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7일 '프레시안 books' 103호에 실린 박동천 전북대학교 교수의 <정치의 이동>(상상너머 펴냄) 서평을 놓고 책의 저자인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가 104호(8월 24일자)에 반론을 실었다. 이 반론을 놓고서 박동천 교수가 다시 답변을 보내 왔다. (☞관련 기사 : 박동천 : 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장은주 : '자유주의'가 한국을 구원할 수 있을까?) |
장은주의 책, <정치의 이동>(상상너머 펴냄)을 나는 굉장히 의욕적이라고 평했다. 장은주는 내 말에서, 또는 나도 모를 어떤 곳에서, "과욕"에 대한 비아냥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내 나름 칭찬이랍시고 한 말이 그렇게 수용된다는 것은 사교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민망한 광경이다. 그래서 이 답변은 가급적 수식어를 줄이고, 최대한 단조롭고 딱딱한 엄밀성을 추구하는 문체로 작성하고 싶다.
그렇지만 상대의 말투를 되돌려주는 듯한 말투는 종종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될 텐데, 이것은 감정적인 도발을 위한 비꼬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각자가 사용하고 있는 말투에 대해 함께 자성해 보자는 선의의 권면이다. 서구에서 기원한 용어들을 가지고 우리 얘기를 해야만 하는 처지를 깊게 자각한다는 점에서 내가 장은주를 "우리"로 한데 묶을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나는 장은주에게 자신의 문법을 되새겨보라는 충고를 감히 해도 될 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의무 비슷한 것을 지금까지는 느낀다. 그의 책에 대한 서평 역시 전반적으로 그가 말하는 (즉, 생각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었다. 그가 책 1장에서 갈구한 우리 나름의 방법에 관해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나름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바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 장은주는 국가와 시민 사회에 관해 자기가 "짤막하게 주석으로" 짚고 지나가려 한 것, 자기 책에서 전혀 "본령에 속하지 않는" 사항을 내가 왜 "쓸데없이 장황"하게 논의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 본인이 자기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항을 독자인 내가 중요하다고 우긴다는 게 참 이상하게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민주적 공화주의를 주창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관한 입장 설정이 하나의 선결 문제에 해당한다.
국가를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은 (내 생각에) 국가 권력과 사회적 공론 사이의 관계가 무엇이냐는 질문과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따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공론"이 무엇인지를 파고들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철학과 정치가 무슨 관계인지를 따져야 하며, 그러려면 다시 이치, 이성, 지식, 진실 등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것들이 삶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이 모든 얘기를 그 책에서 다 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민주적 공화주의를 주창하려고 하는 정치철학자의 저술에서 이런 주제들에 관해 고찰한 결과가 녹아들어있기를 기대하는 심사는 전혀 무리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더라도, 장은주의 기획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입장 설정은 하나의 선결 문제에 해당한다. 이 점을 나는 "장은주가 강조하듯이 시장주의와는 다르게 포착되는 '정의'에 입각해서 국가의 임무를 이해하려는 관심은 (…) 헌정주의적 관심이 아니라면 무엇과 연결되는지 대단히 궁금하다", 그리고 "인권을 강조하기로 했다면, 당연히 헌정주의의 원리를 사회 체제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기둥으로 설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두 번이나 밝혔다.
장은주는 이번의 답변에서 자신이 "신념에 찬 헌정주의자"이고, "이 책에서는 제대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국가에서 독립된 자율적 시민 사회의 역할도 (…) 역설하는 편"이라고 밝힌다. 적어도 이 대목을 보면, 헌정주의와 인권과 시민 사회의 역할이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나의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이해와 장은주의 이해가 근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내게 전혀 놀랍지 않다.
문제는 장은주가 이런 입장을 실제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구 근대 사회라고 하는 배경의 특별한 성격을 지적하고자" 할 때에는 전혀 다른 영혼에 귀를 기울인다는 데 있다. 그는 이번에는 칸트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언급하면서, 칸트까지의 맥락에서 국가와 시민 사회의 분리를 이야기하면 엄청난 혼란이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이를 전도시켰다고 말하는데, 이와 관련해서 세 가지 깊은 의문이 일어난다.
