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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승부수, 총선거

[해방일기] 1947년 8월 24일

1947년 8월 24일

8월 20일 미소공위 회담에서 미국 측은 마셜 미 국무장관이 몰로토프 소 외상에게 8월 12일자 서한에서 제안한 보고서 공동 작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소련 측은 몰로토프 외상으로부터 보고서 제출에 관한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며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소련 측은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미소공위 사업을 저해할 지경이라며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1947년 8월 20일 제54차 본회의 석상에서 소련 측 수석 대표는 소위 남조선에 있어서 좌익 지도자와 단체를 탄압함에 對하여 맹렬한 항의를 표시하였다. 소 측 수석 대표는 그이들의 다수가 모스크바 결의와 공동위원회의 업무를 지지하며 협의에 신청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무수한 체포 등은 모스크바 결의와 마샬 몰로토프 협정의 완수를 방해하는 사태를 지었다고 언명하고 그 사태는 공동위원회의 사업을 저해한다고 비난하였다. 소련 위원은 남조선의 민주 정당 및 사회단체가 존재할 수 있고 또한 활동할 수 있는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는 즉시 조치를 미 측 위원이 취하라고 주장하였다. 미 측 위원은 문서를 번역하여 회답을 준비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하와 같이 대답하였다.

"소련 측 발표에 대하여 미국 측 수석위원의 의견은 소련 측 위원은 남조선 정부 운영을 간섭 기도함이라 본다. 공동위원회의 업무는 조선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조선을 통치할 정부수립에 관한 안을 작성하는 것이다. 조선통치에 대하여 현재 책임을 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이 성명에 관하여서는 미 측 위원은 후일 그 대답을 제시한다." (<경향신문> 1947년 8월 24일)


스티코프 수석대표는 8월 22일 이 성명서를 기자들에게 공표했다. 엊그제(8월 22일) 일기에 옮겨놓은 이 성명서에는 최근의 좌익 탄압 사례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가히 융단 폭격 수준이다. 8월 중순의 며칠 동안에 민전, 전농, 전평, 여맹, 남로당 등 좌익단체의 사무실이 경찰에게 점거당하고 간부들이 체포-수배되었다. 수십 명이 검거된 8월 4일의 방송국 사건 같은 것은 여기 들어 있지 않은데, 소련 대표단이 '의심의 여지없는' 좌익 탄압 사례만을 성명서에 담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대표단은 회답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정식 응답을 미루면서 '내정 간섭'이라는 일차 의견을 내놓았다. 브라운 수석대표는 회담 정돈 상태의 책임을 소련 측에 지우는 장문의 성명서를 8월 23일에 발표했는데, 그 끝에서 좌익 탄압에 대한 소련 측 항의를 언급하면서 같은 입장을 되풀이했다.

1947년 8월 20일 제54차 본회의 석상에 소 측 수석 대표는 소위 남조선에 있어서의 좌익 지도자와 단체를 탄압함에 대하여 맹렬한 항의를 표시하였다. 소 측 수석 대표는 그이들의 다수가 막부 결의와 공동위원회의 업무를 지지하며 협의에 신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한 체포의 예를 들고 이 체포 등은 막부 결의와 마샬 몰로토프 협정의 완수를 방해하는 사태를 지었다고 언명하고 그 사태는 공동위원회의 사업을 저해한다고 비난하였다.

소련 위원은 '남조선의 민주 정당 및 사회단체가 존재할 수 있고 또한 활동할 수 있는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는 즉시 조처를 美측 위원이 취하라고 주장하였다.

미 측 위원은 이 문서를 번역하여 회답을 준비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하와 같이 대답하였다. 소련 측 발표에 대하여 미국 측 수석위원의 의견은 소련 측 위원은 남조선정부 운영을 간섭 기도함이라 본다. 공동위원회의 업무는 조선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조선을 통치할 정부수립에 관한 안(案)을 작성하는 것이다. 조선통치에 대하여 현재 책임을 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이 성명에 관하여서는 미 측 위원은 후일 그 회답을 지시할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08월 24일)


"조선 통치에 대하여 현재 책임을 지는 사람"이 따로 있다 한 것은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미소공위는 미국과 소련 간의 회담이 아니라 북조선 점령 소련군과 남조선 점령 미군 사이의 회담이었다. 미국 대표단원 중에 국무성 직원이 있다 하더라도 회담장에서 그는 국무장관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하지 사령관을 대표하는 입장이었다. 자기네가 대표하는 사람 얘기를 하면서 "따로 있다"고 하는 것, 미국 대표단의 무책임한 태도의 한 모퉁이일 뿐이다.

