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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연의 시대가 온다!

[프레시안 books] 금정연의 <서서비행>

어쩌면 이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이 글을 준비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출판사에서 금정연의 연락처를 물었을 때, '프레시안 books'에 서평을 쓰는 금정연이 서평 모음을 내면 '프레시안 books'는 책이 엉망이 아닌 한 서평을 실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전임 알라딘 인문 MD와 현재 알라딘 인문 MD라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딱 맞아 떨어지는 서평자를 놓칠 '프레시안 books'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쳐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책이 나오니 속보 경쟁을 지양하고 심층 서평을 지향하는 '프레시안 books'의 청탁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고, 주요 신간 도서에 덧붙이는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 소개 글을 떠올려보는 정도였다. 그 즈음 이 책과 함께 소개 글을 올린 책의 저자가 지그문트 바우만, 도올 김용옥, 정민이었으니, 이 정도 상상만으로도 전관예우의 자세로는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아뿔싸, 금정연의 '그럼에도 한 번은'이란 기대와 박태근의 '그래도 한 번쯤'이란 착각은 보기 좋게 틀어졌다. (그러니까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에 선정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건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하다. 편집장의 선택 소개 글은 원고지 2, 3매면 충분하니 대강의 맥락과 구성을 소개하는 정도면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글을 썼다면 "아, 그 책에 대해서는 이미 할 말을 다 한 걸요" 하며 청탁을 비껴갈 수도 있었을 터, 역시 이건 불행이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다.

▲ <서서비행>(금정연 지음, 마티 펴냄). ⓒ마티
<서서비행(書書飛行)>, 금정연은 프롤로그에서 비행(非行), 비행(卑行), 비행(飛行)의 의미를 차례로 설명하며 제목을 해설했지만, 재치에 탄복하거나 의미에 감탄할 정도는 아니다. 서평집(이 책이 서평집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의 제목으로 쓸 법한 무난한 제목이라 하겠다.

오히려 눈길을 잡아끄는 건 '생계 독서가 금정연 매문기'라는 부제다. 여기에서 매문기(賣文記)란 "우선 나는 매문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서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304쪽)라는 시인 김수영의 말을 따와, "말하자면 나는 그나마 '고급'이란 말을 좋아하는 속물이고, 속물에게는 숫자가 필요하고, 숫자를 맞추려면 원고를 써야 한다, 는 자기 확인"(304, 305쪽)의 표현이다. 이쯤에서 금정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텐데, 출판사의 소개를 옮겨본다.

지은이 금정연은 MD '출신'이다. 그는 독자가 아니라 '소개자'로서 '책'이 아니라 '상품'을 분석해 온라인 서점에 적절하게 코디하고 진열해왔다. (…) 그랬던 그가 돌연 회사를 그만두었다. 책을 '보면서'가 아니라 '읽으면서' 살아가겠다는 꽤나 치밀한(?) 계획과 함께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책을 읽다가, 팔다가, 결국에는 쓰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책을 읽다가(읽고) 글을 쓰는 일은 비교적 흔하지만, 책을 팔다가(팔고) 글을 쓰는 일은 흔치 않다(대개는 책을 팔기 위해 글을 쓴다, 어쩌면 이건 저자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려면 책을 읽어야 할 텐데, 책을 파는 일은 읽기보다 보기에 특화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읽기와 팔기가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일은 일식이나 월식처럼 가끔 일어나는 데다 의지보다는 섭리에 가까운 일이니, 과연 금정연은 '생계 독서가'와 '매문기'를 잇는 중심으로 따로 언급할 만하다.

스스로 고백하듯 책을 파는 일에서 비롯한 난서증(難書症) 때문에, 마치 감자탕의 골수를 빼먹지 못하고 국물과 고기 몇 점만을 건성으로 먹는 기분, 그러니까 전체로서의 책을 즐길 수 없게 된 독서가가 잃어버린 시력을 찾아 헤매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물론 투병 기간(MD 근무 기간)이 3년 반이고 회복 기간(MD 퇴직 후 현재까지 기간)이 2년 반이니 아직 후유증이 남아 있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게다가 매문으로 벌어들인 원고료는 치료비(대개 알코올 섭취)에 턱없이 모자라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이제 생계 독서가를 생각해봐야 할 때다. 아직까지 어떤 21세기 유망 직종이나 청소년 희망 직종 순위는커녕 후보에도 올라보지 못했을 '생계 독서가'란 직업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500원을 넣으면 노래 한 곡을 부를 수 있었듯 동전을 받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거나, 책을 읽기만 해도 쪽당 얼마씩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일은 물론 아닐 게다(만약 그랬다면 금정연은 이 책을 쓰지 않았을 테고, 나도 이 글을 쓸 일이 없었을 거라는 데에 "내 오른손과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 이건 영화가 아닌 <서서비행>에서의 재인용이다). 결국 생계 독서가는 매문을 해야만 존재가 성립한다.

