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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트위터러 공지영의 '오보', 어떻게 봐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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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트위터러 공지영의 '오보', 어떻게 봐야할까?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SNS와 '정보 홍수' 시대의 검열

백화점에서 너무 많은 상품 앞에 서면 선택이 막연해진다. 그때 판매원은 이렇게 말하기 십상이다. "요즘 이 제품이 제일 잘 나가요." 십중팔구는 그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 베스트셀러 선정의 위력은 책에서 시작되었지만 영화 패션 등 모든 상품에서 적용되고 있다. 어디 상품들뿐이랴. 정보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대세'에 편중하는 현상은 점점 가속되고 있다. 이런 정보 쏠림 현상이 생기는 주요한 원인은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올바른 정보 선택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점에도 있다.

기실 오랫동안 인류는 정보의 독점 때문에 갈등을 겪어 왔다. 정보를 실어 나르는 문자는 오랫동안 지배계층에게만 접근이 허용되었으니,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평민이나 여성은 문자 습득이 금지되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일은 그래서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또한 널리 보급된 이후에는 '암글'이라고 매도하면서 암글로 된 문자는 저급의 정보만을 담는 것으로 차별해왔다(우리는 지금 '암글'로 글쓰기를 하고 있으니, 그 시절의 기준대로라면 남성들은 모두 돌연 트랜스젠더가 되는 셈이다).

이제 정보 홍수 시대, 우리는 '트랜스젠더'에 머무는 게 아니라 또 한 번 존재의 전이를 경험하고 있다. 탄탈로스. 목 바로 밑까지 물이 차있지만 막상 마시려고 들면 그 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리스 신화 속의 영원히 처형 받은 자. 탄탈로스는 넘치는 정보 속에서 늘 쓸 만한 정보를 갈구하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정보 스모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보는 넘치지만 우리는 늘 유용하고 믿을 만한 정보에 목마른 것이다. 없는 것이나 진배없거나 없느니 못한 정보들이 너무 많다. 마실수록 목이 마른 코카콜라처럼.

워낙 정보가 많기도 하지만, 고의로 과잉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컨대 권력이 의제 설정에서 불리함을 느낄 때 새로운 의제로 전환하기 위해서 다른 정보를 흘리게 마련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마초 연예인이나 간첩단 사건 같은 것은 늘 준비되어 있는 국면 전환용 뉴스들이었다. 북한이 왜 한몫 하지 않으랴. 선거철에 때맞춰서 총풍 사건도 일으켜주고 미사일도 쏴준다. 의제가 되어 마땅한 것들을 사회적 관심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이런 여론 조작은 넓은 의미에서 검열이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좀 다른 차원의 정보 과잉이 일어났다. '또 다른 비리가 비리를 덮어 버리는' 현상이다. BBK로 시작해서 '영일대군'의 구속까지 그 무수한 비리들. 이 정권에서 비리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니 뉴스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실정(失政)도 마찬가지이다. 광우병 쇠고기 사태에서 '4대강 망치기'를 거쳐 언론 장악, '고소영' 인맥의 회전문 인사, 용산 참사, 부자 감세, 압박 일변도의 대북 전략, '기다려 달라'로 상징되는 미·일에의 굴종 외교, 인권 후퇴 등으로 숨 가쁜 실정이 연속되었다. 특정 실정에 대한 비판이 수그러드는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비판해야 할 또 다른 실정이 새로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비리와 실정을 넘치도록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이 비리와 실정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더 이상 분노하지 않고 냉소하는 국민을 만들어 버렸다.

가뜩이나 넘치는 정보 안개 속에서 이런 '스모그'까지 추가되었으니, 더더욱 막막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이 쓸 만한 정보를 골라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신문 방송 등 공적 매체를 믿는 방식. 둘째, 입소문이나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등 믿을 만한 개인적 경로에 의해 획득하는 정보를 신뢰하는 방식. 사적 정보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최근 급격히 고조되면서, 공공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제공하는 정보들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관습은 근대 매스컴의 광범한 보급 이후에 굳어졌다. 그들 역시 출발은 사적인 정보 제공자였지만, 사회적 영향력과 신뢰가 높아지면서 공공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공적 매체들은 무수한 정보 중에서 어떤 기준에 의해 보도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선별하여 제공하는가. 물론 뉴스의 가치는 '영향력, 시의성, 변화, 저명성, 근접성, 신기성, 갈등' 등의 기준에 의해 판별한다는 것이지만, 이런 교과서적 기준에 빠져있으면서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이나 자본의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이다.