수석 위원의 개인 의견처럼 '내정 간섭'을 들먹이는 것도 문제가 있다. 브라운은 7월 말 평양에서 조만식을 만나지 않았는가? 조만식 탄압 소문이 서울에서는 1946년 초 이래 떠돌아 왔고, 미국 대표단은 공위 사업의 원만한 진행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 조만식 면담을 요구했다. 소련 측은 이에 응했고, 조만식이 억압 상태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북의 우익 탄압을 자기네는 문제 삼으면서 이남의 좌익 탄압은 어째서 간섭해서 안 될 내정이란 말인가. 그래서 공식 의견이 아닌 개인 의견이라고 내놓았을 것이다.

소련 대표단의 항의를 반박하는 하지 사령관의 발언이 8월 24일자 <동아일보>에 "공위 방해로 검거-피검자 행동은 북방 지시와 합치"란 제목의 기사에 실렸는데, 그 일부로 [주 서울 AP 특파원 로버트 제공]의 바이라인 아래 인용 내용이 눈길을 끈다.

"과반 방송국 사건을 위시한 대대적 혁명 도발 기세가 보이므로 남조선 국립 경찰로 하여금 잠시 분란을 방지하려는 목적에 사건 관계 주모자들을 체포케 하였다."

이게 예비 검속이 아니면 뭐가 예비 검속이란 말인가? 조선인들은 일제 시대에 당하던 예비 검속에 뚜렷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경찰은 실제로 예비 검속을 하면서 겉으로는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인들의 그런 반감을 알지 못하는 미국 기자는 들은 그대로를 전한 것이다.

하지는 정식 반박 성명을 8월 25일에 내놓았다.

본관은 8월 22일에 미소공위 소 측 수석대표가 남조선 관리 및 미군당국은 공위사무를 방해하는 제 상태를 양출하고 있다고 비난한 선전적 성명에 대하여 경악하는 바이다. 본관은 재조선 미군 당국이 공위의 진척을 촉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는 것을 단언하는 바이다.

최근 남조선에 있어 경찰에 의한 검거 사건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금반 검거는 미군 점령 지역 내의 정부 및 법과 질서의 파괴를 기도한 선동적 행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북조선 지도자 및 평양에 있는 신문 및 방송국에 의하여 종용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러한 행동의 주모자들을 공위 소 측 위원은 어찌하여 특히 이때에 공위사무 진행에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이를 이해키 곤란한 바이다. 공동위원회는 개회 후 7주일간 정돈 상태에 함입하였다. 전 조선을 위한 임시 정부를 구성하는 데 조선인과의 광범위하고 전반적인 협의 문제를 토의하는 권리를 소 측 위원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공위의 성공을 방해하는 제 조건은 소 측의 입장에 의하여 양출된 것이다.

8월 22일부 소 측 대표의 성명은 남조선 당국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결함을 은닉하려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된다. 소 측의 대표단은 남조선에 있는 동안 남조선 당국의 손님이며 남조선 당국의 활동은 해 당국의 완전한 권한 하에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법과 질서를 유지함에도 필요한 것이다. (<서울신문> 1947년 8월 26일)


반박의 핵심은 둘째 문단에 있다. "미군 점령 지역 내의 정부 및 법과 질서의 파괴를 기도한 선동적 행동"을 막기 위한 경찰 활동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행동으로 봐야 할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 성명서에서 제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검거에 대한 발표에서 혐의만 밝힐 뿐, 상식적으로 납득이 갈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북의 지령에 따른 행동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증거가 무엇일지는 "평양에 있는 신문 및 방송국"이란 대목에서 짐작이 간다. 이북의 신문과 방송에서 이남 미군정을 비난한 내용을 갖고 이남 좌익의 파괴활동 지령이라고 뒤집어씌운 모양이다.

셋째 문단에서 문제 제기의 시점에 시비를 거는 데서 하지의 마음속 생각이 읽힌다. 소련 측의 잘못으로 인해 회담이 정돈 상태에 이미 빠져버렸는데, 좌익 검거가 새삼 무슨 문제가 되냐는 것이다.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면 협의 대상으로 참가할 주체로서 좌익을 보호할 필요가 있겠지만, 지금은 정돈 상태니까 무슨 상관이냔 것이다. 미소공위는 이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하지는 이미 끝장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하지 개인의 판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 측 관계자들이 이미 미소공위의 다음 수순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브라운 수석대표 역시 미소공위가 이미 끝장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그의 8월 23일 성명에서 알아볼 수 있다. 긴 성명 중 반탁투위 소속 단체의 협의 대상 자격과 관련된 미국 측 주장은 이미 소상하게 소개한 것이고, 새로 주목을 끄는 것은 미국 측이 회담 진행을 위해 세 가지 제안을 했다가 두 가지는 거부당하고 한 가지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정돈 상태의 책임을 소련 측에 미루려는 주장인데, 어떤 내용인지 살펴본다.

