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소재가 되었다. 마당에 있던 대추나무, 단풍나무가 그랬다. 잠자리, 나비, 개미도 특별한 의미로 바뀌었다. 심지어 빗자루로도 맛깔난 이야기를 지으셨다. 권선징악의 단순한 구도였다. 대부분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단다'로 끝났다. '뻔함'을 알면서도 결말을 듣기 전까지 가슴 졸였다.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땐, 울었던 이유 따위는 감쪽같이 잊곤 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얘기'에 대한 관심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주로 한을 품은 귀신에 관한 무서운 내용이었다. 학교 미술실이나 과학실, 화장실이 주 무대가 되었다. 가끔 '유관순 비밀'이라든지, '공동묘지였던 학교 전설'도 떠돌았다. '분신사바' 주문을 외기도 했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래'라고 운만 떼어도 비명을 지르거나, 귀를 막았다.
이야기를 만든 아이나 듣던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혼자 화장실 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갈 때면 오들오들 떨면서 친구를 원망했다. 그 시절 여고생들이 그러했듯이 얘기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면, 시험이라든지 입시, 진로에 대한 스트레스도 별스럽지 않게 견딜 수 있었다. '한을 품고 이승을 떠도는 영혼이 있는 마당에, 공부가 뭐 그리 대수냐'라는 게 '고만고만한'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늘 그랬다. 이야기 뒤에 숨어 현실을 멀리했다.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순간엔 더욱 그러했다. 골치 아픈 문제나,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위안이자 탈출구였다. 보호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여태 습관으로 남았다. 최근 생각지도 못한 곤경에 처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과 결정은 뒤로 미룬 채 자동으로 숨을 곳을 찾았다. 하여, 얼마간 박완서 작가에게 기대기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뒤에 숨기로 했다.
"가장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는, 굴하지 않는 솔직함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간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 있는"과 같이 작가를 칭송하는 무수한 수식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문학에 문외한이니 작품 세계에 대한 많은 논문도 매력으로 와 닿았을 리 없다. 그저, 소박하고 따뜻함이 묻어있는 이야기라 좋았다.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으나, 억지스럽지 않고, 지나치게 경건하지 않다고 느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친근했다. 할아버지께 듣던 옛날이야기처럼 정겨우며, 친구와 꾸며낸 얘기처럼 달콤했다. 단숨에 읽히지만, 여운은 오래 남았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특히 "내 마음속에서 평화가 깨지는 소리였고, 순응하던 삶에서 투쟁하는 삶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두려움이었다"(46쪽)와 같은 섬세한 내면 묘사에 마음이 끌렸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31쪽)라는 구절은 나만의 경험일 거라 여겼던 '설명할 수 없는 비애'와 '이해할 수 없는 울음'을 납득 할 수 있게 했다. 확신할 수 없는 은밀한 감정이라는 게, 누구나 있는 거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뿐 아니라, 표현력이 부족하여 설명할 수 없었던 내 안의 모호한 생각과 감정은 섬세한 작가의 언어를 통해 더욱 명료해졌다. 시원함 그 이상의 위안이었다.
"내가 생겨나고, 영향 받은 피붙이들에 대한 애틋함도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라고 했듯 조부모, 어머니와 오빠, 숙모 등 주변 인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네들을 추켜세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되레 "우리 집안은 겨우 까막눈이나 면한 시골 선비 집안이었다. 부끄럽지만 할아버지도 양반 타령만 유별났지 민족적 자부심이나 역사의식이 있는 분은 못 되었다. 할아버지의 양반 노릇은 오직 우리보다 낮은 양반을 무시하는 것이었고"(40쪽)라며 가감 없이 정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
"근지만 따지던 참으로 억척스러운 어머니"에 대해서도 "엄마의 생각은 뒤죽박죽이었다. 등화관제로 전깃불을 끄고 깜깜한 방에 죽치고 앉았을 때는 폭격을 맞아 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 놈들 폭삭 망하는 꼴이나 좀 봤으면 좋겠다고 폭언을 해서 누가 들을까 봐 겁나게 하다가도, 아들이 일본인한테 잘 보이고 중하게 쓰인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수가 없었다"(160쪽)라며 "시대적인 암흑에 어떤 빛이나 용기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게 결국 우리 엄마의 한계였다"(161쪽)고 시인한다.
고해 성사에 가까운 고백이다. 하나, 이중적이고, 뒤죽박죽인 인물도 쉽게 판단할 수 없고, 함부로 미워할 수 없음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터다. 작가의 말처럼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96쪽)이 아니던가. 같은 이유로 소설 속 인물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은 없다. 주인공을 부각하기 위한 작위적인 엑스트라가 적어도 이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모두의 행동은 이해되고, 마음은 공감될 뿐이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 인간애가 바탕이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사소함도 놓치지 않은 철저함, 진솔함 그리고, 치열한 자기반성과 성찰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마지막 장에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을 말하며,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고 했다. 익히 알고 있듯이 가슴 아픈 개인사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견딘 이가 아닌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판단력은 인고의 삶을 살다간 작가의 삶과 더불어 자체로 교훈이고 배움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사소한 일에 겁내며 숨기에 급급한 내게 인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누구의 탓도 하지 말고, 억울하다고 어리광부리지 말고, 그저 직면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자신을 바로 보기처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없다"라고 한 작가의 말이 가슴에 울림을 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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