① 나는 솔직히 장은주가 칸트와 헤겔과 마르크스를 들먹이며 말한 문장 자체의 뜻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내 이해력이 부족해서 모르는 건지 글쓴이의 문장이 모호해서 모르는 건지조차도 모르겠으니, 사실 대단히 갑갑한 모름 증세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를 따지고 들어가면, 또다시 본령도 아닌데서 쓸데없이 장황하게 따진다고 꾸중을 들을지 모르니 파고 들어가지는 않고 개인적인 취향의 차이만을 기록에 남긴다. (문체가 비꼬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순전히 한국어에서 이런 말투가 자주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더 이상 진지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다는 점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② 헌정주의 및 시민 사회의 역할에 대한 장은주의 믿음은 서구에서 국가와 시민 사회의 관계가 혼란스럽고 전도되었다는 장은주의 지적과 어떻게 접합되는 것일까?
③ 위 ②의 질문이 과연 장은주의 책에서 본령에 속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대충 넘어가도 괜찮은 것이었을까?
이 질문들은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처음의 평에서 이 주제를 제법 길게 쓴 것이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장황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해명하기 위함일 뿐이다.
2. 롤스와 관련해서 장은주는 나의 "명백한 오독"을 나무란다. 롤스를 "메리토크라시라는 틀 안에서 다루지 않았"고, "정반대로 롤스의 정의론을 메리토크라시적 정의 이해를 극복해 보려는 정치철학적 시도라는 관점에서 다루었고 또 바로 그 지점에서 그것이 성공적일 것 같지 않다는 데 초점을 두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롤스의 정의론이 기여·능력·원칙에 따른 메리토크라시적 분배를 거부한다"(159쪽)는 등의 대목만 보면 맞다. 하지만, "기회 균등이라는 메리토크라시 이념의 한 축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 실질적 메리토크라시라 부른 것의 어떤 근본주의적 버전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161쪽)고 말한 대목까지 보면 이상해진다. 여기서 장은주는 롤스를 피상적인 메리토크라시는 극복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메리토크라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스스로 실질적 메리토크라시라고 부른 것을 메리토크라시를 극복한 형태 또는 "좋은" 메리토크라시라고 정의하지 않는 한 그렇다.
"논의 맥락과 초점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것 같다"는 말에 다시 한 번 확인해 봤지만, 장은주는 책 103~123쪽의 논의에서, 자유주의 우파는 물론이고 밀, 그린, 홉하우스, 케인스, 듀이, 롤스, 드워킨 등 사회적 자유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심지어 마르크스까지도, 각각 어떤 의미에서 메리토크라시라는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분배 패러다임과 메리토크라시를 거의-논리적이 아니면 경험적으로-서로 겹치는 관점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적 자유주의와 수렴하는 지점이야말로 "메리토크라시 이념과 원칙의 제대로 된 작동을 위한 실질적인 평등주의적 전제들을 마련하기 위한 것"(119쪽)이라는 정당화에 있다고 고발까지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장은주가 내게 씌운 "명백한 오독"이라는 혐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3. 장은주는 내가 자기더러 "자유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박동천이 자유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정치 이념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보는 장은주의 추측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이러한 그의 추측은 오도된 피전홀링(pigeon-holing)의 결과이다. 내가 자유주의와 관련해서 (처음 서평의 3절에서) 그를 비판한 주안점이 바로 특정한 얘기를 시작해야 할 대목에서까지 일반 범주에만 의존하고 있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명료하게 부각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3.1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주의적 가치 중에 일부를 그 자체의 본령에 따라 변론하면 족한 대목에서, 자꾸만 자기가 자유주의를 전폭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붙이려는 태도를 꼬집고 싶은 것이다."
자유주의를 전폭적으로 승인하지는 않는다는 단서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말에서 자유주의를 전폭적으로 승인하라는 요구를 장은주가 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럴 필요는 없다.
요지를 짧게 표현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한다.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거리낌없이 쓴다. 그러나 "내가 김일성 체제를 전폭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는 전혀 붙이지 않는다. 나는 노무현의 정책 중에 대부분을 잘했거나, 아니면 추진 방식이 서툴러서 실패로 끝났지만 방향은 옳았다고 본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를 전폭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는 붙이지 않는다. 나는 과거나 지금이나 노무현에 대해 비판할 것이 적지 않다고 보며, 기회가 있으면 비판한다. 하지만 그를 비판하기 위해 "내가 노무현을 모두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붙이지는 않는다.
