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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람시의 진짜 얼굴을 몰랐다!

[장석준의 '적록 서재'] 그람시의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 이 사람만큼 다양한 얼굴로 해석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이른바 민주 진보 연립 정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를 들먹이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이들도 그를 추앙한다. 현실에서 전혀 화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서로 다른 정치 노선에 선 사람들이 저마다 다 그람시를 전거로 내세운다.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다.

가령 1970년대에 그람시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바깥에서 주목받기 시작할 때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가장 앞장선 것은 영국의 에릭 홉스봄 같은 유로코뮤니스트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당원 수 200만 명을 자랑하고 30퍼센트 이상의 득표율로 주요 지방자치단체 여당 자리를 석권한 이탈리아 공산당을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좌파가 따라 배워야 할 모범으로 치켜세웠다. 이들이 보기에 이 당의 성공을 뒷받침한 이론가가 바로 그람시였다. 즉, 이들에게 그람시는 유로코뮤니즘의 창시자였다.

하지만 그람시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은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견강부회에 불과했다. 홉스봄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저명한 좌파 이론가이며 역사학자인 페리 앤더슨이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앤더슨은 자신이 편집을 맡은 잡지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에 작심하고 발표한 정말 긴 논문('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율배반',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갈무리 펴냄, 1995년))에서 '유로코뮤니스트 그람시'의 이미지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그람시는 분명 이 땅에 살다 간 '한' 사람이었는데, 홉스봄의 그람시가 다르고 앤더슨의 그람시가 또 다른 것이다. 한편에는 혁명 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간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로코뮤니즘 선구자 그람시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부르주아 지배 체제에 흡수되기 십상이라고 경고하는 그람시가 있다. 누구나 과거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정도가 좀 심하다. 이게 그람시란 사상가를 둘러싼 전 세계적 상황이다.

사실 그람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물론 그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람시 사상의 정전(正典) 역할을 하는 저작이 <옥중수고>(<그람시의 옥중수고>(전2권, 이상훈 옮김, 거름 펴냄, 1999년)인데, 이 책은 그가 감옥에서 공책에 적은 메모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출판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도 아닌 메모들이다. 아마 그 자신도 몇 년 뒤에 다시 봤으면 뭘 생각하고 쓴 것인지 알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파시스트 체제의 감옥 안에서 썼기 때문에 검열을 의식해서 암호를 사용하거나 애써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독자가 읽기에 부적합한 물건이다.

암호는 해독되기 나름이다. 메모는 이어붙이기 나름이다. 따라서 암호로 채워진 이 메모 다발은 요란한 해석의 전투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람시 읽기의 근본적 난점이다.

<옥중수고> 이전의 글들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옥중수고> 너머로 확장해보면 된다. 그람시는 감옥에 갇히기 전에도 상당한 분량의 글들을 남겼다. 그 중 다수는 좌파 정당 활동가로서 당 기관지나 좌파 신문에 남긴 논설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분량의 문예 비평도 남아 있다.

투옥되기 전에 쓴 글들은 <옥중수고>를 손에 든 독자들을 숨 막히게 하는 새롭고 낯선 개념어들의 중구난방 실험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글들은 당원이나 노동조합원을 독자로 하여, 아주 구체적인 정치 쟁점들을 간명하게 다루고 있다. 좌파 정당의 젊은 지도자이자 무솔리니 집권 초기에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의 문제의식이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옥중수고> 이전 논고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옥중수고>의 어지러운 숲 속을 헤쳐 나갈 지도와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옥중수고> 이전 글들의 명료한 언어를 통해 투옥 이전 그람시의 고민을 날것으로 확인한 뒤에 <옥중수고>로 뛰어들면 뭔가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저런 해석가의 그람시 말고 감옥 밖 숙제를 감방에 끌고 들어와 씨름하는 그 사람이 점점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그람시를 읽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1990년대에 한국에도 적지 않은 수의 그람시 소개서나 연구서가 소개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옥중수고> 이전의 그람시는 <옥중수고>의 전사(前史) 정도로 간략히 언급될 뿐이었다. 더 나아가, 마치 알튀세 학파가 초기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 사이의 '단절'을 이야기하듯이, 초기 그람시(공장평의회 운동 시기)와 후기 그람시(<옥중수고> 시기)를 나눠 둘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다루는 책들도 많았다.

