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사식 정치 말고 뭐 새로운 정치는 없나'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던 차에 한 지인께서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서유석 옮김, 메이데이 펴냄)라는 책을 보내주셨다. 반가운 마음에 집에서 가장 시원한 자리-그래봐야 땡볕 안 드는 창가 쪽-에 몸을 누이고서는 책을 펼쳐들었다. 채 200쪽을 넘기지 않는 이 가벼운 책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꽤 무게감 있는 제안을 하고 있다. 그의 제안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 머레이 북친이 문제 삼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 민주주의 체제의 모습
현대인에게 민주주의는 이미 상식이다. 거의 모든 나라가 민주적 헌법과 정치 체제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이제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비록 전 세계인이 민주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거나 희망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의 현실화가 제대로 되어 가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근대 민주주의를 낳은 미국 및 서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민주주의가 형식적 정치 제도로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자로서의 위치는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선거 기간에서만 확인될 뿐이다. 선거라는 예외 기간을 벗어나면 정치 공간은 이내 전문 정치인들이 기술을 발휘하는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이 상황에서는 정치적 실천이 시민의 일상적 삶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정치는 오직 "국가 기구의 구성원인 의원, 판사, 관료, 경찰, 군대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 속에서 시민이 자기 목소리를 낼 자리는 없다. 정치는 시민들의 자발적 의견 및 의지 형성의 공간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그것은 이미 행정 체계로 분화되었다. 정치가 체계 조직으로 분화되었다는 말은 현대 정치가 체계 자체의 내적 작동 원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운영된다는 의미와 같다.
이익 정치의 역설
현대 정치는 국민 국가라는 조직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체계는 국민 국가의 목표를 안정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 19세기 이후 국민 국가의 목표는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것에 맞춰져 왔다. 이럴 경우 국가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행위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조직 및 사람들 간의 충돌을 억제하고 잠정적 타협을 이룸으로써 국가 전체의 성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역점을 두게 된다.
이해관계의 타협은 인간들 간의 규범적 상호 이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는 만큼 받으려 하는' 타산적 흥정의 과정일 뿐이다. 적게 잃고 많이 얻으려면 세력이 강해야 한다. 세력 강화에는 강한 조직력이, 강한 조직력의 구비에는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이 요구된다.
조직 내부의 다양한 요구를 단순화하고 효율적으로 외화하는 기술, 이것이 바로 행정으로서의 정치이다. 행정으로서의 정치는 정당, 노동조합, 기업, 시민단체 등에 가리지 않고 적용되고 있다. 국가 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국가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각 조직의 요구를 물리적 충돌 없이 타협시키고자 고도의 협상 행정 기술과 체계를 마련한다. 의원들이 바로 이러한 기술의 전문가들이며 의회는 타협의 행정이 체계적으로 기능하는 기관일 따름이다.
조직의 대표자들은 조직 행정의 전문가들이 차지하게 된다. 물론 대표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성원들마다 상이한 질적 특수성을 쉽게 무시한다. 조직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개별적 요구는 '어쩔 수 없이' 배제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치가 조직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기술로 자리 잡을수록 조직 구성원들 개인의 요구는 오히려 최소화된다. 이익을 대변한다는 조직이 오히려 구성원들의 이익을 간과하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다. 조직의 대표자들의 민주적 선출이 곧 구성원들의 이익 보장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야만적 자본주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익 확보에 목숨 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북친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자유와 해방이 아닌 지배와 억압의 관계로 만든 진화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원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생존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사회적 관계는 본래 상보성의 윤리를 중심으로 했다. 각자는 생존을 위해 안정된 전체를 필요로 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상대와의 협력을 요청했다. 남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태도로는 이러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명령과 복종의 지배 구조가 자리 잡게 된다. 지배의 규범은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현대에서는 자본주의적 지배 관계 유형이 정착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은 지배 경쟁이다." 이 체제에서 생존하려면 상대방을 잡아먹어야 한다. "무자비한 경쟁자본주의의 야만적 원칙에 따르면 (…) 상대를 희생시켜 성장하지 않으면 몰락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야만의 원칙을 체화한다. 야만적 경쟁의 "가치가 가족 관계, 인간관계, 정신적 관계를 삼켰으며, 상호부조, 도덕적 책임 같은 전(前)자본제적 전통은 사라졌다."
상보성의 윤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 원칙에 의해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사람들은 이익에 목숨 거는 고립된 존재로 파편화되었다. 그리고 정치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기술로 요청된 것이다.
기존 체제의 대응
야만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북친에 의하면 자본주의 및 현대 국민 국가 체제의 뛰어난 자기 조절 능력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및 현대 국민 국가 체제는 경제적 문화적 이념적 반발을 상황에 따라 잘 조절하고 잠재워왔다.
이미 이익 확보의 욕망에 익숙해진 이들을 길들이기란 쉬운 노릇이다. 약간의 이익분만 확보해주면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갈등은 성장의 과실을 일부분 나누어줌으로써 상쇄되었다. 사회 복지 프로그램은 이것을 구현해줬다. 덕분에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며 소비 역량도 증가했다.