이런 단서를 붙이는 말투가 개인적으로 편안하고 익숙하다면 개인적으로 말릴 생각은 없다. 단, 한국의 현실에 도움이 되는 지적 담론의 한국스러운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내 판단을 말한다면, 저런 단서가 필요 없다고 간주되는 언어 풍토가 훨씬 낫다고 확신한다.
3.2 나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유주의를 더욱 깊고 세심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벌린, 스키너, 밀 등을 번역했고, 지금은 인권에 관한 필즈(A. Belden Fields)의 책을 번역하고 있으며, 이후에는 오크쇼트도 번역할 계획이다. 이들은 모두 자유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각자의 색깔은 크게 다르다.
내가 이런 사람들을 번역해서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고 해서, 또는 내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대립적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열심히 주장한다고 해서, 내가 자유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정치 이념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전형적인 피전홀링이다. 자기가 비둘기 집 몇 개를 평면적으로 설정해두고, 각각에 무슨 "-주의" 따위 문패를 달아놓고서, 그 중 하나에 나를 끼워 맞춘 셈이 되는 것이다. 나의 이 말이 다시 오독인 것처럼 보인다면, 장은주가 추측컨대, 박동천의 맘속에 가장 바람직한 정치 이념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하는 그 자유주의가 도대체 어떤 자유주의인지 속마음을 조금만 열어서 보여주면,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나와 장은주 사이의 소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담론적으로 너무나 복잡하게 가지를 뻗었고, 수사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너무나 많이 변용되었기 때문에 이미 "하나의" 정치 이념을 가리키는 단어일 수가 없다. 장은주 본인이 "자유주의자"라는 피전홀링을 열심히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충분히 '리버럴'"하다고 (여기 리버럴에 따옴표를 왜 찍었는지, 즉 단순한 강조인지 아니면 아이러니의 여지를 남긴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단 넘어간다) 말하는 데서도 이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정치 이념이 이미 아닌 것은 사회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등도 마찬가지고, 정의, 평등, 자유, 업적, 필요, 소원, 존엄, 등도 마찬가지이며, 이 단어들과 이 근처에 있는 단어들을 용접해서 만들어낸 "민주적 공화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사회 민주주의", "공정 사회", "정의로운 공동체" 등등의 단어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나는 몇 개의 음절이나 몇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 중에서, 그것을 구호라 부르든 강령이라 부르든 이념이라 부르든, 가장 바람직한 것을 찾아내는 식의 기획은 정치 사회를 개선하려는 목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3.3. 나는 서평에서 "공판 중심주의를 법제화한 것은 인권의 증진을 위해 중요한 진일보에 해당하지만, 재벌 특히 삼성의 독점적이고 초법적인 행태에 대해 정치 권력이 정당하게 강제했어야 할 제약을 게을리 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말투와, "자유주의 세력이 자유주의적 가치를 일면 확립했지만, 신자유주의에 빠져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탈피하지 못했다"는 식의 말투를 대조하면서, 후자의 말투를 비판했다.
이 대조를 장은주가 별로 예리하게 포착하지 못한 듯하여, 말로 설명해 본다. 후자의 문장에서 "자유주의 세력", "자유주의적 가치", "신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등은 ⓐ 뜻이 특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 서로 다른 (때로는 상충하는) 관점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네 문구를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으니까, 그 중 두 개만 거론한다.
노무현 정부와 그 지지자들을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일컫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통용되는 문법이다. 그러나 과연 문재인, 김두관, 유시민, 천정배, 정동영, 박영선, 이동걸, 이정우, 김병준, 조기숙, 한명숙, 송민순, 김종훈, 김현종, 기타 수많은 인사들을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묶어서 말하기만 하면, 이들이 하나의 세력이 되는가?
더구나 이들 가운데 과연 누가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내세울지 나는 대단히 궁금하다. 이들을 대충 묶어 부르는 맥락에서는 "자유주의"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겠지만, 노무현 정권의 공과를 따지고 들어가는 맥락에서는 가급적 "자유주의"라는 말을 빼고 말해야 쟁점의 초점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실책이 신자유주의라는 다섯 글자로 정리가 될까? 애당초 무엇이 실책이었는지부터 정리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재 한국 진보적 지식인 공동체의 엄연한 현황이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특정한 세부 사항들을 거론해야 하고, 그러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하려면 누구든 자신의 밑천을 공론장의 도마 위에 드러내야 하는 데, 이는 누구에게나 실존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다. 반면에 "신자유주의"라는 낙인은 자신의 밑천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아주 편리한 공격 무기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장은주는 책의 제1장에서 "방법으로서의 한국"을 촉구하고 있다. 나는 그의 촉구에 대한 반응으로서, "지식인들이 주제의 세부 사항을 꼬치꼬치 파고들어가지 않고, 일반 범주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공론장의 역할이 국가 권력에게 압도당할 위험이 높아진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장은주가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세부 사항을 말해야 할 때에 일반 범주로 얼버무리는 셈이 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4. 장은주는 내 속마음을 이렇게 읽었다.