이에 대한 불만 때문에 나는 2000년대 벽두에 지금 진보신당 녹색위원장으로 있는 김현우와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갈무리 펴냄, 2001년, 이하 <옥중수고 이전>)이라는 책을 번역했다. 영국의 그람시 연구자 리처드 벨라미가 투옥 이전의 정치적 논설들을 골라 모아 놓은 선집이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이 책의 번역에 뛰어든 것은 만용이었다. 그람시 정도의 거장의 저작을 번역하는 일은 아무나 손대서 될 게 아니었다. 더구나 우리는 이탈리아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영어본을 중역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감히 번역에 나섰다. 그만큼 <옥중수고> 이전 글들을 소개하는 게 그람시의 이해에 급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번역 과정에서 이를 더욱더 절감했다. 그람시가 20대 초부터 쓴 짧은 글 한 편 한 편을 세밀히 읽고 우리말로 옮길 때마다 계속 <옥중수고>의 난해한 공식들, 그람시 사상의 전체상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특히 번역자들이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남부 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이란 글을 강독할 때는 어떤 개안(開眼)의 환희에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이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논했던 그람시와 <옥중수고>는 모두 허깨비에 불과했다는 느낌이었다.

<옥중수고 이전>이 나온 지 3년 뒤에 한국의 독자들은 바로 이 글 '남부 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을 더 정확한 우리말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김종법이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책세상 펴냄, 2004년, 이하 <남부 문제>)라는 제목의 작은 선집을 낸 것이다. 이 책은 <옥중수고> 이전 그람시의 글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요령 있게 모아놓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영어본을 통한 중역이 아니라 이탈리아 원전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그람시의 정치 저작 중에서 이탈리아 원전으로부터 직접 우리말로 번역한 책은 이것이 유일하다. 비록 얇은 문고판 선집이지만, 한국의 그람시 소개·연구사에서 한 획을 그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남부 문제, 이탈리아 자본주의 그 자체

▲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흔히 그람시 일생에서 최초로 주목받은 논설로 꼽는 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지 두 달 뒤에 발표한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이다(이 글은 <남부 문제>에는 없고 <옥중수고 이전>에 실려 있다). 이 글의 발단은 이탈리아 사회당 내의 참전 논란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전쟁 초기에 이탈리아 정부가 중립을 선언하는 바람에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프랑스 사회당과는 달리 전쟁 찬반 문제로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나라 좌파 정당보다 더 원칙적이어서 전쟁 지지의 오명에서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라 그냥 상황 덕분이었다.

그런데 당의 저명한 좌파 논객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른바 '효과적인 중립'론을 들고 나오면서 파란이 일어났다. '중립'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참전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무솔리니는 당을 떠나게 되고, 결국 파시스트당의 두목이 된다. 아무튼 그람시의 글은 무솔리니가 불러일으킨 사회당 내 참전 논란에 대한 논평이었다.