신문과 방송은 많은 인력과 설비를 갖춰야 하므로 꽤 큰 규모의 자본이 동원되며, 광고주나 권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공영 방송 제도이지만, 다 알 듯이 한국의 공영 방송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다. 그러니 공적 매체의 정보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감각을 대중들은 공유하게 된다. 대중들은 기획 광고나 간접 광고에 더 이상 속고 싶어 하지 않으며, 뉴스에 정권의 입김이 담겼음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사적 매체가 제공하는 정보에 더 높은 신뢰를 보이게 된다.

건강 식품이나 유모차를 고를 때 우리는 언론의 기사나 광고보다는 직접 써 본 내 친구의 권유를 신뢰한다. SNS를 통해서 얻은 유모차에 대한 정보 역시 마치 내 친구의 권유처럼 신뢰한다. SNS는 발신자의 정보에 마치 친구의 권유 같은 신뢰를 보낸다는 점에서, '확장된 친구'인 셈이다(마침 페이스북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친구'이기도 하다).

이런 신뢰는 상품 정보뿐만아니라 다른 분야로 넘쳐흘러서, 정치나 사회 관련 정보에서도 사적 매체를 신뢰하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파워 트위터러의 한마디가 공적 매체의 뉴스나 논평보다 훨씬 더 신뢰를 얻는 것이다. 특히 사적 매체이면서도 공적 담론을 다루는 경우는, 오히려 '현실의 친구'들의 말보다 '확장된 친구'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경향까지 있다. 친밀성과 공정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작용도 없지 않다. 리트윗과 팔로어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정도가 지나친 느낌이 있다. 강력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쓰거나, 남보다 먼저 글을 올리기 위해 즉흥적으로 쓰기도 하고, 또는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까지 서슴지 않고 발언하는데 그것도 자신에 찬 어조를 고른다.

정보 쏠림 현상도 문제이다. 약자로 몰린 집단에 일방적으로 비판이 집중되는 것이 그렇다. 예컨대 '개똥녀' '된장녀' 사건 등 주로 여성에 대한 폄하가 쏟아져 나온다거나,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이 매카시즘으로 쉽게 일탈해가기도 한다, 특히 이주 노동자에 대한 집단적 폄하와 공격성은 '오원춘 사건' 이후 우려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 외국인 혐오증은 근거도 박약하며 성급한 동일시의 오류를 저지르는 논리들이지만, 그럼에도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지면 대중들은 누군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손쉬운 희생양은 외국인, 그 중에서도 백인종이 아니라 황인종이나 흑인종이다. 우리는 백인 영어 강사를 경외하면서 황인종 노동자를 경멸한다. 섬뜩하다.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을 학살하던 일본인들 역시 평소 지니고 있던 조선인 혐오증이 정권의 정보 조작에 의해 증폭되면서 살인마로 바뀌었다. "호떡집에 불났다"는 표현을 만든, 중국인 학살 사건 역시 조선총독부가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여 만주 침공의 계기를 만들려던 정보 조작에 기인했다. 평소의 혐오는 어떤 계기를 만나면, 끔찍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살인마는 오원춘만이 아니다.

개인적 매체의 흥륭에 따라 공적 매체는 정보에 대한 대중들의 선택 경향을 주요한 기사거리로 다루는 바, 이 과정에서도 문제는 확대 재생산된다. 언론이 영화 책 등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도하는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거니와 최근에는 트위터의 팔로워가 몇 명인지, 검색 수가 몇 건인지, 누가 트위터를 통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보도하고 있다. 대중들의 선택 경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물론 긍정적이지만 부작용도 있다. 포퓰리즘의 가능성, 다수결에 의해 정보의 진리치를 결정짓도록 만들 우려까지 있다. 담론장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어렵게 되며 하향 평준화의 기미조차 없지 않다. 가뜩이나 한국 사회는 소수 의견이 중시되기 어려운, 일사불란과 국론통일을 강조하는 독재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우려스럽다.

특히 문화의 영역은 다양성이 생명이라는 점에서 이런 정보 쏠림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불러온다.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라는 난해한 책은, 물론 그 제목이 한국 사회에 지나치게 결핍된 것을 묻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을 공적 매체에서 중계 방송했기 때문에 더 많이 팔렸을 터이고, 아마도 많은 경우 책장에서 먼지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선택되지 못한 무수한 양서들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힘 있는 발신자의 스타화도 우려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파워 블로거가 여론을 휩쓸더니만, 이제는 파워 트위터러의 한 마디가, 그가 잘 아는 분야인지 아닌지와 별 관련 없이 지나치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언론까지 이를 중계하면서 담론의 '천하통일'이 이뤄진 듯 인식하게 된다. 논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비유가 자리 잡기도 하며, 지나친 조롱이 냉소주의를 부르기도 하지만, '대세'를 이루는 도도한 힘에 휩쓸려 지나가버리곤 한다.

