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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타령하는 정치인들아, 헌책방을 뒤져라!

[철학자의 서재] <칼 마르크스 전기>

몇 해 전부터 한국 정치권을 달구고 있는 주제는 복지다. 시작은 초·중등학교 급식 문제였다. 진보 교육계가 무상 급식을 주장, 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은 게 발단이었다. 재벌 위주의 성장 정책에만 빠져있던 당시 한나라당은 소위 선별적 무상 급식을 곧바로 들고 나왔다. 서민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것이다.

우리도 복지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며 아이디어를 낸 게 소위 '선별적' 무상 급식, '선별적' 복지다. 그러자 보수 언론, 정부, 제도권 학자 너 나 할 것 없이 한나라당 옹호 논리를 폈다. 야당의 보편적 복지는 무책임한 주장이다, 부자 아이들에게까지 공짜 밥을 주는 건 국고 낭비 아니냐, 서민의 세금 부담이 엄청나게 는다, 무차별적 무상 급식론, 보편적 복지 주장은 포퓰리즘이다, 그리스가 그러다 망하지 않았느냐 등등.

하지만 보궐 선거와 총선 등 연이은 선거 앞에서 새누리당도 슬쩍 슬로건을 바꾼다. 대선을 눈앞에 둔 지금,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 민주화와 전 국민 대상 맞춤형 복지를 1순위 공약으로 내걸기에 이른다. 당의 존재 기반과 맞지 않는 주장이다.

어쨌든 이런 몇 해의 논쟁을 거치면서 이상한 논리가 자리 잡는다. 보편적 복지는 진보, 선별적(맞춤형) 복지는 보수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보다 큰 복지, 보다 일반적인 복지를 주장하면 곧 진보가 되는 것이다. 보수당과 보수 언론은 물론 진보 개혁 정치권도 같은 논법을 사용한다. 과연 그런 건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사회 복지는 19세기 말 프러시아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제도다. 강력한 군국주의 독일(독일 제국)을 건설한 그는 토지 귀족인 융커 출신으로 대자본가와 융커의 입장을 대변했다. 별칭이 말해주듯,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거부했고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에 대해서는 무차별적 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그가 187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노동자 계급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자 급기야 이들을 달래기 위해 1881년 노동자 보험에 관한 법안을 내놓은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사회 복지는 노동자의 질병, 재해, 실업은 물론 노령 및 당시 사회 문제인 폐질환까지를 아우르는 정책이었다. 오늘날 일반화된 용어인 '사회 정책'이란 말도 당시 신역사학파라 불리던 관변학자들이 내놓은 노동자 유화책에서 비롯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의회 민주주의자들, 특히 신흥 부르주아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배제한 채 융커와 대자본가의 이해를 유지할 방법으로 노동자 계급에 대한 회유책인 복지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도 이에 호응했다. 당시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라살(Lassalle) 파와 리프크네히트(Liebknecht) 파의 합작이었다.

마르크스의 입장을 이어받은 리프크네히트 파와는 달리 나름대로 큰 세력을 점하고 있던 라살 파가 특히 비스마르크의 사회 정책에 부화뇌동했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사회주의자요 국가주의자였던 라살은 살아있을 때 여러 차례 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을 한다.

복지가 잘 된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복지론자들은 종종 서유럽 복지 국가를 예찬한다. 실제로 1950년대부터 소위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직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 유럽은 복지 천국이었다. 대부분 국가가 사회민주당 집권 시기였고, 보수당조차도 복지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물론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것도 이때다.

비스마르크 집권 당시 카를 마르크스((1818~1883년)는 살아있었다. 마르크스는 라살이나 그 추종자들과 관계를 단절하진 않지만 그들의 태도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제기한다. 대표적인 글이 '고타 강령 비판'이다. 착취의 근원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그대로 둔 채 국가에 기대어 재분배만을 꾀하는 이들의 태도는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요 공산주의 운동의 포기였기 때문이다. 오늘에 비하자면 삼성의 지배, 다국적 금융 자본의 지배는 그대로 둔 채 복지 혜택을 좀 늘려보자는 모순적이고 기이한 논리에 다름 아니다.

비스마르크 시절 독일의 경제 부흥과 사회 복지의 이면에는 독일 제국의 식민지 확대와 침탈이 있었다. 노동자 복지의 또 다른 원조인 영국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전 세계에 식민지가 있었고 바로 그 식민지로부터의 부의 이전에 힘입어 노동자 복지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유럽의 사회 복지도 일정 부분 마찬가지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이런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위대한 영국 차티스트 운동의 후예들이 약간의 소득과 복지 향상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한다. 착취의 근원인 생산관계의 변혁에 눈을 감고 식민지 착취의 현실을 애써 무시하는 일탈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론적 창시자이며 동시에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한 운동가다. 무수한 저작을 내놓고 동지들과 거의 매일 서한을 주고받으며 각종 언론 기고를 쉬지 않고 이어나간 이유도 다름 아닌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과 당시 싹트던 독·영·불의 노동자 운동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한 것이었다.