그런데 이 글에는 전쟁 문제라는 본 주제 외에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그것은 글 첫머리에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이탈리아 역사의 현재 국면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의 역할(나는 프롤레타리아트사회주의 일반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에너지를 바치고 있는 사회당은 이탈리아의 사회당, 즉 인터내셔널을 위해 이탈리아 국가를 장악해야 할 과제를 떠맡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그 지부이기 때문이다. 이 직접적 과제, 이 일상적 과제는 당에게 특수한, 국민적 성격들을 부여하며 이탈리아의 생활 속에서 특수한 역할, 독특한 책임을 떠맡도록 한다." (<옥중수고 이전>, 63~64쪽. 강조는 원저자)

이 인용문에서 젊은 그람시는 '이탈리아'라는 말을 몇 차례나 이탤릭체로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이탈리아 사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 실천 과제를 끌어내는 일을 중요시했다. 그람시가 세상에 말문을 연 첫 번째 글의 서두에서 이 과업을 힘주어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3세의 청년 사상가가 자신 평생의 과제를 선포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는 혁명 일보직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특히 그람시가 활동하던 공업 도시 토리노에서는 피아트(Fiat)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공장 평의회 운동이 불붙었다. 1920년 여름, 한창 점거 파업을 벌이던 피아트의 공장 평의회는 경영진 없이 자동차를 생산하는 초유의 실험을 펼쳤다. 당시 <새 질서(L'Ordine Nuovo)>라는 사회주의 신문을 발간하던 그람시와 그의 젊은 동지들이 이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이를 통해 일약 이탈리아 좌파의 새 지도자군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1년 뒤, 사회당의 리보르노 당 대회를 앞두고 그람시는 <새 질서>에 논설 하나를 발표했다. 이것이 <남부 문제>에 수록된 '리보르노 전당 대회'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그람시는 이탈리아 자본주의가 남부 농촌 지역에 대한 북부 도시들의 수탈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거대한 대중 투쟁이 성과 없이 끝난 게 불과 몇 달 전인 상황에서 사회당이 당 대회를 통해 확인해야 할 도전 과제가 바로 이 문제임을 그람시는 강조한다.

사실 이탈리아 남부 농업 지대의 저발전에 대해서는 그람시 이전에도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남부 문제'는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람시는 이것을 단순히 남부만의 문제로 따로 떼서 바라보지 않았다. 이것이 남부 문제를 강조한 다른 이들과 그람시 사이의 차이였다.

그람시는 남부 문제를 북부와 남부 사이의 불균등 결합 발전의 문제로 보았다. 즉, 북부의 발전이 남부의 저발전에 바탕을 두고 이뤄졌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남부 문제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와는 별개로 존재하거나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러 모순들 중 단지 하나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탈리아'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발전 노선을 좇아 권력을 획득했다.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농촌을 산업 도시에 예속시키고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를 북부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탈리아 부르주아 국가에서 도시와 농촌 간의 문제는 단순히 대규모 산업 도시와 같은 지역과 그 도시에 직접 예속된 농촌 사이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국가 안에서의 한 지역과, 이 지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채 세부적인 특징에 있어서 구별되는 다른 모습을 가진 지역 간의 문제를 함께 나타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를 통해 지배와 착취를 수행한다. 즉,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직접 작용하고, 국가 안에서는 가난한 농민들과 반프롤레타리아들로 구성된 이탈리아 노동 민중을 포함해 보다 광범위한 계층들에 작용한다. 분명한 것은 산업 노동 계급이 자본가들과 은행가들의 손아귀에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쟁취할 때에만 이탈리아의 국민적 삶의 중심 문제, 즉 남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부 문제>, 43쪽)

그람시는 북부의 자본가, 은행가들과 남부 농업 블록의 반동적 지배층 사이의 동맹이 이탈리아 지배 체제의 중심 기둥이라 보았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배 세력들 사이의 동맹은 남부 문제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북부 산업 노동자 계급과 남부 농민이 이 동맹의 하위 구성 요소로 포섭될 때에만 남부 문제는 완성된다. 달리 말해, 대중이 지배 체제에 '끼워 맞춰져야만' 지배는 최종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그랬다. 북부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남부 농민들에 대한 북부 자본가 계급의 수탈 덕분에 안정된 일자리와 임금 수준을 유지하는 셈이었다. 레조 에밀리아 같은 북부 공업 지대에 뿌리를 둔 사회당 및 노동조합 내부의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문제에 애써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북부 제조업 호황의 이득을 나누는 데 골몰하는 것을 방조하거나 거들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남부 농민들은 북부 노동자들을 '노동 귀족'으로 질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의 분열이 지배 체제의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데 화룡정점 역할을 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주의 운동의 단절적 자기 혁신이 필요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이제까지 개혁주의자들은 대중의 분열을 극복하기는커녕 그것이 작동하는 데 부속품 역할을 해왔다. 반면 새 시대 사회주의 운동은 무엇보다도 북부 산업 노동자 계급과 남부 농민들 사이의 동맹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심장에 육박해 들어가는 도전이다.