파워 트위터러의 힘이 본의 아니게 악용되는 사례도 있다. 예컨대 이해를 달리하는 두 관계자 중 어느 한 쪽이 특정 파워 트위터러에게 자신의 주장을 보내면서 리트윗을 부탁한다. 그는 한쪽 이야기만 들은 채로 리트윗하고 여론은 그 리트윗을 따라 춤춘다. 발언 기회조차 차단당한 상대자에게는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발신자가 별 생각 없이 한 리트윗이 엉뚱한 결과를 불러오는 사례들을 필자는 종종 목격해왔다. 리트윗하기 전에 상대방 이야기도 들어보았어야 하지 않을까.

파워 트위터러들이 입수한 제한된 정보만으로는 옳다고 판단되는 것일지라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이 볼 때는 진실이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 이미 파워 트위터러들이 '만기친람(萬機親覽)'으로 꿰뚫어 보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전문화되어 있다. 그들은 '천수천안(千手千眼)'도 '올 마이터'도 아니며, 스스로 이를 인정하면서 발언 범위와 수준을 조정해야 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적 매체의 보도 과정은 이런 오류를 바로잡을 장치들을 마련해두었다. 복수의 취재원을 대상으로 확인 취재를 하여 '팩트'를 확실하게 만드는 방법, 이해 당사자의 반론을 듣는 반론권 보장 등은 비교적 충실히 이뤄진다. 또한 분업화를 통해 나름의 전문성을 지닌 인력이 분업과 협업 체제를 이루고 있으며, 기사의 작성 및 보도 과정에서는 여러 사람의 검토와 논의 과정을 거치므로 서로 체크할 기회도 있다. 공적 매체는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적 매체에 비해 장점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근대 언론들이 200여 년 동안 나름대로 가다듬은 이런 장치들은 사적 매체에서 출발한 언론이 공적 가치를 인정받게 만든 큰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트위터러들은 공적 문제에 대해 발화할 때도 대부분 혼자서 한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어려우니 잘못된 팩트를 토대로 발신하기 쉽다. 예컨대 공지영은 "돌고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여수 엑스포의 돌고래 쇼 티켓을 사지 말아 달라"는 글을 리트윗했는데, 여수 엑스포에는 돌고래 쇼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이에 대해 사과는 하면서도 "제가 엑스포 홍보 담당자도 아니고 전화해보고 확인한 후 리트윗합니까"하는 항변을 덧붙였다고 한다.

▲ 문제가 된 공지영 작가의 여수 엑스포 돌고래쇼 관련 리트윗. ⓒtwitter.com

물론 리트윗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확인은 의무적이다. 파워 트위터러는 공공성을 강력하게 지니는 발화자이므로 그만한 책임 의식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전화 한 통이나 인터넷 검색 정도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공지영은 여러 번에 걸쳐 잘못된 팩트에 기초한 비판을 했는데, "내가 확인해야 하느냐"는 정도의 인식에 머무는 한 비슷한 잘못은 지속될 것이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사적 매체 전반에 대한 신뢰까지 낮아질 우려가 있다.

사적 매체는 사실 확인에서 불리할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여 미리 검증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발신해야하는 불리함도 있다. 이런 여건 속에서 대중들의 반응을 촉발하면서 비판을 최소화하려면 '대세'에 편승하는 것은 유효한 전략이다. 정보쏠림 현상을 불러옴으로써 담론장의 다양성을 위축시킬 우려가 큰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발화가 역방향에서 검증될 기회가 충분치 못할 때, 그럼에도 대중의 큰 신뢰를 받게 될 때, 발화자는 '브레이크 없는 권력'이 될 우려가 적지 않다.

'가카'처럼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뜬금없이 할 때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조롱만을 얻는다. 하지만 파워 트위터러의 말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비난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물론 그들이 '가카'보다 훨씬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표현능력 역시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대중적 권위를 획득한 사람이면서도 공인의 공적 발화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도 작용한다.