과거 2주간 미 측 위원은 협의 대상에 관한 현재의 의견대립을 해소하는 데 따라서 공위의 다른 업무를 급속히 진전시키는 집중적 노력의 일부분으로 2차에 긍하여 특별히 제안을 제출하였다. 그 제안의 둘은 소련 측 위원이 거부하였으며 제3제안에 대하여서는 현재까지 하등의 회답이 없다.

1947년 7월 29일 제48회 본회의에서 이하와 같은 제안을 하였다.

'소련 측 위원은 북조선 소재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를 진행하며 미 측 위원은 남조선에 소재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를 진행할 것.'

1947년 8월 1일 제50회 본회의에서 미 측 위원은 이하의 안을 제출하였다.

'소련 측이 협의하려고 원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하여서는 38도 이남 이북에 긍하여 공동으로 협의를 시행할 것. 소련이 의아하다고 주장하는 38도 이남에 소재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하여서는 미 측이 단독 협의할 것. 미 측이 시행하는 그러한 협의는 공동위원회의 협의로 간주할 것.'

이 두 제안을 소 측은 거부하였다.

1947년 8월12일 제53회 본회의에서 제출한 제3안으로 현재까지 그 회답을 접수치 못한 것은 여좌하다.

1. 구두협의는 약(略)하고 조선 정당 및 사회단체가 제출한 자문서 답신을 모스크바 협정에 의한 협의로 수납할 것.
2. 제2분과위원회에 명령하여 임시헌장 및 조선임시민주정부 정강을 완성하여 공동위원회에 제출케 할 것. 이 헌장은 어떠한 관직은 임명하고 어떠한 관직은 선거할 것을 명시할 것.
3. 4개국에 건의할 헌장은 국제입법기관 및 헌장에 명시한 정부요원을 선거하는 요청을 포함시킬 것. 해 선거는 국제감시 하에 자유선거운동 비밀 다수정당 투표로 할 것. 제2분과위원회에 지시하여 건의할 헌장에 첨부하여 4개국에 제출할 남북조선에서 시행할 선거에 관한 상세안을 준비케 할 것.
4. 제3분과위원회에 지시하여 현재 남북조선 정부의 통합안과 겸하여 조선임시민주정부에 임명할 직원 선거안을 준비케 할 것.

미 측 대표는 이 제안에 약술한 것과 같은 자유로운 총선거를 통하여 조선인이 소 측 위원이 취한 입장으로 인하여 광범위한 구두협의를 통하여 획득치 못한 의사를 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 측 대표는 국제적 감시 하에 명백하고 자유가 보장된 총선거는 협의보다 더 광범한 의사표시가 허용되리라고 믿는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24일)


7월 29일과 8월 1일의 제안은 소련의 즉각 거부를 예상하면서 그냥 내놓아본 제안 같다. 한 쪽에서 협의한 내용을 공동위원회가 협의한 것으로 간주하다니, '협의'의 뜻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은 8월 12일의 제안으로 보인다.

원래 미소공위를 통한 건국방안은 조선 정당-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조선인의 민의를 파악하여 연합국(미-소)이 임시정부를 만들어주고, 이 임시정부가 총선거 준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제안은 바로 총선거로 가자는 것이었다.

총선거. 이것이 미국의 마지막 제안이었다. 러치 군정장관이 앞장서서 선거법 제정을 서두른 것도 총선거 국면을 대비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 측은 총선거로 바로 가는 길을 유력한 대안으로 오래 전부터 세워놓았던 것이다. 결국 미소공위를 떠나 조선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서도 총선거가 미국의 명분이 되었고, 이 총선거가 '가능 지역의 선거'로 낙착되면서 분단건국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총선거 방침이 분단건국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총선거로 가더라도 유엔 아닌 미소공위가 그 준비를 맡았다면 남북 총선거도 가능했고 국제감시도 더 충실하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소련이 총선거 제안을 거부했기 때문에 반쪽 선거가 되었고 국제 감시도 허술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련의 거부가 분단 건국의 더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앞으로 면밀하게 살펴야 할 문제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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