"리보르노에서 있을 공산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 사이의 단절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혁명적 산업 노동 계급은 국가 기생주의 안에서 타락해버린 사회주의의 경향들과 절연할 것이다. 혁명적 산업 노동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귀족주의를 창조하기 위해 남부에 대한 북부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경향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귀족 정치란, 부르주아 보호 무역주의 관세 제도에 밀착해 협동조합적인 보호 무역주의를 수립했으며 노동 대중 대부분의 지원으로 노동 계급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국가의 다른 생산력에 대한 산업 및 금융 자본주의 지배의 합법적인 형태다.

(…) 노동자 해방은 오직 북부의 산업 노동자들과 남부의 가난한 농민들의 연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이 연합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를 분쇄할 것이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며, 농업에 필요한 산업 생산의 새로운 제도를 건설할 것이고, 이탈리아의 후진적 농업을 산업화하고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될 산업 생산의 새로운 기구를 건설할 것이다." (<남부 문제>, 43~44쪽)


'역사적 블록' : 그람시의 분석의 목표이자 실천의 출발점

리보르노 당 대회에서 사회당은 결국 둘로 쪼개졌다.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당 내 좌파들은 공산당을 새로 만들었다. 그람시도 새 당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1924년부터는 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람시는 1926년 파시스트 정부에 검거돼 이후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해야했다.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은 1926년 투옥되기 직전에 쓴 글이다. 그람시의 체포로 인해 이 글은 4년 뒤에야 공산당의 망명 기관지에 발표되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옥중수고> 이전에 쓴 논설들 중 마지막이자 <옥중수고>의 사색이 시작될 시점의 그람시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수고(手稿)다. 이 글이야말로 <옥중수고>의 난삽한 원고 더미를 실로 꿰어주는 역할을 하는 서문이다.

이 글에서 그람시는 남부 문제를 다시 한 번 그리고 더 정교하게 다룬다. 그 요지는 리보르노 당 대회 시기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다만 남부 문제가 작동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한 분석이 더욱 상세해졌다. 이 분석은 '국가-시민사회', '헤게모니', '전통적 지식인-유기적 지식인', '수동 혁명', '기동전-진지전' 같은 <옥중수고>의 개념어들을 예시하는 착상들로 가득하다. 감옥 안 그람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게 미발표 원고인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의 내용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리보르노 당 대회를 앞둔 그람시가 북부의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남부 문제의 작동에 한 몫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면,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에서는 남부 지식인들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람시가 보기에 남부의 주류 지식인들은 반동 지주층과 교회를 중심으로 한 남부 농업 블록이 지탱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때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남부 출신 지식인 베네데토 크로체도 이런 관점에서 매섭게 비판한다.

"남부에서는 농업 블록 위에서, 지금까지 농업 블록의 균열이 너무 위태로워지거나 블록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는 상황을 예방하는 데 실제적으로 봉사해온 지식인 블록이 작용하고 있다. (주스티노) 포르투타토와 크로체가 이러한 지식인 블록의 대표자들이며, 따라서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발한 반동적 인물들이라고 여겨진다.

