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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몸의 통제를 통한 검열

몇 년 전 원로 교수와 밥을 먹는 자리가 있었다. "한 선생은 젓가락질을 왜 그렇게 이상하게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는 끝내 내 가정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암시로 이어졌다. 잠자코 웃으며 들어 넘기다 넌지시 반격을 가했다.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 푸코가 말했던 규율 권력을 실감하게 됩니다." 먹물들이 모인 자리답게 푸코가 어쩌느니, 그를 너무 우상화하는 건 한국 학계의 식민성일 수 있다는 등으로 이야기는 번져가 버렸다.

사실은 푸코가 아니라 DJ DOC의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 나는 아무 어려움 없이 내 나름의 젓가락질로 밥과 반찬을 잘 먹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젓가락질 좀 못하면 어떤가. 포크는 두었다가 어디에 쓸 것인가. 단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젓가락질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훈계를 듣고 밥맛을 잃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타인들, 흔히는 자신보다 약한 자들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것일까.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데도 왜 그렇게 못 봐주겠다는 걸까.

젓가락질뿐이 아니다. 'DOC와 함께 춤을'은 사람들의 끝없는 '참견질'에 상관하지 말고 살아가자고 권유한다. 청바지 입고 출근하면 안 되나? 여름 교복이 반바지면 얼마나 좋을까?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춤을 춰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 그깟 나이 무슨 상관이에요. 다함께 춤을 춰 봐요."

대머리 감추려 애쓰지 말고 빡빡 밀고 다니라고도 권한다. 나도 한때 밀고 다녔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냥 아침마다 머리 감기 귀찮기도 하고, 환경 공해도 좀 줄일 겸 밀어버렸는데, 가사 그대로 "사회에 불만 있느냐"는 말 참 많이 들었다. 그뿐이랴, 암 투병 중이라는 둥, 불교 종립 학교에 근무하는 내가 출세하고 싶어서 스님 흉내 낸다는 둥 뒷소문까지 돌았다.

"이게 더 귀찮구먼. 차라리 매일 머리 감고 말지 뭐."

이렇게 신체를 규율하는 문화와 제도들이 한국 사회에는 참 많은 편이다. 유치원에 가자마자 '배꼽 인사'를 배운다. 두 손을 배꼽에 대고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어린이들을 보면 물론 귀엽기 짝이 없지만, 어떨 때는 섬뜩하기도 하다. 공손함도 지나치면 병이 아닌가. 더욱이 강제된 공손함이 아닌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차렷' '경례' '앞에 나란히'를 배운다. 연병장을 흉내 낸 구조의 학교 운동장(일제 때 만들어진 것이다)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아침 조회라는 것을 한다. 마이크로 쩌렁쩌렁 구령을 내리고 줄이 맞지 않노라고 호통 치는 풍경에서 섬뜩함은 더 커진다. 저 끔찍한 '일사불란'에의 강압.

박정희의 유신 독재 때 고교 및 대학 입시에 체육 점수가 반영되었는데 그 종목 중 하나는 수류탄 멀리 던지기였다. 물론 합성수지로 만든 모형 수류탄이지만, 겉모습은 똑같고 무게도 똑같았으니, 나는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목총을 들고 총검술과 제식 훈련을 배우는 교련 시간도 정식 교과목이었다. 구타는 수시로 이뤄졌고, 심지어는 반장이,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반 학생들을 때리기도 했다. 교사들은 못 본 체 하거나 은근히 조장했다. 그래야 학생들 다스리기가 편하니까. 요즘도 대학에서 후배 구타 사건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데, 마찬가지 요인 때문일 터이다.

박정희는 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학생회를 없애버리고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반장은 '소대장', 학생회장은 '연대장'으로 부르는 식이었는데, 대학생이 되니 총학생회장을 '사단장'이라고 부르는 '승진'이 이뤄졌다. 푸코는 학교와 병영의 유사성을 설파한 바 있지만, 유신 시대 한국에서는 그저 유사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늘 확인되었다.

