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딸아이 남친은 재원" 이 문장은 틀렸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딸아이 남친은 재원" 이 문장은 틀렸다?

[프레시안 books] 최경봉의 <한글 민주주의>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당대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어느 에세이스트의 칼럼을 읽다가 "나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윤리적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보고는, 그의 팬 카페에 글의 내용에 동의하는 글을 쓰면서, '더'라는 부사가 수식을 하는 문장 구조에서라면, '더 윤리적 존재'라는 표현은, 내 감각으로는 비문이라고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부자연스럽다는 취지로 이 문장에 딴죽을 걸며 '옥에 티'를 지적했다. 마치 '더'가 "윤리적'이 아니라 '존재'라는 명사에 걸리도록 유도되는 구조로 오인될 수 있으니 나라면 '더 윤리적인 존재'라고 썼을 것 같다고.

곧바로 글쓴이의 댓글이 달렸다. 자기가 쓴 원고에는 분명히 '윤리적인'이었다는 것이다. '-적인'이라고 쓰면 대책 없이 '-적'으로 고치시는 분들이 있는데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이다. "교열 보시는 분들한텐 이런 섬세한 언어 감각이 없으신 듯"이라는 논평에 내 책임이 아닌데도 '동업자'로서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비슷한 사례로, 이런 일도 있었다. 작년 여름 어느 일간지에 칼럼을 쓰면서 "출판인들이여, '희망버스'에 함께 타자"라는 제목을 붙여서 보냈는데, 지면을 보니 '-에'가 '-를'로 고쳐져 있었다. 큰 차이는 없지만 아무래도 찜찜했다. 그동안 써온 글을 책으로 묶으면서 이런 주석을 붙였다.

"토씨 한 글자의 사소한 차이지만, 말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느 쪽이 더 적절한지에 이견이 있다면 마땅히 매체 편집진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혹시라도 말맛의 차이를 무시한 채 교조적인 문법 이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었기만을 바란다."

이 자체만을 놓고 보면 사소한 트집일지도 모르지만, 현장 편집자들에게 '교열'을 가르치면서 늘 마주치곤 하는 당혹에 관해 핑계 김에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저자의 원고는 편집자의 국어 시험 답안지가 아니라, 저자와 독자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공간이니, (실재하는지조차 아리송한) 규범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접어두고 의사 전달의 효율성에 집중하라"고 강조해도, 초등학교 시절의 '받아쓰기'부터 그 살벌하다는 대학 입학시험까지 줄기차게 '정답 맞추기'만을 강요당했던 경험에 덧붙여, <바른말 고운말>이나 <우리말 나들이> 같은 프로그램으로도 모자라 예능 프로그램에서까지 "공부하세요!"라고 무식(?)을 질타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오도된 통념을 고작 몇 시간의 강의로 깨뜨리는 건 역부족이었다.

외국어도 아니고 20년 넘게 써온 모어(母語)의 문장을 놓고, 게다가 배울 만큼 배운 성인들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자연스러운지 어색한지 명료하게 의사 전달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전문가에게 물어보지 않으면(또는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의지하지 않으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이런 이상한 일이 흔히 벌어지는 것은, 언중들의 실제 언어생활과는 한참 동떨어진 내용까지도 마치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규범에 짓눌린 결과다.

몇 해 전의 사례는 그 폐해를 웅변해준다. 출판 편집자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재미있는 질문이 올라왔다. 연결어미 '-든'과 '-건' 가운데 어떤 표현이 옳은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이런 표현들에 관해 맞다거나 틀리다는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엔 질문이 꽤나 생뚱맞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오히려 '왜 그런 의심을 가졌는지'를 되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내 '언어 규범에 얼마나 주눅 들어 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아주 좋은 사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연결 어미 '-든'과 '-건'은 거의 완벽하게 호환이 가능하다. 그것은 두 표현의 의미가 같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표준적인' 규범적 기준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는 건, 실은 대다수의 언중이 '표준어'에 관해 가진 통념에 비추어 그리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다. 실제로 지역이나 계층에 따라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바람에 원활한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가장 '보편적인' 표현을 제시해주기보다는 대다수 언중들이 일상에서 별다른 의심 없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표현들에 대해서 '틀린 말'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데 치중하는 규범주의적인 언어관에 의해, 끊임없이 '맞는 말'과 '틀린 말'을 가리도록 교육과 계몽의 객체로만 여겨진 탓에 그런 태도가 아예 내면화된 것이다. 말 한 마디도 세심하게 가려 쓰려는 노력은 매우 훌륭한 자세이지만, 그것이 지나쳐 '맞는 말'과 '틀린 말'을 규범적으로 강박하는 것은 선후와 본말을 뒤바꾼 것이다.

그런데 꽤나 오랜 세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펼쳐왔던 경험을 곱씹자면, 우리 사회엔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주장에조차 우군(友軍)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10여 년 전 <감염된 언어>(고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의 출간에 잠깐 들뜨기도 했지만, 예컨대 <국어의 풍경들>(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말들의 풍경>(개마고원 펴냄)으로 이어지는 그의 저작이 적어도 대중사회에서는 <우리 글 바로쓰기>(이오덕 지음, 한길사 펴냄)의 도저한 권위에 상대조차 안 되는 것 같다. 최경봉이 지은 <한글 민주주의>(책과함께 펴냄)를 읽으며 든든한 우군을 만난 듯한 반가움이 앞서는 건 그래서이다.