(…) 이러한 의미에서 크로체는 매우 중요한 '국민적' 기능을 완수했다. 그는 남부의 급진적 지식인들을 농민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들이 국민적이고 유럽적인 문화에 참여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문화를 통해 이 지식인들이 국민적 부르주아 계급에 그리고 결국 농업 블록에 동화될 수 있게 만들었다." (<남부 문제>, 98~100쪽)


그만큼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지식인'이란 크로체 같은 대학자만 지칭하는 게 아니다. 크로체 식의 사고가 대중에게 스며들어 일상의 관계들에 시멘트 역할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그람시가 말하는 '지식인', 후에 <옥중수고>에서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이들이다. 이들의 일상의 고투가 없다면, 지배 블록에는 금세 금이 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람시는 노동자 계급과 농민 사이의 동맹에 대한 고민도 지식인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 동맹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부 농민들 내부에서 성장한 새로운 지식인 집단이 북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대변자들과 만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목한 게 <자유주의 혁명>이라는 저널을 통해 남부 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주창하던, 그람시와 동년배이자 남부 출신 지식인인 피에로 고베티와 그 주위의 그룹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당 동지한테서 <자유주의 혁명>의 사상적 조류에 맞서 투쟁하지 않았다고 비난받곤 했다. (…) 우리가 고베티에게 대항해 싸울 수 없었던 것은, 적어도 그가 운동의 주요 노선에 있어서만큼은 반대해서는 안 될 운동을 지향하고 대변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식인 문제와, 지식인들이 계급 투쟁에서 지향하는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베티는 실제로 우리를 다음과 같은 계층들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 그는 북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남부 문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좀 더 총체적인 연결을 통해 전통적 다른 영역 위에 남부 문제를 상정했던 일련의 남부 지식인들과 우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남부 문제>, 102~103쪽)

안타깝게도 고베티 역시 그람시와 마찬가지로 무솔리니 정권과의 투쟁 과정에서 순교했다. 하지만 그람시의 기대대로 이들 그룹('행동당'으로 발전한다)은 이후 반파시즘 투쟁에서 공산당과 더불어 양대 축 역할을 한다.

아무튼 그람시가 바라본 남부 문제의 전체상이 이러했다. 이 그림은 역사 유물론의 전통적 도식인 '토대/상부 구조' 틀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남부 문제는 '토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탈리아 자본주의에 덧씌워진 '상부 구조'의 문제도 아니다. 흔히 그람시를 '상부 구조'의 사상가라고 하는데, 남부 문제와 대결한 그람시는 결코 '상부 구조'만을 강조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옥중수고> 시기의 그람시는 '토대와 상부 구조의 통일'로서, 사회를 이들이 통일된 구체적 양상으로 파악한다는 요청으로서 '역사적 블록(historic bloc)' 개념을 제시한다. 이후 <옥중수고>의 해석가들은 '시민 사회', '헤게모니', '진지전' 등의 개념에 비해 '역사적 블록' 개념을 상대적으로 가볍게만 다루곤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었다.

그람시는, 굳이 말하면, '역사적 블록'의 사상가였다. 나머지 개념 실험들은 모두 다 '역사적 블록'의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 요소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람시에게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유기적 지식인들의 과제는 우선 자신이 속한 사회를 '역사적 블록'으로서 포착하는 일이었다. 즉, 한 사회가 지구 자본주의에 끼워 맞춰져 있는 특정한 조건에 바탕을 두고 다시 그 사회의 대중이 자본의 운동에 끼워 맞춰지는 구체적 양상(=역사적 블록)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자본'의 추상적 운동을 파악하는 데서 더 나아가 '사회'가 이에 결합되어 있는 양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간파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이 분석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헤게모니', '유기적 지식인', '수동혁명' 등의 개념들이었다. 역사적 블록에 끊임없이 응집성을 부여하는 힘이 곧 '헤게모니'다. 그리고 일상의 노동을 통해 이 헤게모니가 지속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세력이 곧 지배 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들이다. 혁명적 위기 상황에서는 이런 유기적 지식인들의 활동이 대중의 혁명적 분출을 다시 지배 체제에 끼워 맞추는 '수동혁명'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역사적 블록'의 탄생

