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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그만! 명동의 주인공은 언니들!

[프레시안 books] 김미선의 <명동 아가씨>

그저 매끈한 갑부로 얘기되던 '강남'은 2012년 여름, 누구의 근육이나 사상보다 울퉁불퉁해졌다. 배달원들의 엘리베이터 사용 금지를 내걸어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은마 아파트가 '강남(에 있는) 아파트'이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이 더 고약한 인심"이란 프레임으로 단순화되었던 것처럼, 원래 비(非) 강남에게 강남은 질시의 망치로 평평해진 대상이었다.

그런데 싸이라는 걸출한 퍼포먼서가 '77년생' 강남 친구들이 향유한 있는 집 날라리 문화를 추억의 영역으로 소환하면서, 강남은 보다 풍부한 맥락과 다양한 표정을 지니게 됐다. 삭막한 아파트 단지에서 그저 학원에 매몰되어 사는 줄 알았던 그 무매력의 부자들에게, 21세기 장사의 필수품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강남의 수많은 표정 중 하나일 뿐이다. "공장 부지에 가건물을 짓고 살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동시대 강남인도 있다. 20여 년을 내리 강남에서 산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 소녀>(텍스트 펴냄)의 저자 김류미는 사람들의 무심한 동경 너머, 밭이 펼쳐져 있던 강남, 허허벌판에 단독 주택이 간간이 하나씩 있는 강남을 말한다. 사진기자들은 이런 대비가 재미있다는 듯 포이동의 비닐하우스 촌과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같은 프레임 안에 가두곤 한다.

모순 가득해 보이는 이 공간성(들)은 사실 한 시대를 둘러싼 여러 겹의 진실이다. 그리고 이 레이어가 풍부할수록, 미디어가 이것을 주목하고 추켜올릴수록 그곳은 진짜로 '상품성'을 갖춘 곳이 된다. (지방에서 상권 부흥을 위해 스토리를 채용하는 예를 생각해 보자.) 얼마나 다양하게 재현되는가가 그 공간의 권력인 셈이다.

▲ <명동 아가씨>(김미선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익숙한 공간 앞에 새로운 필터를 갖다 대 새로운 역사를 쓰는 시도로서 이 책도 주목할 만하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는 속지 문장으로 시작되는 <명동 아가씨>(김미선 지음, 마음산책 펴냄)다. 이 책은 1950~1960년대 여성의 소비 문화를 중심으로 명동이란 공간을 재해석했다.

지금 명동은 어떤 곳인가. "이랏샤이마세"가 울려 퍼지는 한류 관광의 중심지, 명품과 짝퉁이 공존하는 쇼핑의 메카, 대선 경선 후보인 '대한민국 남자'가 중후한 중년의 몸을 기꺼이 흔들게 만드는 최다 유동 인구의 공간이다. TV 뉴스에서 익명의 소비 대중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즐겨 찾는 배경이자 "볼 것도 없는데 왜 이리 외국인이 많냐"는 불평으로 언급되는 것이 21세기 명동이다.

내게 명동은, 지난해 '마리'를 중심으로 한 명동 재개발 구역에 용역들이 기습 침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갔던 다소 위태로운 기억을 제외하면, 가끔 쇼핑이나 만남을 위해 들르는 곳일 뿐이다. 당신에게 있어 명동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에게서 딱히 '그곳이어서 특별한 건 없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강북 최고의 장소엔 이제 스토리마저 빈곤하다.

