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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가면 '표현의 자유' 찾아올까? 진짜 '적'과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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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가면 '표현의 자유' 찾아올까? 진짜 '적'과 싸워라!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마지막회] 방통위라는 '바지 사장'의 검열

근대 민주국가에서 검열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자유로운 의사 표현 없이는 민주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검열 금지는 대체로 사전 검열의 금지를 뜻한다. 특정한 의견이 발표되기도 전에 차단되어버린다면 담론장의 다양성과 건강성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담론의 발표 이후에 규제된다 하더라도 행정기관이 담당한다면 이는 검열에 해당한다는 것이 국제적 합의이다. 행정권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은데다가 지나치게 비대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대중들에게 전달될 기회는 완벽하게 보장하고, 그 이후에 일부를 예외적으로 규제할 수 있되, 사법적 판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법적 판단만이 만능은 아니다. 담론의 모든 사후 규제를 사법부에 맡긴다면 지나치게 사법 수요가 늘어나기도 하고, 또한 법관이라고 해서 다양한 분야를 두루 잘 판단할 수 있다고 믿기도 어려우며,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에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사후 규제를 민간 자율기구에 맡기면서 그 기구의 결정에 불복하는 경우에만 사법부에 넘기는 것은 그 대안이 될 수 있으며, 많은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기도 하다.

민간 심의 제도 역시 문제가 있다. 심의의 주체가 공무원이냐 민간인이냐 하는 문제는 어쩌면 형식논리에 불과할 수 있다. 국가검열보다 더욱 철저하게 검열하면서도 국가는 검열하지 않는다는 알리바이로 기능할 수도 있다. 소위 '바지 사장'을 내세우는 '검열의 아웃소싱'이 되어버릴 수 있다.

우리의 '가카'가 자행하는 검열이 바로 그렇다. 이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방송과 통신을 모두 관장하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를 만들고, 그 산하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심의위)를 두었는데 이 기구가 모든 민간 규제를 총괄한다. 더욱이 '가카'의 최측근으로 지금은 감옥에 갇혀있는 최시중이 방통위원장이었다. 권력자의 최측근에게 모든 언론을 통괄하는 매머드 기구를 맡긴다니, 이 자체가 검열을 하겠노라는 명백한 선언이 아니겠는가. 드라큘라에게 적십자사 총재를 맡기는 꼴이 아니겠는가.

▲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최시중이라는 '가카의 멘토'가 '겨우' 방통위를 맡는다고 할 때 어리둥절했던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가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는 가장 많은 표 차로 당선되었지만 곧바로 자신의 밑천을 드러냈다. 광우병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지지를 까먹었으니, 검열과 선전을 병행하는 여론조작을 통해서만 정권을 유지해야 했다. 하긴 나치 선전상 괴벨스 역시 히틀러의 오른팔이었으니, '가카'의 멘토는 최시중이 아니라 히틀러였던 게 아닌가 싶다.

'드라큘라'가 장악한 방통위라는 괴물은 '가카'가 요구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인터넷 게시물 중에서 정부가 신고한 것들은 곧바로 삭제하는 검열을 서슴지 않는 한편, '조중동'에 종편을 허가하면서 갖은 특혜를 몰아주었다. 특히 민간인 사찰 사건 덕분에 드러난 총리실의 한 비밀 문건은, 이런 방통위의 검열이 체계적인 것이었으며 그 체계 속에서 방통위에 주어진 임무는 '가카' 비방 게시글 삭제 및 사이트 폐쇄 등임을 말해준다. 방통위는 민간인의 옷을 입은 검열관, 즉 '바지 사장' 같은 존재에 불과함이 확인된 것이다.