그럼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기존 '역사적 블록'의 타파와 새로운 건설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람시에게 이 길의 출발점만큼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것은 자본의 지배에 대중의 생활이 끼워 맞춰진 바로 그 지점에서 대중들 스스로(적어도 그 중요한 일부가) 이제까지의 관성을 과감히 거부하는 것이다. '역사적 블록'의 중심에 위치한 대중 내부의 분열 및 포섭의 지점에서 이러한 외침이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하지 않겠어!"

그래서 1920년 토리노 파업 당시 조반니 졸리티 총리의 자유주의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과감한 양보 조치(임금 대폭 인상에 노동 시간 단축, 게다가 경영 참여 권한까지!)를 제시했을 때, <새 질서>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이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졸리티 정부의 제안은 결국 토리노의 투쟁과 동시에 들끓던 남부의 민심은 짓밟으면서 반면 북부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북부 자본의 지불 능력으로 포섭해보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실제로 피아트의 숙련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 계급조합주의는 승리를 거두겠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와 안내자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더 빈곤한 노동자 대중에게 특권 계급으로 보일 것이며, 농민 대중에게도 부르주아와 같은 수준에 있는 착취자로 인식될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언제나 그랬듯이 농민 대중에게, 그들의 고통과 비참한 빈곤의 유일한 원인으로 여겨질 핵심적 특권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를 소개하려 들 것이다." (<남부 문제>, 86~87쪽)

그렇다. 처음에는 어떤 집단적 '행위'가 필요하다(<파우스트>). 1920년의 이탈리아 상황에서 그런 '행위'란 곧 북부의 노동자들이 남부의 수탈과 결합된 일체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새로운 '역사적 블록'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유기적 지식인들이 여기에 달려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 원초적 '행위'를 해석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며 이를 확산시켜야 한다. 그럼 이제 이 '행위'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사회관계들의 원형이자 지속적 참조점이 된다. 이러한 반복과 확산의 과정이 곧 대항헤게모니의 형성 과정이며, '진지전'이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지적, 도덕적'이란 수식어를 즐겨 사용했다. 이 용법에 따른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지배 대중 측의 '지적, 도덕적' 행위다. 그런데 여기에서 '도덕적'이란 말이 막연한 윤리적 행위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기존 '역사적 블록'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판단을 바탕으로, 대중의 분열과 포섭을 낳는 그 사회관계들을 뒤집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만들어내는 실천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자본'의 지배를 '사회'의 자기 통치로 대체할 그 주역, 즉 '사회'를 새로이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피지배 대중이 기존 '역사적 블록'의 반복을 끊는 행위에 착수하고 이 행위를 씨앗 삼아 구성할 새로운 관계들은 곧 '자본'을 대체할 '사회'의 실체, 그것이다. '자본'의 운동에 결박되어 있던 '사회'가 드디어 스스로 그 결박을 풀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람시의 사상 전반은 '자본'을 대체할 '사회'를 어떻게 실체화할 것이냐는 '사회주의'의 가장 심층에 자리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이기도 하다.

흔히 그람시를 '정치 이론의 대가'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치'의 이미지와 범위에 따라 그람시를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람시에게 '정치'란 분명한 자기만의 맥락과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곧 피지배 대중의 집단적인 윤리적 '행위'를 이끌어내려는 일체의 노력이다. 여기에서 주어는 어디까지나 대중들 자신이며, 그 포부는 몇몇 정책적 지향을 넘어선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가 이런 것이다. 그람시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북부 도시와 남부 농촌 사이에 작동하던 모순이 어찌 보면 노동 계급 내부에서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현직-실직, 남성-여성 등의 분열로 작동하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정치'는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람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대화해야 할 사상가이자 우리 실천의 선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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