그러나 과거는 화려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부터 약 20년간 명동은 행정과 재계의 중요 업무는 물론이요 소비와 환락과 유흥 모두를 소화하며 시대 그 자체를 증명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소설가 최일남이 "생에 참여한 기쁨을 이 지역에서만큼 만끽할 장소도 없"어 "마음이 우울하다거나 할 때 (…) 자주 찾아온"다고 극찬했을 정도로 멋과 낭만이 흘러넘치는 장소였다. 이봉구가 <명동 백작>(일빛 펴냄)으로 이미 낭만의 대명사처럼 박제해 놓지 않았는가.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동아일보> 1957년 11월 25일)라 할 정도로 서울의 '유일한' 아이콘이었던 명동이,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기성복 붐과 강남 지역 개발이 진행되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였다고 한다. 지금도 최고 수준의 유동 인구와 평당 땅값을 자랑하는 명동에 '쇠퇴'란 말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 할 수도 있겠지만,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할 공간으로서의 지위 상실'이라는 의미에서 곱씹어본다면 맞는 단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첫째로, 이제는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명동의 전성기 역사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건 누구의 역사인가? 앞서 언급한 문장-"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을 다시 꺼내 보자. 이 문장이 책의 접근법과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책에서 주목한 '누구'는 제목이 보여주는 대로 '아가씨'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주로 패션과 미용을 소비하거나 그 서비스를 제공했던 양장점·미장원 등의 그녀들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저자는 과거의 신문 자료와 여성지 <여성계>, <여원> 등에서 흥미로운 언급을 건져 올리고 이제는 80~90세가 된 그 시절 명동의 양재사와 미용사들을 만나 구술 채록해 이 책(원래는 논문)을 만들었다. 책의 첫째 장점은 소재 자체이며, 둘째 장점은 자료다. 지금과 비슷한 기획에 촌스러운 말투가 결합된 옛날 기사는 어쩐지 사랑스러운 느낌을 준다. 당시의 여성지 화보, 패션쇼 사진, 화장품 광고 도판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까지 주로 남성 문화예술인의 시선으로 조명됐던 그 시절 데카당과 낭만의 명동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명동이 역사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소비문화는 빼놓을 수 없으며 그 중심에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 여기서 여성들은 단순한 수혜자나 소비자가 아니라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존재, 즉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미용 서비스와 의류를 직접 만들어냈던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명동은 그 속에서 "(활보하면) 날아가는 새도 잡을 수 있다는 그런 기분", "하이클래스"가 된 기분을 만끽하게 하는, 소비·치장·사교로 대변되는 여성의 정체성 형성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여성 잡지도 거리의 여성들을 '도촬'하여 "걸음걸이가 낙제"라든지 "스커트 기장이 너무 길다"라는 냉혹한 전문가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이나 여성이 남자 역할을 한 여성 국극이 크게 유행하여 현재의 '빠순이' 수준의 팬덤이 존재했다는 사실 등, 지금 여성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는 것도 즐거움이다. 이 가운데 유명 '데자이너'들의 성공담만이 아니라 원장이 입에 넣어주는 김밥을 먹어가며 밤늦게까지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미용 노동자의 모습까지 '여성'으로 아우러지는 다양한 계층의 증언을 놓치지 않은 것도 미덕이다.

반면 아쉬운 점도 많다. 사고, 멋 부리고, 일했던 여성들의 다양한 얘깃거리가 망라되어있지만 그 중에 딱 하나의 문제에 추를 달아 질문을 심화하거나 의미를 밝혀내줬더라면 단행본으로서의 매력이 살아나지 않았을까 싶다. 중심을 잡아 주는 가설이 없다는 데 대한 아쉬움이라고 할까. (책의 멋진 표지처럼) 쇼윈도 속을 구경하는 듯한 기분은 들지만 그 옷을 살까 말까 갈등하는 복잡한 기분은 갖게 하지 않는다고 할까.

사실 나는 '여성의 소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문화적 시선'이란 책 표지의 문구를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이 나아가는 결론, 즉 여성의 소비가 명동이란 공간의 공간성을 만들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결론과 어긋나진 않는다. 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여성의 '꾸미고자 하는 욕망'은 시대와 어떤 식으로 반목했는지, 거기서 여성들이 꺼내든 논리는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주면서 거꾸로 그 시대를 읽어줬다면, 반드시 분석되어야 할 지금의 한국의 미용·소비문화를 바라보는 데 더 유의미한 관점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 책도 여성의 치장과 이를 위한 소비를 둘러싼 담론을 언급했다(119~123쪽). 이때도 때 빼고 광내고자 했던 여성들의 욕망과 그 실현은 반드시 사치나 허영이라는 질타를 맞아야 했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 신여성에 가해진 공격부터 21세기에 쏟아진 '된장녀' 비판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과업을 앞두고 귀걸이 목걸이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일차원적 비난으로 일관된다.

