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편 한국의 독자들에게 아시모프의 작품은 이제 놓쳐서는 안 되는 걸작보다는 '지나간 SF', '고전 SF'로 자리를 잡는 것 같다. 아시모프의 역작 '파운데이션' 시리즈, 경쾌하고 소박한 추리물이기도 한 '로봇' 시리즈, 그 외 대표적인 작품들은 대부분 한두 번 번역되어 이제는 모두 절판이다. 지금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아시모프의 SF는 대부분 고전 냄새가 물씬 나는 캠벨식 단편 소품이다. 재미있고 기발하지만, 이언 뱅크스나 피터 와츠, 파올로 바치갈루피 같은 현대 SF 작가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시대에 읽자니 좋게 말해 고전이요, 솔직히 말해 낡은 SF라는 생각이 드는 글들이다.
이런 '탈 고전' 시대에 아시모프의 장편 소설이 새로이 번역 출간되었다. 심지어 첫 소개라고 한다. 재출간이 아니라니 우선 놀랍다. 아시모프는 자기 작품으로 한국에서 도서관 서가 한 줄을 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과학 소설 작가가 아닌가!
▲ <영원의 끝>(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창규 옮김, 뿔 펴냄). ⓒ뿔 |
<영원의 끝>은 시간 여행이라고 하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보았을 법한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만약 과거로 가서 어떤 시대를 바꾸면, 그 다음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면 원래 있던 미래는 어디로 가지? 원래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이 '만약에' 질문에 천착한다면 대체 역사 소설이 되겠지만, <영원의 끝>은 애당초 지금 없는 미래에서 출발한다.
이제 인간은, 아니 모든 인간이 아니라, 이런 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영원 안에 사는 '영원인'들은 가장 적정한 상태가 유지되도록 다른 시간대를 조정할 수 있다. 최소변경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영원인들은 시간을 관찰하고, 조율한다. 어떤 시대에서 접시 하나를 옮겨 다른 시대의 우주여행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어떤 시대에 타이어 하나를 터뜨려 전쟁을 막을 수도 있다. 영원인들은 이런 '현실 변경'을 통해 생겨난(?) 27세기부터 위로는 7만 세기까지를 지켜보고 움직이고 있다.
이 철학적 잔소리로 이어지기 쉬운 설정에서 아시모프가 쌓아올린 이야기는, 아시모프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울 만큼 소소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 수만 세기를 움직인다고 해도 결국 신체 시간에 따라 늙어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람들은 어쩐지 모두 히스테리를 부리고 말과 행동이 오락가락한다. 계급적 관료제 속에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의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한다. 주인공은 시간을 초월해 철인 정치인 같은 역할을 하는 냉담한 장인이라는 설정과 달리, 보는 이를 낯 뜨겁게 하는 풋내 나는 욕망에 따라 제 멋대로 구는 소위 '모태 솔로'이다. 솔직히 읽고 있으면 보는 쪽이 오히려 좀 부끄러울 지경이다.
사실, 아시모프가 이 소설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 아마 동시대에 읽었다면, <영원의 끝>은 훨씬 더 거대한 과학 소설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러나 2012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처음 출간된 <영원의 끝>은 작은 책이다. 과학 소설 자체가 아직 작던 시대의 글이다.
흉이 아니다. 이 책은 그 시대 안에서 흥미롭고, 그 시대 밖에서 여전히 꽤 재미있기 때문이다. 글쎄, 60년 전 과학 소설이 첫 섹스에 넋이 나가 제 멋대로 싸돌아다니는 젊은이의 여정이 몇 십만 세기를 넘나드는 시간여행 모험(?)이기까지 하다니, 이만하면 시대를 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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