴욕타임스>의 기자 제이슨 블레어가 구설에 오른 적이 있었다. 블레어는 이라크에서 사망한 병사와 그 가족의 얘기를 다룬 머리기사로 많은 독자에게 '추악한 전쟁'의 실상을 폭로했다. 하지만 그 기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가 해당 기사를 쓰면서 현장 취재를 안 했던 것이다.

블레어는 이미 이전부터 여러 차례 직접 취재 현장에 가는 대신 자신의 아파트에서 인터넷 혹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빈 구석은 상상력으로 채워 넣으면서 '멋진' 기사를 써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폭로가 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정신병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바야르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의 한 사례로 이 블레어의 사연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의 (기자) 동료들을 강박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문제, 그가 실제로 갔느냐 가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실은 작가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다른 한 문제,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다른 문제 하나를 완전히 덮어버리고 있다. 즉, 그의 방문기가 신문 독자에게 이라크 파병 병사 가족들의 고통을 어느 정도로 이해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사실 파병 병사 가족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병사의 가족이 살고 있는 장소에 실제로 갔느냐 가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와 혼동될 수 없다. 이는 (…) 현장으로의 이동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장으로의 이동이 당사자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31쪽)


블레어가 기자로서의 직업윤리를 어겼고, 더 나아가 너무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 '언어'와 '세계'를 일치시키려는 기사의 목적을 배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묻는다. 과연 블레어가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포기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시작되었다.

대담한 해석!

▲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여름언덕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나 좋은 기사의 제일 조건은 '꼼꼼한 취재'다. 10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귀가 닳고 닳도록 들은 단어가 '팩트(사실)'다. 성공하는 기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아니 유일한) 조건이 더 많은 팩트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기자들은 '단독 특종'을 꿈꾸며 팩트를 갈구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런 팩트 맹신을 강하게 회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실 보도' 같은 저널리즘의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꼼꼼한 취재를 통해서 팩트를 취하는 일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은 저널리즘이 갖춰야 할 진짜 중요한 조건은 '대담한 해석'이 아닐까? 이유는 이렇다.

사실 세상에 팩트가 아닌 것은 없다. 기자에게 필요한 것은 팩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팩트가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또 이 팩트를 보도했을 때의 효과가 무엇인지 가늠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부재한 한국 기자에게 흔한 일이 바로 취재원이 던져주는 팩트를 받아쓰거나 혹은 사주 또는 데스크가 시키는 대로 쓰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 지금 한국 저널리즘의 문제는 취재 능력의 결여라기보다는 해석 능력의 결핍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연차깨나 되는 기자들은 한국 사회를 자신들이 쥐락펴락한다고 착각한다. 한데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정말 전체의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다. 그렇게 취합한 작은 조각들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그 기사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가 되기 십상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 바로 대담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정작 사건의 본질은 사라진다. 표피적 현상이 아니라 심층의 진실을 좇는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해석이다. 널려 있는 여러 팩트를 놓고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상관관계 혹은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일 그것이 곧 해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취재를 통해서 글을 쓰고 그것을 널리 공유할 수 있는 달라진 매체 환경('시민 기자', '1인 매체' 등)을 염두에 두면, 기자의 조건으로 대담한 해석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더욱더 시급하다. '기자의 전문성'이라는 게 실제로 있다면, 그 내용의 대부분은 취재 능력이 아니라 해석 능력일 테니까.

비판적 성찰!

다시 바야르의 책으로 돌아가자. 이 책 전체를 꿰뚫는 열쇳말은 '총체적 진실' 혹은 '장소의 영혼'이다. 즉, 누군가가 어떤 장소를 직접 여행하지 않고서도 (책, 그림, 영화 혹은 음악으로) 그곳에 대한 총체적 진실 혹은 장소의 영혼을 포착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과감한 결론이다.

이런 바야르의 시각은 당혹스럽다. 어쭙잖은 교양을 토대로 말하자면, 총체적 진실 혹은 장소의 영혼이라는 말에는 플라톤의 '이데아', 칸트의 '물자체', 헤겔의 '대자' 혹은 마르크스의 '계급의식', 루카치의 '총체성' 같은 철학 개념이 겹친다. 사실 바야르는 2011년 4월의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당신은 지난 2011년 4월 25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있었던 강연('개입주의 비평을 소개하며')에서 이런 개입 비평의 궁극적인 목적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진리와 정의라는 이상을 좇아 문학 세계를 개선하려는 것." 당신이 생각하는 현실에서 구현되어야 할 진리와 정의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내가 쓴 책 중에 <망친 작품을 개선하는 법>이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나는 일단 모든 존재하는 것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 진리와 정의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현실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스탈린과 같은 인물의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20세기 초의 러시아와 세계를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고 했던 이상 자체에는 공감한다. 방금 내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화자가 모두 다 강박적이라고 했었는데, 보통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강박적이기 마련이다."
(☞관련 기사 :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썼다고?")

그러니까 바야르는 당대의 철학이나 문학의 주된 흐름과는 다르게 여전히 총체적 진실, 완성된 상태, 장소의 영혼 혹은 영혼의 정수 따위가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게 있는가? 물론 나 역시 앞에서 저널리즘의 목표로 '세상의 진실'을 꼽았다. 하지만 특정한 시공간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영원한 진실을 포착하는 게 가능할까?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서로 다른 관점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에 따라서 상당히 그럴 듯한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그 해석의 기준 역시 시공간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불편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금이야 아동 성폭행은 '물리적 거세'가 공공연히 얘기될 정도로 천인공노할 범죄로 인식된다. 하지만 100년 전 혹은 200년 전에는 어땠을까?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르쥬 비가렐로의 <강간의 역사>(이상해 옮김, 당대 펴냄)는 아동 성폭행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일깨운다.

놀랍게도 아동 성폭행이 범죄로 처벌되기 시작한 시점은 100년 전(19세기 말~20세기 초)부터다. 그 이전에는 11세 소녀의 "음부와 항문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폭행을 한 당사자를 처벌하려 하자 50명가량의 이웃이 법원에 탄원을 했을 정도다. "나무랄 데 없는 집안의 자식으로 어쩌다 실수를" 한 그를 용서하자고!

그나마 20세기 들어서 아동 성폭행을 처벌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 이유는 "처녀성의 상실" "도덕적 타락"을 "부추기기" 때문이었다. 성폭행을 피해자의 정체성에 균열을 가져오는,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상처보다도 큰 상흔을 남기는 이른바 '정신적 살해'로 보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고작 20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지금 '죽일 놈' 취급을 하면서 아동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고 아무개'를 조지는 기자들이 100년 전 아니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똑같은 사건을 놓고서 전혀 다른 기사를 쓰고 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대중의 상식에 영합하는 대중 매체의 속성까지 염두에 두면 이런 의심은 더욱더 짙어진다.

여기서 대담한 해석에 더해 '비판적 성찰'을 기자의 또 다른 조건으로 덧붙이자. 단 한 건의 기사, 한 권의 책으로 '세상의 진실'을 폭로했다는 망상을 버리고 '또 다른 진실'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기자. 대중이 열광하는 '상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미처 성찰하지 못한 다른 측면은 없는지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기자 말이다.

여기까지 말하니 곳곳에서 "너나 잘하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단 한 번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장소의 영혼을 포착할 수 있다는데, 10년이나 기사를 써서 밥벌이를 한 처지에 '나만의 기자상' 정도는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듯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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