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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2년, 되살아난 경찰의 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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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2년, 되살아난 경찰의 위세

[해방일기] 1947년 8월 15일

1947년 8월 15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해방 2주년 기념식은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정치 세력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안재홍 민정장관이 모든 기념행사를 관에서 진행한다는 행정명령 제5호('해방 기념 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를 8월 4일에 발포해 놓았었다. 너무나 평온하다 보니 이런 정도의 충돌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지난 15일 거행된 8·15 기념행사 식장에서 좌석 관계로 통위부장 유동열 송호성 등이 중도에서 퇴장한 사건이 있은 다음 서울시장은 통위부를 방문하고 진사하였다는 통위부 측 발표에 대하여 18일 시장 김형민은 다음과 같은 강경한 담화를 서면으로 발표하였다.

"제2차 8·15 기념식전에 시로서는 통위부장 좌석을 과도 정부 부처장 좌석과 동열에 배치하였던 바 유 부장은 본부석에 특대하지 않았다는 것과 통위부 내 육해군 사령관의 좌석을 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그날 통위부 간부 측에서 불평을 가지고 본부 좌석을 발길로 차서 뒤엎고 의자에 붙인 귀빈의 기명을 떼어 던지고 심지어 그날 의식 역원에게 욕설까지 하고 유부장 이하 간부가 퇴장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시로서는 유 부장만을 다른 부장과 차별하여 특석을 배치할 수 없었고 육해군 사령관의 좌석은 본래 제한된 자리라 준비가 없었으나 양 사령관의 요구에 의하여 따로 배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식전의 준비 좌석을 뒤엎으며 일대 소란을 일으킨 통위부의 처사는 비례천만으로 이를 항의하러 시장 자신이 16일 통위부를 방문하고 진사를 요구한 일은 있으나 시에서 진사한 일도 없고 진사할 조건도 없다. 이러한 유감스러운 일이 다시는 없도록 바란다." (<경향신문> 1947년 8월 19일)

이튿날 통위부는 이를 반박하는 항의서를 발표했다.

"첫째 통위부장의 좌석이 일 정당 일개 모모의 비서의 밑에 들게 한 것은 금번 식전에서 처음 보는 예다. 통위부로서는 김 시장이 말한 육해 총사령관의 좌석에 대한 시비를 한 일은 없다. 이번의 김 시장의 태도는 국토를 호위하기 위하여 조석으로 국기를 배례하는 조선의 국군을 무시하였다. 이것은 시장이 우리 국군에 대하여 허위 날조의 낭설을 일삼아 국군의 모체를 의식 유린하였다고 확인하는데 적당한 처치책을 행사하기에 재차 진사를 요구한다.

(1) 시장 자신이 통위부와 육해 사령부에 직접 출두하여 각각 진사할 것.
(2) 8월 19일부 각 신문에 보도된 시장 담화를 취소할 것.
(3) 각 신문에 진사문을 재차 발표한 것." (<조선일보> 1947년 8월 20일)

김형민 시장이 무책임한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인 일은 이 일기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한 일이 있다. 이번 일 역시 그 자신의 담화문을 보더라도 "시장 자신이 16일 통위부를 방문하고 진사를 요구"했다는 말이 너무 황당하다. 본인이 찾아갔다는 것은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기 위해서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제를 좋게 해결하려는 뜻이었을 텐데, 담화문에서는 사과를 요구하러 간 것이었다고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군대 아닌 군대'로서 통위부의 어색한 위상으로부터 불거진 문제였다. 조선 정부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점령군이 현지 군대를 만드는 것은 점령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미군정과 이남 우익은 이북에 군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문제 삼으려 애써왔다.

그런데 미군정은 군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조선 경비대'와 '해안 경비대'를 경찰의 보조 기구라는 명목으로 1946년 1월부터 만들어 왔다. 통위부 측에서 말하는 "육해 총사령관"이란 두 경비대의 대장을 말하는 것이다.