1848년 혁명, 1864년의 제1인터내셔널, 1871년의 파리코뮌에 헌신적으로 관여하였다. 기나긴 반동의 시기에는 경제학 연구에 몰두한다. 그러는 중에도 쉬지 않고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바쿠닌주의(모험주의 내지 공상주의)와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살 파, 프루동 파, 영국의 조합주의 등 수정주의 경향, 개량주의 경향에 맞서 싸운다.

이런 생생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은 없을까. 누구나 조금씩은 알고 또 그 누구도 정확히 모르는 마르크스의 모습을 당시의 역사 맥락 속에서 좀 더 온전한 형태로 알 방법은 없을까. 이런 궁금증에 주저 없이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다름 아닌 <칼 마르크스 전기(Karl Marx Biographie)>(1984년)다.

▲ <칼 마르크스 전기>(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지음, 김라합 옮김, 소나무 펴냄). ⓒ소나무
이 책은 본래 1968년, 당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가 만들어냈다. P. N. 페도세예프를 대표로 14명의 학자가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1973년에 수정판이 나오고 이 책이 독어로 번역되었다. 국내에는 1984년에 나온 독어본 제7판을 김라합이 번역해 소나무출판사에서 내놓았다.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 서점을 뒤져야 어렵게 구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책보다도 귀중한 책이다.

엥겔스와 레닌은 마르크스 사상을 영국 정치경제학과 프랑스 공산주의 그리고 독일 철학의 통일체로 묘사한다. 그리고 여타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달리 역사의 변화 및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때 그때의 발전 단계와 국가적 특수성에 맞는 사회주의 운동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 마르크스를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창시자로 규정한다.

이 책을 보면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당대 유럽의 역사 현실을 얼마나 충실히 추적하였는지 그리고 프랑스, 영국, 독일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및 신대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자본주의 발전 정도와 노동자 농민 계급의 상태, 사상적 문화적 동향 등을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하였는지 잘 드러난다. '과학적' 공산주의자란 말이 한낱 과장된 치사가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마르크스 전기가 있다. 우리말 번역본도 다수다. 하지만 대부분이 제한된 자료에 근거하여 마르크스의 일면만을 부각하거나 희화화하고 있다. 반면 이 책은 당시까지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전집, 단행본, 초록, 수고, 서한, 조직의 회의록, 동시대인 진술 등)에 근거하여 마르크스의 삶과 투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존 롤스는 <정치철학사 강의>(2007년)에서 자신이 마르크스를 비롯한 고전 사상가를 공부할 때 염두에 둔 두 원칙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언제나 그 사상가의 입장에 서서 그가 보듯 문제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사상가의 사상을 가장 훌륭한 모습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한 이론에 대해 판단하려면 먼저 그 이론을 최선의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자, 혹은 마르크스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자 모두가 명심해야 할 명언이다. 이 책은 최선의 모습으로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그린 책이다.

마르크스는 20대 중반인 1844년 파리 체류기에 이미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런 그가 1846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철학 논쟁서를 저술한다. 대표적 저술이 <헤겔 법철학 비판>, <경제학-철학 수고>, <신성가족>, <독일 이데올로기>, <철학의 빈곤> 등이다. <마르크스 전기>의 매력은 사회주의 운동에 그토록 바쁜(?) 마르크스가 시간을 쪼개 이 글들을 써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한 마디로 독일, 프랑스 이론가들(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헤겔 좌파, 칼 그륀 유의 진정 사회주의자, 프루동 등)이 사회주의 운동을 오도하는 현실적 절박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공산당 선언>(1848년), 프랑스 혁명 3부작, <안티 뒤링>, 경제학 제 저작은 물론이고, 그동안 별로 부각되지 못했던 '독일 공산당의 요구'(1848년)를 비롯해 <신라인 신문>을 포함한 수많은 언론 매체 기고문, 노동자동맹과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활동 기록, '고타 강령 비판'을 비롯한 만년의 글 등이 그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무엇보다도 어떤 운동의 맥락에서 또 어떤 절박한 이유에서 쓰게 되었는지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마르크스 관련 지식들, 개별 저작의 내용을 마르크스의 삶과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적 맥락에서 하나로 꿰어준다.