자본주의 국가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던 노동자 계급 및 좌파 정당은 일정한 이익이 제도적으로 확보되자 체제 유지에 타협해줬다. 현 체제가 제안하여 유지하고 있는 복지 제도는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규범적 차원에서 승인되었다기보다는 이익을 탐하는 이들끼리의 잠정적 타협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복지 제도는 오직 지속적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 때에만 분배가 보장될 수 있다. 임금을 착취하면서 가치를 확보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하려면 잉여 가치를 보장해 주는 요인(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제3세계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이 상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 체제 하의 사회 복지 제도는 사회적 희생양의 양산을 용인하는 제도가 된다. 우리는 집단적 이익 급부를 가능하게 하는 국가 체제를 민주적 선거를 통해 승인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서비스가 자동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대표자들을 선출하여 권한을 위임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다. 자유 대신 지배 관계를 승인하는 삶이 그 하나다. 민주주의는 원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우애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 복지 서비스의 안정적 작동을 위해 지배 관계를 묵인했다. 또한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발적 의견 및 의지 형성에 의해 실천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을 몇몇 대리인들과 행정 체계의 자동적 작동에 맡겨 버렸다.
코뮌주의의 길
▲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머레이 북친 지음, 서유석 옮김, 메이데이). ⓒ메이데이 |
시민들은 지역 자치체를 건설하면서 자주적인 정치 활동을 일상화한다. 민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각자의 사적 조직적 이해관계에 거리를 취하면서 사회 전체의 보편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시민으로서 민회에 참여해야 한다. 물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고 타인의 권리를 소홀히 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쉽게 변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치체 활동을 통해 특수 이해관계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차츰 성찰적 자세를 취하는 연습을 지속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시민(citoyen)'으로서의 실존을 확인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활동은 윤리적 미덕의 계발로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자치체는 인간에 대한 사랑(philia)이 자리 잡는 인륜적 공간이 된다." 공동의 이익에 관련되는 거의 모든 사안은 시민들이 민회에서 얼굴을 맞대고 처리한다. 생산과 분배는 자치체가 정한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
지역 자치체들이 코뮌주의 노선에 맞게 민주화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자치체들의 연합으로 접어든다. 단일 자치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자치체들의 연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치체 연합은 민회와 연방 의회를 통해 나라 전체의 경제와 정치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자치체 연합은 국민 국가의 역할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자치체 연합을 통한 국민 국가의 해체로 과장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선거 제도를 통해 의회로 진출하면서 전국 단위의 행정과 법제도에 자치체들의 요구를 반영시키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코뮌주의는 일종의 윤리적 태도 변화 혹은 정치 문화의 일신을 함축한다. 그래서 북친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축소되거나 변질되고 있는 대중의 공적 행동과 공적 담화의 장을 되살려" 시민적 정치 문화를 발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시민적 정치 문화만으로는 실천의 지속을 보장하지 못하므로 항구적 조직과 제도의 건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방 자치 선거 출마와 같은 기존 대의제 정치 제도의 법적 틀을 활용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당선은 마을회의 정부를 합법적으로 만들 수 있게 하며, 이는 곧 코뮌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지 확보를 의미한다. 이 근거지를 통해 지역 자치에 기초한 연방의 건설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의원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 시도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오히려 실천적이고 신뢰할 만한 인민 권력을 내세우려는 노력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런 태도로 코뮌주의적 정치 실천이 이루어질 때 그것의 현실적 구현이 이룩될 수 있다.
오래된 미래
혹자는 이를 닳고 닳은 직접 민주주의에 관한 환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사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그의 제안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북친 역시 이 제안이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 전통과 연관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제안은 새롭다. 그는 제도로서의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활 문화로서의 직접 민주주의를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연대감의 저하 등과 같은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 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원리는 이미 오래 전에 발명되었다. 다만 그와 같은 '발명 원리'를 시대의 현실에 맞게 실천하려는 집단적 노력이 오늘날 부족할 뿐이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시민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의 관계를 실현했던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봉건적 전제권이 팽배하던 시대에도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이들이 있었다.
우리 시대의 조건은 그들보다는 훨씬 낫다. 또한 자본주의적 지배 문화에 대한 성찰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전망을 더욱 밝게 한다. 물론 코뮌주의를 주장하는 북친의 어투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실천의 제안은 '이론적 신중함'을 갖추기보다는 '의지적 역동'을 북돋는 편이 더 낫다.
우리의 고민거리는 북친의 제안이 이론적으로 적절한가가 아니다. 그의 제안이 한국 사회의 민주적 현실에 적절한가이다. 이것은 오직 실제적 실천 속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실험적 모델로 여겨지지만 분명 소득은 있을 것이다. 자치체 활동을 통해 시민들은 자기 삶과 정치적 실천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할 것이며, 연대적 삶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오래된 미래'가 들려주는 복음을 듣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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