▲ <한글 민주주의>(최경봉 지음, 책과함께 펴냄). ⓒ책과함께
비록 그보다는 훨씬 단호하게 대중사회에 만연한 규범주의와 언어 순혈주의에 맞서왔던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도 그러한 대중사회를 조심스럽게 의식한 소치이겠으나) 상당히 완곡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데 그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 조심스러운 의문조차 '아끼고 사랑해야 할 모국어'에 대한 불경으로 여겨지기 일쑤인 풍토를 염두에 두자면 이 책의 자못 대중적인 필치가 차라리 소중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궁극적으로 '정책론'에 닿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쓴 저자가 학계에 몸담고 있는 연구자라는 점도 반가운 대목이다. 지난해 여름, 어문 정책에 대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일이 있었다. 주제가 '국어 순화'였던 만큼 얼마간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미리 발제문을 받아보고는 토론문을 쓸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언어 현상에 대한 최소한의 과학적 천착도 없는 발제문은 전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폐쇄적 순환 논리'로 일관하고 있었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신이 존재하느냐를 두고 토론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서로 존중하면 되는 일이다. 내가 의아했던 건, 토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명색 국립국어원에서 주최하는 정책 토론회에 차마 토론할 엄두도 나지 않는 내용을 발제문이라고 내놓을 사람에게 어떻게 발제를 맡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게도 사람이 없나.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언어 현상에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훈련받은, 그래서 있을 수 있는 이견에 대해 토론이 가능한 전문 연구자들은 의외로 정책론을 백안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달리 말해, 나는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에서 어문 정책의 근거를 찾는 저자의 입지에 큰 흐름에선 반갑게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적 대안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것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본격적으로 토론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뿌듯하다. 이견의 존재가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겁게 여겨지는 건, 그와 내가 최소한의 전제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책론에 관해 이런 토론을 기대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만큼, 그간 이 주제를 다루어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규범주의와 언어 순혈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버젓이 실생활에서 폭넓게 쓰이는 말을 '틀린 말'이라고 못 박는 한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생경한 표현을 '바른 말'이라고 우격다짐하는 데 잔뜩 주눅 든 나머지 스스로 무식을 한탄하곤 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실은 당신이 무식한 게 아니라, 그들이 권위적인 거야"라는 진실을 일깨워주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아무리 반가운 책이라도 주례사만으로 서평을 마무리하는 건 너무 무성의하지 싶으니, 가장 눈에 띄는 한계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단일한 한국어가 아니라 수많은 한국어'들'이 존재하기에 그것을 단일 규범으로 '표준화'하기보다는 '공통어'라는 개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입론은 그 자체로 타당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때, 저자에게 한국어는 (한국어'들'이라 해도) 정태적으로만 파악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즉, 아무리 한국어가 다양하다 해도, 대다수 한국어 사용자가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규범은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언어 현상을 동태적으로 파악할 때, 특히나 언어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 한국어의 현실을 고려하면, '공통어'를 정리하는 일조차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테고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좀 더 고려했더라면 더 정교한 깊이를 확보할 수 있었지 싶다.

예를 들자면, 몇 해 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경악한 일이 있다. "딸아이의 남자친구가 회사에서도 촉망받는 재원이래" 하는 대사 때문이었다. 작가가 미쳤는 줄 알았다. 피디도 배우도 제 정신은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몇 달 뒤, 나보다 열댓 살쯤 어린 후배가 '재원'이라는 말을 비슷한 맥락에서 쓰는 걸 듣고는 그제야 비슷한 또래의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표현이 이상한지 물어보았다. (오해가 있을까 부언하자면, 매우 훌륭한 한국어 구사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할 만한 이들만을 골랐다.) 이상하다는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요컨대 '재원'이라는 단어가 세대에 따라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거나 적어도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보수적 규범주의자라면 아마 "한자를 안 가르쳐서 그런다"고 엉뚱한 화풀이를 할지 모르지만, 이건 한자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한문을 쓰던 시대에도 몇 세대를 거치면서 뜻이나 쓰임이 사뭇 달라진 한자어들은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이 어휘에 관한 한, 내적 동인과 외적 동인을 분명하게 지목할 수 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계집 원(媛)'을 포함하는 다른 한자어를 적어도 일상어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유연관계를 통해 의미를 인식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적 동인이고, 특별한 성별적 표지가 큰 의미가 없을 만큼 사회적으로 여성의 교육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것이 외적 동인이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한 세대쯤 뒤엔 '공통어'로서 '재원'의 뜻풀이가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리가 될 때까지, 이 어휘를 정책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재원'을 남성에게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못 박는 건 당연히 규범주의의 폭력이며, 나아가 대체로 세대에 따라 그런 차이가 나타나기에 나이주의의 폭력이기도 하다. (한자어의 어원을 근거로 내세운다 해도 궁색해지기만 한다.) 그렇다고 익숙한 대로 쓰라고 두는 것도, 의사소통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같은(또는 아주 비슷한) 의미를 표현하는 여러 형태가 있을 때 그 중 하나만을 '표준어'라는 단일 규범으로 환원시키는 것보다 사용 범위에 따라 복수의 표현을 '공통어'로 정리하자는 건 전향적인 대안이지만, 그와는 달리 같은 형태가 다른 의미로 사용될 때 특히나 각각의 의미를 공유하는 사용자 집단의 인구가 대등하다면, '단일 규범'의 망령을 되살리지 않는 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도 없고 '공통어'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한 소통의 장애를 방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현실에서의 권력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건 공허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선택"이라는 개념도 실은 모호하다. 마치 중립적인 '언중'의 대세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역사적 선택"을 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은 어떤 '언중'의 대세가 다른 '언중'들이 형성할 뻔한 대세에 역사적으로 '승리'한 것뿐이다. 이 책의 목적이 '승리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면, 저자의 정책론이 다양한 한국어'들'의 '민주적' 공존을 위해 과연 어느 언어 집단을 지지하는지 좀 더 명징한 방향을 제시할 때 앞으로의 토론이 더 생산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