그는 결코 교조주의자가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었고, 유연한 인물이었다. 정치활동을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바쿠닌주의에 맞서서 사회주의 교두보로서 의회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미 개량주의로 기운 영국 노동 운동의 지도자들, 모험주의의 한계를 드러낸 프랑스 블랑키주의자들, 그리고 라살 파의 이론가들과도 마지막까지 혼신의 노력을 쏟아 그들이 올바른 방향 정립을 하도록 비판하며 교류하고 또 지원한다.

마르크스는 각국의 특수성에 맞는 노선상의 유연함을 유지하면서도 한 가지 원칙, 즉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주도권 및 자본제적 생산관계의 극복이라는 원칙만은 마지막까지 고수한다. 반면 의원 선거 참여를 현실 타협이라며 비판하던 바쿠닌주의자, 프루동주의자들은 결국 사적 소유의 폐지, 자본제적 생산양식의 타파라는 사회주의 운동의 기본 원칙에서 후퇴하고 만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가들의 필독서 중에 다니엘 모르네의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 전야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삐라, 유인물, 대자보, 신문 등이 있었는지, 그리고 이 인쇄물들이 어떤 폭발적 위력을 발휘했는지 잘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기 <이스크라>를 비롯한 수많은 지하 신문과 유인물이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마르크스 전기>의 또 다른 매력은 같은 맥락에서 언론가로 활동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어디를 가든, 어떤 일을 시작하든, 신문과 기관지 제작부터 했다. 신문 편집자로서 또 기고가로서 그가 독일, 프랑스, 영국의 언론, 심지어 미국의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까지 평생 기고한 글이 얼마나 방대하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 전기가 잘 소개하고 있다.

에드워드 핼릿 카의 <바쿠닌 전기>(이태규 옮김, 이매진 펴냄)는 마르크스의 미국 신문 기고를 비꼰다. 단순한 돈벌이 목적이었고 심지어는 많은 글이 엥겔스 대필이라고. 그뿐이 아니다. 카는 바쿠닌과 마르크스의 갈등까지도 개인적 증오의 산물로 그리고 러시아인 바쿠닌과 독일인 마르크스의 민족적 갈등으로 그린다.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바쿠닌 전기>에서의 마르크스 묘사나 트리스트럼 헌트의 <엥겔스 평전>(이광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에서의 마르크스, 엥겔스에 대한 희극적 묘사는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나 비판을 위해서도 좋은 접근이 아니다. 나는 롤스의 고전 독법에 동의한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해야만 그를 비판할 수 있다. 내가 이 <마르크스 전기>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마르크스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이 엄청난 공부벌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 이상이었다. 영국과 미국에 관한 기사나 글을 쓸 때면 양국 정부의 문서와 통계를 다 섭렵하곤 했다. <경제학-철학 수고>를 집필할 당시다. 글을 쓰다가 잡지 <이코노미스트>에 소개된 제임스 머클래튼의 저작 <통화의 역사 개요(A Sketch of the History of the Currency)> 출판 소식을 접한다. 그는 수고 집필을 잠시 멈춘다. "그 책을 읽지 않고 작업을 계속하는 것을 자신의 이론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 희랍과 라틴의 고전에서부터 당대에 이르는 모든 주요 서적을 독파한다.

영어, 불어를 익혀 그가 읽은 당대 영·불·독의 경제학, 철학, 역사학, 자연과학 서적 목록 양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만년에는 러시아 어를 읽혀 쳬르니셰프스키 전집 3권을 독파한다. 본 책마다 빈칸에 적어놓은 메모와 평의 주요 면면, 1만6000통에 달하는 마르크스, 엥겔스 착발 서한, 관련 서한의 주요 내용도 <마르크스 전기>는 소개한다. 마르크스(주의) 연구가나 학습가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전기다. 인터넷 중고 서점을 뒤지면 890쪽에 달하는 독일어 원서도 싼 값에 구할 수 있다. 책에 실린 120여 장의 사진도 눈여겨 볼 만하다.

다시 복지 얘기로 돌아가 보자. 복지는 사회 발전의 중요한 지표다. 분당 이전의 민주노동당이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무상 보육을 주장한 것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철권 독재자 비스마르크가 노동자 회유책으로 복지를 폈다고 해서 복지가 잘못이라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사실 서구에서 일종의 사회권으로 복지 확대를 이룬 것은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자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마르크스 전기>를 읽으며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을 되새긴다. 경제를 바꾸지 않고 복지만을 주장하는 것은 오류다. 착취의 근원인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변혁에 대한 입장이 없는 복지론은 진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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