이날 재판에서는 지원관실이 정권에 비판적인 인터넷 여론을 옥죄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문건도 공개됐다. '그간의 추진실적'이라는 제목의 문건에서는 "인터넷 브이아이피 비방글 확산방지 체계를 구축"했다며 △비에이치(BH)는 처리 지침 시달 △경찰청은 사법처리 △방통위는 게시글 삭제 및 사이트 폐쇄 등 정부기관별 대응 체계를 지원관실이 총괄했다고 자평했다. 인터넷상의 비판 여론 옥죄기가 청와대의 지시로 체계적으로 이뤄졌음을 뜻한다. (<한겨레> 2012년 7월 19일)

어쩌면 이렇게 식민지 시기와 비슷한가. 총독부는 모든 정보의 수집과 분류 및 유통을 통제하는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이하 조선정보위)를 운용했는데, 위원장은 정무총감(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이었으며, '조선통치에 대한 비판 및 총독 퇴진'에 관한 언급 등을 집중적으로 단속하도록 했다. 이 기구는 3.1 운동 직후 조선 민중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총리실에서 총괄하여 '명박 퇴진'을 검열하는 체계를 구축했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이렇게 총독부가 3.1 운동을 짓누르던 방식과 빼닮아 있는 것이다.

조선정보위는 3.1 운동의 저항적 분위기가 누그러들자 폐지했다가 총력전에 들어가던 1937년에 부활된다. 이 시기에는 검열보다는 선전에 집중하여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 <황국신민의 서사> 보급 운동 등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미국산 쇠고기 안전합니다", "4대강 사업으로 홍수와 가뭄을 두루 막을 수 있습니다" 하는 선전으로 여론몰이에 나설 때 역시 총리실을 중심으로 한 MB의 정보 조직은 맹활약하였을 것이다.

조선 정보위는 조선 내외에서 산출된 모든 정보를 수집 분류하여 감춰야 할 것은 검열하고 홍보해야 할 것은 선전했다. 검열은 경무국 도서과에서, 선전은 관방문서과(정보계와 보도계를 설치했다)에서 각각 맡는 분업만으로는 효율적이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검열과 선전은 동전의 양면이다. 즉, 감출 것을 효율적으로 감추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홍보거리를 만들어 공급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런 경우에 선전은 검열과 다르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검열과 선전을 묶을 수 있는 협업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물론 해방 이후 독재정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회적 관심을 한꺼번에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선전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예컨대 간첩단 사건이나 연예인 대마초 사건 등은 그 단골 수법이었다. 이런 정보 조작을 위해서 중앙정보부(안기부), 문화공보부 등 다양한 이름의 기구들이 존재했으며 "관계기관 대책회의"는 이를 통괄했다.

식민지에는 검열은 '당연한 것'이었고, 독재 시기에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검열 금지의 원칙이 그래도 웬만큼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88년 해금조치 이후이니, 겨우 20여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가카'의 5년 동안 이 원칙은 매우 심각하게 무너졌다. '선전을 통한 검열'을 활성화하려는 시도는 최근 발각된 다음의 문건에서도 확인되었다.

"용산 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 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 살인사건의 수사 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랍니다. (중략)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 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로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 데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용산 참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을 때 청와대 국민소통 비서관실 행정관 이성호가 경찰청 홍보 담당관들에게 보낸 전자메일이다. 말썽이 되자 청와대는 개인적 판단에서 비롯된 과잉반응에 불과하다고 해명했지만, 글쎄 과연 그 설명을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려는지 궁금하다. 총리실에서 검열 및 선전 시스템을 구축했노라 자랑하는 문건까지 확인된 판이 아닌가.

검열관이 사복으로 갈아입는다고 해서 국가 검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방통위는 '바지 사장'으로 국가 검열을 대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렸지만, 이 같은 현상은 이명박 정권만 끝나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다음 정권 역시 방통위를 바지 사장으로 써먹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방통위 산하의 방통심의위는 영화등급심의위원회에서 맡는 영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민간심의를 통괄한다. 대통령이 3명, 여야가 각 3명씩을 추천하여 9명으로 구성되니, 결국 최근 5년 동안의 거의 모든 사안은 6대 3으로 결정되는 '6대3 위원회'가 되어버렸다. 트위터 등 SNS를 규제하는 전담팀을 구성했다가 국제적 망신을 사기도 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생겨나는 거의 모든 영역의 발신 행위에 대해 규제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방통심의위가 겨우 9명으로 구성된다는 점도 문제이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다. 더욱이 각자 자기의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 따로 시간을 내서 위원 활동을 해야 하니 '심사숙고'하기 어렵다. 그러니 준공무원인 방통심위 실무자들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그 실무자들은 또 경찰이 올린 의견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결국 경찰관의 의견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셈이다.