경비대를 관할하는 군정청 부서가 '국방사령부'였는데, 1946년 봄 미소공위에서 소련 측이 '국방'이란 말을 문제 삼자 '국내경비부'로 바꿨다. 이것을 통상 '통위부'라 불렀고, 이것이 대한민국 국방부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 경비대 간부 26명 중 23명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일 정도로(허종, '친일파-민족 반역자 처단은 왜 좌절되었는가', <질문하는 한국사>(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 엮음, 서해문집 펴냄), 413쪽) 이 군대 아닌 군대도 친일파의 거점이 되지만, 유동열, 송호성 등 광복군 출신도 한 몫을 맡고 있었다.

'군대 아닌 군대' 문제는 언젠가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기념행사 진행을 맡은 서울시에서 8월 11일 발표한 행사 지침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경향신문> 1947년 8월 12일). 구호를 "일당 일파의 편향적 색채를 떠나", (1) 우리를 해방시킨 연합국에 대한 사의, (2) 민주주의 자주 독립에 대한 의의를 표시하되 그 방법과 조건을 제시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식전이 끝난 후 창덕궁 비원에서 열리는 축하연에 참가 희망자는 회비 200원을 첨부하여 14일까지 각 구청 중앙청에 신청할 것"에 대한 안내도 들어있다. 능력에 따라 원하는 사람들이 고위층과 어울릴 수 있는 '하이 소사이어티'가 서울에서는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치안 문제라면 경찰의 움직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8·15 기념일을 앞두고 서울에서는 좌익 진영에 광범위한 검거 선풍이 불고 있다. 11일 밤부터 12일에 걸쳐 수도경찰청 관내 각 경찰서원들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일제 행동을 검색하는 동시에 대량 검거를 단행중인 모양인데 검거된 사람 중 판명된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근민당 : 장건상 이여성 백남운 박동철 신동일 전평 : 박경우 전농: 최한철 협동: 박경수 여맹 : 유영준 문련 : 박찬엽 법학자동맹 : 조평재 신문관계자: 장순각 이신식 문분란(부인기자) (<서울신문> 1947년 8월 13일)

경무부차장 최경진 담에 의하면 이번 좌익 측 인물의 검거는 경무부에서 하는 것으로 CIC는 독자적으로 하고 있다고 하며 12일 밤11시 전까지 체포된 수는 327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계속 체포가 있으리라 하며 검거 이유는 말할 수 없으나 조 경무부장이 14일 귀임하므로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13일 수도경찰청 발표에 의하면 남로당 간부 허헌 이하와 3단체 간부는 범죄 사실이 판명되었으므로 지명 수배 중이라 하며 일반이 상상하고 있는 바와 같은 예비 검속은 아니라고 한다. 13일 정오 현재 지명 수배자 중 약 60명가량이 검거되었고 아직 미체포자의 수효는 약 10명가량 된다 하며 그 외의 검거자는 이번 지명 수배와는 관계가 없고 삐라 기타 다른 관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한 상세한 발표는 근일 안으로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8월 13일~15일)

"예비 검속 아니다-2, 3일 후 진상 발표-좌익 요인 검거 후문"

좌익 계열의 검거 선풍에 대하여 수도경찰청 당국은 일체 언급을 피하고 있는데 13일 기자단과 만난 장택상 총감은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사건에 대하여서는 일체 말하지 못하겠다. 2, 3일후 진상을 발표하겠다. 예비 검속이라는 것은 현 경찰에는 없다. 이번 검거는 정확한 범죄 사실이 확인되어 검거한 것이다. 지명수배 중의 인물은 거의 체포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14일)

"허헌 노동당위원장 등 좌익간부 또 검거"

좌익 계열의 검거 선풍으로 인하여 지명수배중의 인물은 속속 검거되고 있는데 13일 밤에는 시내 모처에서 피신중인 남조선노동당 허헌 위원장이 종로서원에게 체포되는 한편 김기성 김태준 김오성 이인동 등도 경찰에 체포되었다는데 나머지 수배인물도 체포코저 경찰에서 맹활동 중이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15일)