"실제로는 자유주의자인 장은주가 그 점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면서 사실은 별로 알맹이도 없는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것을 내세우며 가당치 않게도 철학으로 정치를 구원하려 들었다."
장은주를 나는 특별히 자유주의자로 규정하지도 않거니와, 애당초 나는 누구든지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렇게 지칭되는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해를 자아낼 위험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곳에서 "자유주의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제창하는 사람"(<철학과 현실> 2012 봄호, 104쪽) 중의 하나로 장은주를 거명했는데, 이 역시 "장은주는 자유주의자"라는 규정과는 거리가 멀다. 어쨌든, 이 얘기는 일단 여기서 접고,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뒤 두 개의 요소에 대답해 본다.
4.1. 장은주가 민주적 공화주의를 제창할 때, 나는 일곱 음절 구호는 볼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현안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불만을 직접 토로하지는 않았고, 아이리스 영의 기획에 비해 정치적인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이것을 장은주는 알맹이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을 했는데, 얼핏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이 두 가지 표현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나의 적극적인 방법론적 주장에 해당한다.
세상에서 지식인들이 하는 말을 알맹이가 있는 것과 알맹이가 없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흑백 구분, 이항 대립, 이분법 등에 대한 경계심은 과거에 비해 많이 늘어났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흑백 이분법이 여전히 자주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여기서 다시 목격한다. 나는 알맹이가 있다/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보다는 어떤 알맹이가 누구에 비해 더 있다 또는 덜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방법으로서의 한국"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보며,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장은주가 제창하는 "민주적 공화주의"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불만을 직접 토로해 본다. 이는 내가 위에서 구호나 강령이나 이념이 정치 사회의 개선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 일반적인 명제의 연장선 위에 있다. 어떤 -주의이든지, 제창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언표의 형태로 제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개선에 도움이 되려면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되어야 한다. 이때 적용은 당연히 "본래의 정신에 부합하게", "상황의 진상에 입각해서", 그리고 "잘, 제대로, 올바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슨 주의이든지, 무슨 원칙이나 이념이든지, 그것이 "본래의 정신에 부합하게", "상황의 진상에 입각해서", "잘, 제대로, 올바르게" 적용될지 말지는 그 주의나 원칙이나 이념 안에 속하는 요소가 아니라 그 바깥에 위치하는 항목이다.
이 논점을 이제 장은주가 촉구하는 "방법으로서의 한국"에 접목시켜 본다. 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한말에서부터 지금까지 글과 말로 적어온 이론적이거나 철학적인 담론들이 정치현실의 (내가 바라는 만큼의) 개선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동양과 서양의 고전적/근대적 이념에 조예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치의 개선을 위한 관건이 무슨 이념을 채택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념이든지 어떻게 해야 "잘" 적용하는지에 있는 것임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무슨 이념이든지 "잘" 적용하는 것이 관건임을 직시하게 되면, 결국 이념 여하는 다 접어두고 현안을 "잘"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사항이라는 깨달음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굳이 예를 통해 부연하자면, 종합부동산세 기준을 6억 원으로 잡느냐 9억 원으로 잡느냐 사이에서 결정하는 것이 하나의 현안이라고 치자. 이때 6억 원을 주장하면 사회주의가 되고 9억 원을 주장하면 자유주의가 되는 것처럼 번역한 다음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가지고 싸우면 그야말로 쓸데없는 논쟁이 끝없이 벌어진다. 오히려 사회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일반 범주를 가리키는 단어들"을 삭제하고, 각 대안을 채택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를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도 안에서 예측해 본 다음에, 어떤 결과를 받아들일지 사회적으로 결단하는 방향으로 가야 공동체 내부의 소통에도 도움이 되고 미래의 정책 판단에도 바탕이 되는 경험이 축적된다.