현재의 '자율규제'란 결국 경찰관이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셈이다. 경찰관이 검열한다? 식민지 시기하고 달라진 게 뭔가? 사전 검열을 사후 검열로 바꾸고, 민간인 심의위원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우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건가. 헌법의 검열 금지는 준수되었고 민주주의는 그 기반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나.

일제시기 검열관은 20~30명쯤을 유지했었다. 더욱이 다루어야 할 정보의 양도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9명이 이 모든 사안을 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방통심의위원들의 심의 여건은 식민지 시기보다 훨씬 열악한 형편이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검열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실무 인력들은 대부분 전문성이 충분치 못한데다가, 준공무원이니 책임 질 일은 싫어한다. 물론 공무원인 경찰관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나중에 혹시라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들은 가능하면 엄격하게 규제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방통심의위는 심의가 아닌 검열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방송과 통신을 하나의 기구에서 관장하는 방통위 조직 자체이다. 방송과 통신은 너무도 다른 매체이다. 한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전파(電波) 자원은 매우 제한적이므로 방송이란 공공성이 강하다. 게다가 일방향적인 매체이며, 일인방송국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대한 권력과 자본이 독점적 우월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방송에 대해서는 공공 목적을 위한 정당한 규제가 많아야 한다. 반면 통신은 공공성보다는 개인성이 강하고 양방향적이며 특별히 우월성을 갖는 주체가 생성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가능한대로 적게 규제하는 것이 적절하다. 통신이라는 사적 영역까지를 국가가 관리한다면 통제사회로 이행할 우려가 큰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의 업무를 한데 묶어버린 것은, 불과 얼음으로 칵테일을 만들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그저 '작은 정부'라는 신자유주의적 구호에 충실한 구조조정일 뿐이다. 차기 정부에서 방통위는 해체해야 한다. 최소한 방송심의와 통신심의는 분리해야 한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킬 수 있으면서 표현 자유에 대한 식견을 지닌 인사들을 심의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 또한 필수적이다.

물론 다음 정권에서의 구조 개편이란 좀 한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다. 히틀러가 전 독일인에 라디오를 보급했다면 이 정권은 종편을 보급했다. 주례 라디오 담화를 자청하는 등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해서 거짓말을 반복함으로써, "끝없이 거짓말을 하면 대중은 결국 믿게 된다"는 괴벨스적 명제를 몸소 실천했다. "99퍼센트의 거짓말과 1퍼센트의 진실이 혼합된 것이 100퍼센트의 거짓말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괴벨스의 가르침에도 충실했다. '부자 감세'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떡볶이를 먹는 1퍼센트의 진실을 곁들였다. 파시스트들이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활용하여 통치했다면, 가카는 북한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켰다.

그나마 히틀러는 독일 국민 중 경제적 약자들의 처우를 일부 개선시키기는 했지만, 이명박은 오로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사회를 극대화시켰을 뿐이다. "이명박 퇴진 달력"이라는 것이 집권 2년차인 2009년에 벌써 나왔던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충분하다. 하지만 어떤가. 몇 달만 기다리면, 이명박만 물러나면 이 모든 게 해결될 것인가. 박정희 때, 전두환과 노태우 때, 아니 모든 대통령의 레임덕 시기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저 XX만 물러나면…."

하지만 '그 XX들'이 물러난 뒤에서 세상은 별로 바뀐 게 없었다. 계급구조와 착취, 대중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증오와 좌절은 바뀌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그저 참고 견뎌내라고 설득하는 선전, '저항하면 좌빨'이라고 낙인찍는 검열은 여전하다. 자본과 권력의 언론 장악 역시 튼실해서, 선전과 검열은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명박이 물러난다고 해서, 물론 달라질 대목도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이런 구조가 저절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은 어쩔 수 없다" "아니꼬우면 경쟁에서 이기라"는 신화 역시 오히려 강화되었을 뿐이다. 이런 신화는 선전과 검열을 통해 시작되었지만 이미 대중들의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명박 이후에는 또 하나의 '이명박'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은 퇴진하는 게 아니라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아니 이 모든 호시탐탐의 원인으로서 경쟁신화와 증오는 이미 우리 자신일 지도 모른다. 어찌할 것인가. '내면의 적'과 싸우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중략)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부분)