SNS의 영향력은 발신자를 '확장된 친구'로 믿는, 대중들의 신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신뢰에 상응하는 발신자의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파워 트위터러가 된다는 일은 영광스럽고도 위험한 일이다. 트위터는 물론 사적 매체이지만 몇 십만을 대상으로 발화하는 힘을 지니게 된 뒤라면 그의 발화는 결코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자들에게 고도의 윤리와 직업적 능력이 필요하다면, 이미 사적 영역에 머물지 않는 파워 트위터러 역시 비슷하다. 아니 내부적 견제나 토론 기능이 없는 '1인 언론'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더 많은 책임감이 요구된다. 그것이 자신의 말을 '십년지기'의 말보다 더 신뢰하는 대중들에 대한 예의이며 윤리이다.

공적 언론과 사적 언론은 두 수레바퀴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공공성이 강한 정보는 공적 매체에, 그리고 사적인 성격의 정보는 사적 정보원에 각각 좀 더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적 매체보다는 사적 매체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력하다. 서로 자신의 결함을 극복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이후에는 적절한 역할 분담을 하면서 서로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적 매체의 경우는 언론으로서 자기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 방송과 신문의 편집권 독립이 시급하다. 사적 매체의 경우 사용자들의 문화가 변화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단지 파워 트위터러의 경우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서 따로 당부하고 싶다. 성급한 발신에 나서기 전에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하고 심사숙고해달라는 것이다. 가능하면 자기가 잘 아는 분야에 집중하여 발언하고, 믿을만한 친구들과 미리 발신내용을 상의하며, 발언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트위터링이 직업도 아닌 사람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부과하는 느낌은 있지만, 이미 그들은 많은 사람의 신뢰를 얻은 '1인 언론'이며, 사회적 자본 또한 획득하였으므로 그에 걸맞은 책임도 요구된다.

아예 파워 트위터러들에게 정보 생산 및 전달자의 덕목들에 대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어떨까. 기자들이 받는 기본적인 훈련 일부를 습득할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다. 사적 매체에서 출발하여 공공적 기능을 담당하기까지 언론들이 획득한 200여년의 노하우를, 뒤늦게 출발한 사적 매체들은 보고 배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트위터링은 이미 사적 발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공적 신뢰에 걸맞은 책임감과 실무능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자신의 시간을 공공적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셈이므로 적절한 보상이 필요할 것이다. 국가가 언론에 적지 않은 지원을 하는 것이 언론의 공공적 가치 때문이라면, 파워 트위터러에게도 역시 각종 지원이 필요하다.

탄탈로스가 그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은 제우스의 비밀을 인간에게 누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들도 정보 독점을 갈구했었던 셈이니, '신과 나는 동급'이라고 외치던 전근대 권력자들의 행태를 제대로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언론 역시 오랫동안 정보 공급을 독점하면서도 권력과 자본에 기생해온 측면이 강하다. 일선 기자들이 쓴 기사에 대한 언론사 내의 사전 점검(데스킹)은 원론적으로는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권력과 자본을 대신한 사전 검열로서의 성격 또한 강했다. 그러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공적 매체로서의 제도권 언론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권력과 자본의 개입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사적인 친밀감까지 확보한 매체라는 점에서, SNS는 새로운 대안적 언론으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단지, 공적 매체는 발신 전의 점검이 검열로까지 진행되어서 문제이지만, 사적 매체는 반대로 너무 부족해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트위터의 힘으로 오바마가 백악관에 입성하고 자스민 혁명이 촉발되는 등 SNS는 시대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정보 생산 및 공유 시스템의 민주화라는 긍정성은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 하지만 긍정성만이 지나치게 강조된다는 점에서 일부러 쓴 소리를 많이 해보았다. 좀 균형을 잃은 느낌이지만, 이런 치우침이 오히려 전체적 맥락에서의 균형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 고 권정생 작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몽실언니>(창비 펴냄), <한티재 하늘>(지식산업사)의 작가 고(故) 권정생 선생은 자신의 책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가)이 문화방송(MBC) <느낌표> 프로그램의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책을 출판한 녹색평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프로그램에 선정되면 최소 20만부는 팔린다던 시절이었으니 꽤 커다란 돈과 명성을 거부한 셈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행복한 경험 가운데 하나가 책방에서 자기 손으로 책을 고르는 일인데 왜 그런 행복한 경험을 텔레비전이 없애려는 겁니까."

아이들에게 자기의 선택권이 의미 있다면 왜 어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책을 내 입맛대로 고르는 일이 행복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은 얼마나 큰 행복이겠는가. 우리는 너무 '대세'에 따라서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세'는 누가 왜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를 곰곰 생각해보면, 그에만 따르는 것이 현명치 못함은 금세 알게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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