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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진보 레퀴엠 "진보는 이렇게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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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진보 레퀴엠 "진보는 이렇게 망한다"

[이권우의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카탈로니아 찬가>

통합진보당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치달을 적에 떠오른 책이 있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정영목 옮김, 민음사 펴냄).

국내 독자들에게 뜻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조지 오웰이 앙드레 말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그런데 그가 그 전쟁에서 총상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겪은 스페인 내전의 진실을 밝힌 책이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지금은 절판된 풀무질에서 펴낸 것으로 보았다(정효석 옮김). 읽고 나서야 비로소 트로츠키 저서를 주로 낸 출판사가 이 책을 출간한 이유를 알았다.

사실상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가 공화국을 위협하는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맞서기 위해 스페인의 노동자와 세계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대거 참전했다는 게 스페인 내전에 대한 사전식 풀이다. 그런데 한창 내전이 치러지는 가운데 반파시스트 세력들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사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마침 의용군에서 휴가를 주어 바르셀로나에 있었던 오웰은 무정부주의 혹은 트로츠키주의라 부르는 세력이 주축이 된 통일노동자당에 동참해 공산주의자들의 명령을 받은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이 파시스트의 사주를 받은 통일노동자당이 벌인 일이라 선전해댔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실체적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오웰이 이에 맞서 쓴 '장문의 격문'이라 보면 된다.

오래 전부터 보수는 부패해 망하고, 진보는 분열해 망한다고 말해 왔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보면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파시스트들한테 진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적전 분열을 겪고도 승리할 집단은 없다. 진보의 가치를 공유하는 세력을 정치 목적으로 제거하면서 어찌 광범한 지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의문을 던져야 한다. 왜 스페인의 진보 세력은 분열했느냐, 라고.

조지 오웰이 보기에는 통일노동자당의 혁명적 분위기를 공산주의자들이 억압한데서 비롯되었다. 상식과는 다른 분석일 터다. 오웰에 따르면 당시의 세력 배치는 "한쪽에서는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자연합, 통일노동자당, 사회주의자들 일부가 노동자들의 통제를 지지한다. 다른 쪽에서는 우익 사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이 중앙 집권적 정부와 정규군을 지지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스페인 내전을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만 규정했다. 그러다 보니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카탈로니아 찬가>(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카탈로니아 찬가> 앞부분은 1936년 12월 이 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오웰이 목격한 혁명적인 분위기를 잘 그려놓았다.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은 도시는 겉으로 볼 때 "부유한 계급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곳이었다." 변변한 무장도 갖추지 못한 의용군이지만 "체제의 핵심은 장교와 사병 간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두 상황을 아우르는 한마디는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웰이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은 단순하지만 강렬했다. "내가 싸워서 지킬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고 했으니. 당시 인민전선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 상황을 두려워했고,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왜 그랬을까? 오웰의 분석은 이렇다.

스페인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예기치 못한 측면, 동시에 스페인 외부에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측면은 인민전선 정부의 정당들 가운데서 공산주의자들이 극좌가 아니라 극우의 편에 섰다는 점이다. 코민테른의 모든 정책은 이제 소련의 방어를 최우선으로 삼는다(세계 상황을 고려할 때 변명이 될 만하다). 이것은 군사 동맹 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특히 소련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동맹 관계다. 프랑스의 자본주의가 강하지 않으면 이 동맹은 러시아에게 쓸모가 없다. (…)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노선'은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이웃에 혁명적 국가가 생기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스페인령 모로코의 해방을 막기 위해 길길이 날뛴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 사실 스페인에서 혁명을 막은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나중에 우익 세력이 상황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지도자들을 추적하는 일에 있어 자유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지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수렁에 빠져들자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고 싶어 정영목의 번역본(민음사 펴냄)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 이 대목에 이르자 오랫동안 상념에 빠졌다. 양당 체계가 강력하게 자리 잡은 우리 정치 지형도에서 200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통합진보당에 표를 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추슬러달라는 염원이었을 터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이 남북 문제를 긴장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자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깃들길 바라는 마음도 통합진보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 기대를 받은 집단 내부는 추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지 않았다. 더욱이 북한 문제에서 진보 진영 인사들도 동의하기 어려운 편협한 사고방식을 보였다. 그들의 행보에서 진보 가치의 실현을 위한 철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정파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진보의 그림자를 보게 된 것이다.

의용군을 해체해 정규군으로 편입하고, 통일노동자당을 불법 단체로 낙인찍고, 노동 계급의 통제력을 박탈해 중앙 집권적 통제를 이룬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끝내 프랑코에게 무릎 꿇었다. 이후 스페인이 오랫동안 정치적 퇴화 과정을 겪은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진보가 실현하려는 가치나 그 방법을 놓고 분열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한다면 그것은 곧 부패다.

진보의 부패는 보수의 그것과 다르다. 사회적 약자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고, 결국 긴 세월에 걸쳐 사회 구성원들이 진보의 가치를 동의하지 않는 역사의 보복을 당할 터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웰의 작품은 카탈로니아에서 너무나 잠깐 "사회주의를 미리 맛보았" 던 것에 대한 찬가(homage)이기보다는 배반당한 혁명에 대한 진혼곡(requiem)이라 할 만하다. 지금,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이를, 어찌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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