그 싸움이 어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적, 즉 우리의 일상 자체가 '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일상은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시 구조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그 구조를 바꾸는 일은 우리의 각성에서 시작되며 자질구레한 실천들에서 힘을 얻는다. 바꿔나가려는 노력, 그 노력의 과정 자체에 의해서도 우리의 일상과 내면은 변화한다. 거대한 구조의 힘 앞에 절망하고 있으면 그것은 결코 바뀌지 않지만, 무모해 보이는 시도들이 쌓이면 변화의 싹은 생긴다. "하면 된다"는 부분적으로만 진실이지만, "안하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는 온전히 진실이다.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조중동'의 횡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나 언론개혁시민연대에, 살인적 경쟁 교육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라면 <고래가 그랬어> 등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각종 움직임에 공감하면서도 직접 나서지는 못하는 사람이라면 각종 소셜 펀딩에 각각 관심을 가질 법하다. 조세형평성에 관심 있는 사람은 조세혁명당에, 후쿠시마 사고를 보면서 우리 원전은 괜찮나 불안한 시민이라면 녹색당에 투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방통위나 방통심위의 구조적 개선을 다소 앞질러 고민하는 일 역시, 바로 이런 노력들 중 작은 하나에 해당하지 않을까.

연재를 마치며

한국에서 근대 검열이 시작된 지 100여 년, 그동안 있었던 그 숱한 사연들을 대충이라도 훑어보고 싶었다. 특히 주력했던 것은, 검열과 반(反) 검열의 움직임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역동적인 상호 반응이었다. 즉 권력이 검열을 위해 동원한 갖가지 폭력적인 방법들을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검열의 대상이 되는 발화자와 수용자 대중이 그 검열에 맞섰던 다양한 반응들을 함께 살피고자 했다.

벌써 41회. 다루지 못한 것도 많지만 이런 정도에서 매듭짓기로 한다. 사실 이런 정도도 내 힘에는 벅찬 일이었다. 주2회 약 40~60매 정도의 원고를 마감하는 일만해도 숨에 가쁜 일정이었다. 무엇보다도 검열이란 너무도 광범위한 주제라는 점에서 힘에 겨웠다. 법학, 언론학, 사회학, 문학, 철학, 역사학, 미술, 음악, 영화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 걸쳐있지만, 나는 단지 한국 문학 전공자일 따름이다. 분과학문 체제 속에서 훈련된 사람으로서 충분히 다룰 수 없는 주제인 것이다. 역시 분과학문 체제란 삶의 복합성과 역동성을 온전히 파악하기에 매우 불리한 방식임을 다시 실감하게 된다.

연재하는 동안 '남의 영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소리'를 해댄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단지 필요한 일인데 발언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해보자는 생각 때문에 만용을 부렸을 따름이다. 각 분야의 '고수'들께서는 부디 이해하고 가르침 주시기 바란다(☞ 이메일 주소 : hanms58@gmail.com). 나중에 책을 묶게 될 때 그 가르침을 충실히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

사상 초유의 지상파 방송3사 동시파업이 막 본격화되던 3월에 연재를 시작했다. 주 2회로 41회면 약 20주, 5개월 정도의 계획이었으니 연재를 맺기 전에는 뭔가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연재를 맺는 지금 파업은 끝났지만 얻어낸 것은 거의 없다. 파업에 참가한 언론인들의 노고는 눈물겹고 때론 감동스럽기까지 했지만, 결국 중동무이된 느낌이어서 못내 아쉽다. '쇠뿔'을 '단 김'에 뽑지 못하고 말았으니, '미친 소'는 그저 잠복하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역사는 가르쳐준다. 이렇게 억지로 잠복된 에너지는 다시 한 번, 좀 더 강력한 힘으로 분출된다고.

그동안 모자란 글을 다듬고, 좋은 이미지를 찾아내어 곁들여준 <프레시안> 담당 기자와 때론 분에 넘치는 칭찬으로, 때론 날카로운 비판으로 반응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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