물론 완결편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대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제식 훈련. "차렷, 열중 쉬어, 좌로 봐, 우로 봐" 가려워도 긁으면 안 되고 재채기가 나도 참아야 한다. 오직 지시받은 동작만을 되풀이해야 한다.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이다. 제대로 동작이 나오지 않으면 "동작 봐라, 구령 소리 봐라, 아침 굶었나"로 호통이 이어졌다.

굶었냐고? 그래, 정말 굶었다. 굶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훈련병 시절 워낙 밥이 모자랐으니 국물로라도 배를 채워야 했는데, 어쩌다 고깃국이 나오는 날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나는 채식을 했었으니까. 모든 자에게 똑같은 음식을 먹으라는, 굶겨놓고서 굶었냐고 호통까지 치는 기막힌 폭력이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신체 동작을 타인의 목소리에 오로지 의존해야 한다는 저 끔찍한 타율성. 한 인간의 식성까지를 자기가 정해준 대로 먹으라는 폭력성. 인간의 기계화. 물론 그 기계화는 인간의 살인 기계화, 복종 기계화를 위한 훈육일 터이다. 한국의 경우는 모든 남성에게 군 복무를 의무화했으니, 국민들을 명령에 복속하는 기계로 만드는 국민 교육의 장이었다.

꼭 군대에서만이 아니다. "조센징과 북어는 사흘마다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오랫동안 금과옥조로 떠받들어졌는데, '조센징' 대신에 '쫄병/여편네/시다' 등 여러 단어로 변주되어도 그 진리성은 수정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꼭 두들겨 패야만 맛은 아니었다. 좀 세련되어 보이는 버전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박정희는 '무지'한 국민들이 해외에 나가서 나라 망신을 시킬까봐 국가에서 양식 먹는 예절을 가르쳤다. 여권을 내려면 그 교육을 받고 '문화인'임을 입증해야 했다. 나이프와 포크는 이렇게 써야 한다, 먹을 때 소리 나지 않게 해라. 심지어는 외국 호텔에 가서 샤워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쳤다. 별의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를 국가는 국민들에게 가르치려 했다. 어리석었던 나는 역시 잘 외워두려 애를 썼다. 그래야 '교양'있는 '문화인'이 될 테니까. 데이트할 때면 가야 했던 양식집에서 '야코' 죽지 않기 위해서.

ⓒ프레시안

신체와 동작을 강제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은 그 사람을 무력화한다. 하위 주체는 자신의 감각과 판단에 의존하면 안 된다. 오로지 언제라도 복종할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판단 기준은 늘 외부에 있다. 무슨 구령이 떨어지면 즉각 어떤 동작을 취해야 한다는 것만이 그가 알아야 할 전부이다. 오랫동안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절대복종의 미덕을 육체에 각인해왔다. 배꼽 인사에서, '앞에 나란히'를 거쳐, 총검과 나이프 사용법까지 그 무수한 동작의 강제는,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군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히면 병사들 사이에서도 소외된다. 해병대에서 사병들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기수 열외' 현상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만 작동하는 게 아니며, '아랫 사람들' 사이의 상호 감시와 배제를 통해서 일상화되는 것이다. 단체기합이라는 폭력적인 제도는 이런 상호 감시의 정착에 기여했다. 점점 사람들은 외부에서 내려진 명령을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제대한 이후에도 남의 삶에 불필요할 정도로 개입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면서,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는 그 어떤 공통의 합의를 위해 살아간다. 그 사회의 중심 가치에 동의하지 않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기수 열외'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일사불란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삐죽 튀어나온 실밥을 잘라버리고 싶어 한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동의어가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우리'와 같지 않은 '소수'에 대해서 폭력적이 되어 버린다.