좌익 인사 수백 명을 일제히 검거하러 나서면서 "예비 검속이 아니"라는 주장만 거듭할 뿐, 혐의를 밝히지 않고 있다. 8월 18일 조병옥 경무부장의 담화문에서 이 검거 사태가 비로소 언급되었는데, "사전 사찰 경계를 엄밀히 실시한 결과 민전 남로당 전 민청 등등의 소속원의 주모 주동으로 인한 8·15를 기한 대규모의 경찰관서 및 일반 관공서 습격 경찰관 살해 기타 폭동 음모 사건 24건을 검거 적발하는 등 파괴적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만전을 기한 바"라 했을 뿐이다.(<서울신문> 1947년 8월 19일) 바로 이런 것이 '예비 검속' 아닌가? 같은 날 장택상의 기자회견에서는 이런 문답이 있었다.

(문) 좌익 측 요인의 검거 이유는?
(답) 방송국을 이용하여 남조선 적화 음모와 8월 15일을 기하여 경기 일대를 폭동화시키며 미군정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발각된 데 기인함으로 일체의 검거가 끝나기 전에는 진상 발표가 안 된다. 세상에서 떠드는 예비 검속은 아니다. 삐라 또는 행정범 검거는 석방되고 치안관에게 회부되었다. 방송국과 경기 폭동 관계는 진상을 추후로 발표할 예정이다.

(문) 지명 수배자는 전부 검거되었는가?
(답) 아직 다 안 됐다. 계속 수사 중에 있다.

(문) 허헌 씨도 체포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답) 그에 대하여는 말할 수 없다.

(문) 이번 테러검거 건수는?
(답) 6건에 수십 명인데 소속 단체가 판명된 것도 있고 아직 안 된 것도 있으므로 계속 조사 중이다. (<서울신문> 1947년 8월 19일)

지난 가을 소요 사태에서 경찰의 문제점이 널리 드러나 미군정 간부들에게도 비판을 받으면서 얼마 동안은 경찰이 다소 고개를 숙이고 지냈다. 특히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청장의 경질이 경찰 개혁의 출발점으로 꾸준히 거론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질을 조건으로 민정장관직을 수락했던 안재홍조차 "그것도 (1947년) 5월 중순 이후 전연 단념하였다."고 탄식하기에 이르렀다(<민세 안재홍 선집 2>, 281쪽)

1947년 8월까지는 경찰의 위세가 고스란히 되살아나 있었다. 8월 6일자 일기에서 이야기한 방송국 사건이 위 장택상의 기자회견에서도 예비 검속의 빌미로 거론되는데, 아무 알맹이도 없는 사건이다. 방송국 직원 전원을 남로당에 포섭해 방송을 적화 선전에 쓰려 했다? 방송국에는 허수아비만 근무하나? 소설도 아니라 하급 만화 수준이다.

8월 9일 조병옥의 기자회견 발언은 그 시점 경찰의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형사 사건에 있어 언론인도 일반과 같이 증거를 없애고 도피할 염려가 없는 경우 이외는 불구속 취조는 허용되지 않는다. 도대체 몇몇 신문에 대해서는 더 동정할 여지가 없다. 태양당이니 보성사니 하는 테러에 대해서 왁자 떠들면서 하곡수집을 독려하러 나간 사람들을 작당 습격하는 악질 파괴 행동에 대해서는 왜 한 마디도 없는가? 남조선을 파괴하려는 행동을 선동하는 보도에 대해서 발본적 처단이 내릴 때가 올 것이다. 신문지법이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신문지법이 아직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보며 또 적용하도록 할 용의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일간 사법당국에서도 성명이 발표될 것이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8월 10일)

왜 극우 테러만 보도하고 경찰이 발표하는 "악질 파괴행동"은 보도하지 않느냐며 기자들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잦은 언론인 체포에 항의하는 기자들에게 '신문지법'을 들이대고 있다. '신문지법'이 어떤 법인가? 통감부 시절인 1907년 제정되어 일제시대 내내 언론탄압의 무기로 활용된 '식민지법'이다. 이 법은 1952년에야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해방이 되고도 7년이나 더 버틴 것은 조병옥 같은 자들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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