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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저지른 그 소년, 알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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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저지른 그 소년, 알고 보니…

[프레시안 books] 박지리의 <맨홀>

"청소년 책 좀 읽니?"

3년 전, 우연히 버스에서 마주친 중학교 은사님이 물었다. "책은 늘 읽는데…." "지금부터 많이 읽어두면 좋을 거야. 학교 사서가 되려면 청소년 책을 알아야지."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한창 선전 중인 <완득이>(김려령 지음, 창비 펴냄)나 이름이 낯익은 이금이 작가 등의 청소년 문학을 찾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청소년 문학 혹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은 내가 성장 소설의 최고로 여기는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나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민음사 펴냄)에 미치진 못했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10대에 느꼈던 혼란, 불안, 미숙함, 우울, 외로움, 소망이었다.

그저 청소년 문학에 관심 많은 일반 독자의 눈으로 조심스럽게 책을 읽었고, 1~2년 지나다 보니 어느 정도 눈에 띄는 특징이나 경향이 보이는 듯 했다. 최근엔 그 어느 때보다 폭력, 왕따, 자살, 성 등 유난히 자극적인 소재가 많았다. 또 젊은 작가, 특히 나와 동년배 작가의 청소년 소설도 하나 둘 등장했다.

<맨홀>(사계절 펴냄)은 2년 전 <합체>(사계절 펴냄)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은 박지리의 두 번째 책이다. 한 번도 문학 수업을 받거나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나와 같은 나이, 심지어 동문에 같은 학부 출신이었다.

어쩌면 필수 교양 강의를 함께 들었을지도 모를 인연에 놀라워하다 부러운 마음이 들었고, 왠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착잡했다. 한편, 두 달 만에 썼다는 데뷔작이 극찬을 받긴 했지만 후속작도 과연 그럴까, 수많은 아이돌처럼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진 않을까 싶기도 했다.

"엄마, 내가 사람을 죽였어. 엄마 아들이 살인자가 되어 버렸다고…….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 <맨홀>(박지리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그런 심보였으니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뭐야. 이번엔 살인이야?' 하는 탄식이 나왔다. '유행 타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분명 나는 얕봤던 것 같다. 두 번째 책도 아주 좋을 리 없다는….

나는 화자와 작가를 종종 동일시한다. 겪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처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맨홀>을 읽으며 감탄했다. 작가가 정말 궁금했고, 만나서 수다 떠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인정해야 했다. 책이라면 여기저기 관심을 보이며 살고 있지만 매일 두세 시간씩 쓴다는 성실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은 우연히 친구들과 네팔 사람을 죽이고 청소년 보호 관찰소에 머무는 소년이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이다. '나'는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한 순직 소방대원의 아들이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영웅이라고 기념하지만 사실 그는 집안에서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 '나'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항상 두려움에 떨었다.

소년이 그 사람을 피해 누나와 몸을 숨겼던 곳은 공사가 중지된 구역의 맨홀이다. 잠잠해진 때를 노려 꾸역꾸역 집으로 들어가 보통 아이들처럼 생활하려 애썼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엄마를 증오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젠 누나마저 엄마처럼 죽은 아버지를 감싸고 변호한다.

삶의 모순을 극심히 느낀 소년은 하천 공터에서 만난 기진이 무리와 어울린다. 자신들의 미래가 이곳 변두리에 몰린 불법 체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예감하는 공고생들의 음울한 분위기는 기형도의 시 '안개'와 비슷하다.

그 동안 내가 본 청소년 문학은 성인 문학에 비해 내용이 난해하지 않으면서 문장이 더 간결했다. 원숙한 맛은 없지만 오히려 주인공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한 특유의 매력이 보였다.

그러나 문장력만 좋은 경우도 없지 않았다. 대개의 주인공들은 지나치게 명랑하거나 우울했다. 아니면 이미 인생에 대해 깨달아서 격언을 자주 했다. 캐릭터의 일관성이 없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주변 인물들도 아주 쿨한 성격이었다. 설정일 수도 있지만, 뭔가 더 보여주길 원했다. 이를테면 현실감 같은 것.

내가 <맨홀>을 보며 놀란 점은 리얼리티다. 살인을 했다고 해서 사이코패스나 정신병자는 아니다. 유난히 남다른 정신세계를 지닌 것도 아니다. 누구라도 할 법한 적당한 생각과 절망을 느낀다. 상처 받으며 살아온 만큼 예리한 지적과 분노를 이따금 드러낼 뿐이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차용하는 의식의 흐름이란 기법은 능숙하지 않으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인생을 다 안다는 듯 굴지 않으면서도 쉽고 간단한 문장으로 소년의 감정과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하여 소년이 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어쩌다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았는지 설득력이 느껴진다.

아마 내 경험의 탓도 작용했으리라. 실제로 나 또한 싸움이 한창인 집에 들어가지 못해 하릴없이 터벅터벅 거리를 헤맨 적도 많았고, 갈 데가 없어 건물 뒤 틈새에 쪼그려 앉아 울기도 했다. 주인공의 방황은 나의 기억과 오버랩 되며 '맞아. 나도 저랬어', '괜한 사람이 더 미웠어' 라는 추임새를 끌어냈다.

또 하나, 이 책에 매료된 이유는 허점 그 자체이면서도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구멍을 삶의 아이러니에 빗댄 점이다. 맨홀은 소년이 유년을 보낸 안식처이자 여자 친구 희주와 첫 키스를 나눈 아지트고, 아버지에게 헌정된 감사패를 던진 쓰레기통이자 시체를 유기한 장소다. 맨홀에 대한 기억과 사건은 어렵게 다가오지 않으면서 우리가 사는 곳이 무수히 많은 맨홀로 덮여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때 청소년 문학을 쓰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기억의 저장고만 풀어도, 일기처럼만 써도 스스로 위안이 되고 공감도 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내가 감히 쓸 수 있으려나 싶어 고개를 젓다가도 내심 교만했다. 이제 시간이 갈수록 또래의 작가는 더 나타날 것이다. 그들의 뛰어난 능력 앞에서 나는 열패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문학에 대한 애착은 여전하다. 아직도 어린 내 모습을 책 속 주인공을 통해 계속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싶다. 그들처럼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성숙하고 단단한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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