상호 감시를 만들고, 이를 통해 지켜야 한다고 믿게 된 '중심적 가치'란 대부분의 경우 국가나 민족 사회 따위였지만, 그것들은 어차피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 명제들이었으니 신체에 각인되는 구체적 동작들에 의해 실현되고 실감을 얻는다. 행동거지부터 예절에 이르기까지. 내 젓가락질을 훈계했던 그 원로 교수 역시 그런 사회에서 자라났던 슬픈 존재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늘 남의 눈치를 보는 타율적 인간이 되어갔다. 물론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행복함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중시하면서 판단한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방식은 획일적인 것이 되어갔다. 유치원의 '배꼽 인사'에서, 단정한 교복을 입고 선생님 말씀은 무엇이든 잘 듣는 '착한 어린이'를 거쳐, 입시공부에만 몰입하는 착한 중고교생이 되어야 한다. '일류 대학'이라는 곳을 거쳐 '삼성'에 들어가야 엘리트이며, 집을 사고 평수를 넓혀가면서 건실한 청년이 된다.

주류적 인간들과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은 열패자, 루저로 인식되어 갔다. 적게 벌어 적게 쓰면서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 이 살벌한 경쟁 사회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대학 진학을 거부하거나 아예 자퇴한 사람들에게 한 청년들에게 '루저'라는 이름을 붙여버린다. '싸움'을 거부했는데 왜 패배자란 말인가. 남들은 뭐라고 하건 간에 나름의 가치관을 지키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왜 못 봐주겠다는 건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런 취지로 말했다. "낙타는 모든 것을 그저 참고 견디면서 살며, 노새는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예스맨'으로 산다. 낙타와 노새는 사자를 배워야 한다. 사자는 굶주리더라도 결코 무릎 꿇지 않으며 끝까지 저항한다." 우리는 지금 낙타나 노새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견디려고 산단 말인가.

우리는 혼자 태어나 결국 혼자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은 오로지 나의 몫일뿐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도 대신 죽어줄 수도 없다. 왜 한번 뿐인 나만의 삶을 그저 참고 견디거나 예스맨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혼자' 사는 동시에 '여럿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려니 주류적 삶에의 거부는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이지만 예절만은 일정 부분 필요하다. 인간이 서로에 대하여 적의 없음, 존중, 사랑 등의 감정을 오해 없이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공통의 약속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예절은 너무 번다하며 지위에 따라서 엄격하게 구분된다. 손윗사람들은 예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일방주의까지 있다. 약속이란 어차피 인위적인 것이고 또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를 인정하는 데는 너무 인색하다. 무엇보다도 예절이 상호 존중을 나타내기보다는 일방적 복종의 표현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한국의 예절은 제식훈련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거지를 타율에 의해 규제하고 그를 통해 그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하는 목적을 지닌 것일 때, 예절이란 단순한 약속에 그치지 않게 된다. 불순해져버린 그 약속은 신체를 통해 정신을 지배하려는 권력이 되어버린다. 정신을 지배해버리면 더 이상 검열조차 필요 없게 된다. 사장님께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하다보면 그의 지시에 무조건 다소곳해지지 않던가. 정해진 국민 의례만을 공손히 따라 하다보면 국가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물을 기회를 잃게 되지 않던가. 검열의 완성은 그것이 불필요해지는 사회인 것이며, 한국에서 예절이란 그 완성에 크게 기여한다.

예절일랑 웬만큼 해두고, 주류적 삶에의 욕망일랑 웬만큼 접어두고, 좀 내 멋대로도 살아보자. 작은 것들부터. 젓가락질도 마음대로, 빡빡머리도 내 멋대로, 춤을 추고 싶으면 막춤이라도 추어보자. 왜 '소녀시대'만, '그리스인 조르바'만 춤을 추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보면 우리는 언젠가 내 삶을 스스로 결정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통제당하면서 마음이 갇혀버렸다면, 다시 내 몸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내 마음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견디지 말고 즐기라. 춤추고 마음껏 웃으라.

다시 차라투스트라를 빌리면, 그는 사자에 머물지도 말라고 권유한다. 낙타와 노새는 사자를 배워야 하지만 사자에서 멈추지도 말라는 것이다. 사자는 모든 것에 저항만 하며 늘 으르렁댈 뿐이다('제식 훈련'에의 증오와 거부에만 머물고, 또한 그 거부를 제식 훈련의 방식으로만 드러내는 셈이며, 그저 견딜 뿐이라는 점에서는 낙타와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어린아이처럼 춤과 웃음으로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길. 그렇게 해서 '위버 멘시(超人)'로 나아가길.
▲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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