이 책에 추천사를 쓴 로쟈 이현우는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가 서평자인가? 간혹 서평으로 생계를 뛰어넘을 자도 등장할 법하다"고 말했다. 이 표현을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가 작가인가? 간혹 글로 생계를 뛰어넘을 자도 등장할 법하다"로 살짝 바꿔보자. 한국에서 인세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는 열 명 남짓, 수입의 범위를 넓혀 각종 원고료를 포함해도 100명에 이르지 못할 게다. 정리하면,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자도 수십 명에 불과한데 그들이 쓴 책을 읽고 서평을 써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일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에도 금정연은 왜 생계 독서가를 말하는가. 그가 생각하는 생계 독서가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다행히 에필로그 '삼류 서평자의 고백'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나는 직업적인 서평자의 고뇌며 비루함을 토로하려 한다"고 말을 뗀 에필로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려 했으나, 이야기는 의외로(?) 생계와 무관하다. 그의 고뇌와 비루함은 글을 실을 매체가 없다거나 원고료가 적어서가 아니다. 좋은 서평을 찾기 힘든 현실에 대한 직업 서평가로서의 반응이다.

그가 생각하는 서평의 효용과 좋은 서평의 조건을 차례로 살펴보자. 그가 말하는 인터넷 시대 서평의 진정한 효용은 두 가지인데, 우선 나와 도서 취향이 닮은 이웃 블로거의 지나간 책에 대한 서평, 내가 미처 알지 못했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책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다. 전자가 관계에서 비롯한 책의 발견이고, 후자가 책에서 비롯한 관계의 탄생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볼 때 서평은 매체 의존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매체일 수 있겠다.

또한 그가 좋아하는 서평가는 정직한 사람이다. "좋아하는 책에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책에 불평하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쓸데없이 공정한 체하지 않는" 태도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그는 이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자. 아직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마음을 졸이게 한 대답은 조금 시시하다.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당연히 "그럼 좋은 '글'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한 발 늦었다. 그는 언젠가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용하며 "엔진이 고장 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화물을 내던지고, 좌석을 내던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엾은 스튜어드를 내던지듯이", 자신의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도록, 책들이 내 속에 남아 나를 무겁게 짓누르지 않도록, 글이라는 형태로 밖으로 던져야 했는데, 이게 모여 한 권이 책이 되었다고. 이제 당신이 이 책을 던질 차례라고 말한다.

자, 정리를 해보자. 금정연은 말장난을 좋아한다, 그리고 잘한다. 아마도 어쭙잖은 '비행 말장난'을 떡밥으로 던져주고는, 생계 독서가라는 생소한 표현으로 호기심을 끌려고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배운 생존과 삶의 차이를 여전히 머릿속에 간직한 독자라면, 이 어색한 조어를 이룬 낱말들의 관계에 의심을 품을 만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목격담'을 넘어 '추격담'을 준비했는데, 그 생계란 것이 정녕 '서서비행'의 추락을 막으려는, 그야말로 생존의 몸부림이었단 말인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앞서 매문기를 이해할 때와 마찬가지로 김수영과 금정연을 동시에 소환해보자.

귀가 교훈

1) 독서와 생활을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 전자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뚫고 나가는 것이다.
2) 확대경을 쓰고 생활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김수영 전집 2: 산문>, 490쪽, <서서비행> 41쪽에서 재인용)

김수영에 따르면 나는, 그리고 이 글은 생활과 독서를 혼동하고 있다. 아니, 생활이 제거된 자리를 독서가 억지로 채우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나는 책 속에 모든 게 있고, 책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반복할 생각이 없다. 나는 단지 우리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선 생활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우리를 죄어오는 불안을 피하기 위해 그 많은 책과 책에 대한 강박과 이런 쓸모없는 글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41쪽)


어쩌면 모든 문제는 생계와 생활의 착종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뚫고나가지 못한 생활 때문에 독서와 생활 사이 어딘가에 생계가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글은 차곡차곡 쌓여 서평집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앞서 이 책이 서평집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젊은 독서가 금정연은 실상 독서가라는 명함을 쥐고 서평의 자리를 빌려 자신의 에세이를 다듬어 나가는 젊은 문학가"라는 출판사의 소개 글도 이유가 되겠지만, 읽고 나면 도대체 이게 서평집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으레 서평집이 가지는 태도, 그러니까 책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분석하고 비평하고 의미를 알려주는 식의 설명이 아니라 삶이 앞서고 책이 따라오는 형국이니, 서평집을 통해 어려운 책에 대한 간결한 정보도 얻고 어디 가서 한두 마디 할 정도의 평가쪼가리도 덤으로 가져가려는 읽기가 애초에 차단당하고 만다. 앞서 말한 관계에서 비롯한 책의 발견, 책에서 비롯한 관계의 탄생이 벌어지는 실험의 장이라고나 할까.

논리적 설득은 그 책에 대해 알게 할 수는 있지만, 읽게 하기는 어렵다. 금정연 서평은 그 대척점에 있다. 그 책을 읽고 싶게 그리고 금정연이란 서평자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게 만들지만, 실상 그 책이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진담이다.) 로쟈는 추천사에서 금정연을 다음 세대 서평가로 꼽았다. 어쩌면 이런 글쓰기는 다음 세대 서평가의 덕목일 수도 있겠고, 그런 연유로 로쟈가 '다음 세대'라 칭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로쟈의 예언대로 '금정연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 강탈자, 활자 유랑자, 생계 독서가 따위의 호칭 없이 그저 '금정연 서평집'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

정연 씨,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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