이 시절 여성들은 외제를 쓰지 말자고 스스로 목소리를 높였다. "외산을 씀으로써 어떤 푸라이드를 가져보려는 여성들의 허세는 혁명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이 마당에 완전히 일소되어야 한다"(미용 학교 정화고등학교 원장 권정희), "한국 여성들이여! 외국의 침해를 받지 말고 자립합시다!"(화가 이룡자) 이 대목에서 저자는 강력한 소비 규제를 실시하면서도 경제 개발 논리를 앞세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약속했던 박정희 정권의 모순을 언급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소비와 관련된 자유와 쾌락의 경험은 철저하게 억제되었고 그 결과 "소비로 재현되는 근대의 여성 역시 억압되고 배제되었다." 멋진 양장과 고데로 말아 올린 머리, 시시콜콜한 잡담과 타인의 시선으로 정체성을 형성한 그녀들의 목소리가 이 지점으로 '모아'졌다면, 좀 더 집중력 있는 독서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현재 미용에 대한 집단적 집착이 놀랄 정도로 비대해진 데 대한 일말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 지금 나는 결국 여성들이 자아 형성을 위해 선택할 수 있던 해방구는 그곳뿐이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것조차 쾌락 억제 정책 하에 왜곡되고 짓눌린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궁금증을 해명하는 것은 <명동 아가씨>를 레퍼런스 삼을 후배 여성학자들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전후 일본의 한 유머 잡지는 유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현대 일본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봉건적인) 특징, 그리고 가장 새로운(민주적인) 특징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의 앙케트를 진행했다. 사회 평론가이자 프랑스 문학 전공자인 다쓰노 유타카는 전자엔 '정치'라 대답했고, 후자엔 '판판'이라 대답하며 "인종적, 국제적 편견을 넘어섰으니까"라고 덧붙였다. 판판은 주둔 미군을 상대했던 양공주, 즉 매춘부들의 이름이다.

갑자기 판판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존재를 알게 한 책 <패배를 껴안고>(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 저자가 이 "정복자들의 보물에 손 댈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을 일본의 '패전 문화'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군으로 끌어올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혼란과 절망이 지배하던 패전 이후 일본에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역동성은 '존경받을 만한 사회'의 주변부, 즉 그 바깥에서 생겨났다는 설명과 함께. 판판과 더불어 존 다우어는 암시장과 술 취한 자들의 '가스토리 문학'을 패전 문화의 중요 요소로 언급했다.

세 가지는 도쿄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이후의 일본이 서술해 두고 싶지 않았던 대표적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십 년 지난 시점, 벽안 학자의 책 속에서 그것은 시대를 말해주는 가장 가치 있는 증거로 자리매김한다. 사람들이 진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는 늘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배제되고, '재해석'이란 이름으로 뒤늦게 나타난다. <명동 아가씨> 속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제야 들려온 것처럼.

그리고 이 책이 참고한 자료에서조차 배제된 목소리가 있으니, 언젠가 또 다른 연구의 틀로 포착되어 들려올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가령 저자가 다음 기사의 인용 뒤에 "1950년대의 패션 리더로서 양장 패션을 소비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한, 밤의 그녀들과 같은.

이연옥 : 저희는 대개 학생들, 중년 부인, 직장 여성……고정되어 있어요. 그 외에 밤 직장을 가졌다든가 그런 여자들이 가는 데는 따로 있거든요.

정진숙 : 저희도 역시 학생과 중년 부인, 직장 여성이 많고 밤 직장을 가진 여성은 대부분 피하지요. (…)

(1967년 6월 <여원> '직업 여성 유람 좌담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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