4.2 "철학이 정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내 명제를 장은주가 "처절하게 잃어버린 철학의 학문적 왕좌를 정치 같이 어지러운 영역에서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꿈에 대한 반명제로 읽은 데에는 내 책임이 큰 것으로 보인다. 철학이니 정치니 구원이니 하는 단어들을 다소 뜬금없이 외삽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차적인 책임이 내게 있더라도, 어쨌든 내 뜻이 장은주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 또한 분명하다. 나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도적 관심은 정치라고 하는 괴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방향이 아니라, 그 외양에 관해 관찰자적 입장에서 비평을 주고받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말했다. 이 말은 위 3절에서 그리고 다시 4.1절에서 밝혔듯이, 특정한 현안을 부각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는 방향 대신에, 이런 저런 주의나 원칙 수준의 논의에서 머문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핵발전소 문제, 4대강 사업 문제, 퇴임 후 이명박에게 얼마나 엄격한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야 할 것이냐는 문제, 당장 12월의 선거에서 향후 5년을 망치지 않을 후보를 어떻게 찾아낼 것이냐는 문제, 사법 개혁은 어떻게 할 것이며, 선거 제도는 어떻게 고칠 것이며,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자산과 소득은 어떻게 분배할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의 권력은 어떻게 끌어올릴 것이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독도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그리고 클렙토크라시의 문제, 기타 등등,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정치 사회가 앞으로 "잘" 해결해야 할 현안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 민주적 공화주의에 따르면 어떤 지침이 나올까?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원칙 아래 이런 현안에 대한 지침이 안 나와서 문제라기보다는 너무 많이 나올 테니까 문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말해, 현안에 대해 지식인들이 현안 자체의 본령에 집중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대신에, 자꾸만 외부로부터 어떤 근거나 원칙을 끌어대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외부에서" 끌어오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세부 쟁점을 파고들다가 최종적으로 결단해야 하는 대목을 찾아내서 각기 결단하는 방향이 아니라, 정당화를 위해 불필요하고 모호한 근거와 원칙을 덧붙임으로써 원래 복잡했던 현안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논리철학논고>, §7)는 말은 표면적으로 볼 때 동어 반복, 즉 하나마나한 형식 명제에 불과하다. 여기서 동어 반복 이상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바로 위에서 한 말, "이 명제들을 초월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될 것"(<논리철학논고>, §6.54)이라는 말이 7번 명제에도 적용되는지 여부, 그리고 6.54번 명제 자체에도 적용되는지 여부에서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내가 위에 열거한 즉각적인 현안들 말고도 한국 사회에는 구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심층적인 현안들이 많이 있다. 그런 현안들에 관해 지식인들이 담론을 전개할 때, 장은주의 "민주적 공화주의"가 약간의 (또는 상당한) 화두를 던져주는 의미는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현안에 관해 지식인들이 (예컨대 장은주가 메리토크라시와 분배 패러다임을 비판했듯이) 무슨 말을 주고받더라도, 그 말들이 정치에 대해 얼마나 공헌할지를 가늠하는 지표는 즉각적인 현안에 대해 어떻게, 단기적이 아니면 장기적으로라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즉각적인 현안에 관해서든, 구조적인 현안에 관해서든, 단기적 대안이든 장기적 대안이든, 할 수 없는 말이야 어차피 못할 테고, 할 수 있는 말은 무척 많다.
마지막으로, 지난번의 서평과 지금 이 답변에서 내가 적은 말들은 정치를 직접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정치에 관해 장은주가 말하는 방법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이 두 번의 글에서 일차적으로 철학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지금 한 말들은 일차적으로 철학에 속하지만, 일정한 매개를 거친다면, 구조적이거나 즉각적인 정치적 현안에 대해 일정한 함축을 가진다고 자부한다. 철학과 정치는 이런 식으로 (그리고 이 밖에 무수한 다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프레시안 books' 편집자와 독자에게 미안하게도 또 무척 길어졌다. 줄여보려고 세 번을 다시 읽었지만, 더 이상 줄일 수는 없었다. 길고 꼼꼼한 글을 참고 읽으며 함께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아져야 한국의 정치와 철학에 보탬이 되리라는 나의 믿음이 변명으로 통할지는 모르겠다. 이런 말들을 길게 적기 위해 시간과 공력을 들인 이유는 물론, "어떤 식으로든 올바름과 정의로움에 대한 추구 없는 정치는 쉬이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야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장은주의 입장에 액면가에서 동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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