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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란 이름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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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란 이름의 불편한 진실!

[한만수의 '백 년 동안의 검열'] 금지어는 누가, 왜 만드는가

우리는 "미국 들어간다"는 말을 자주 쓴다. 미국 교포들이야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예컨대 유학생이나 '기러기 아빠'들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 미국 들어간다고?

씁쓸하다. 이 말은 '내지/외지'라는 식민지 시기 검열 권력이 강요했던 용어가 토박이말로 변용된 결과이니까 더욱 그렇다. '종주국'만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인가. 아니 바뀐 것은 더 있기는 하다. 식민지 시기에는 검열에 저항하는 문법들이 적지 않았지만, 요즘은 자발적으로, 아니, 미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우월감까지 느끼면서 말하는 듯하다.

'내지/외지'라는 용어는 일제가 식민지를 계속 넓혀가면서 생겼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소위 동화 정책으로, 공식적으로는 식민지의 존재를 부정했다. '내선일체'인데 무슨 식민지란 말인가.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본토와 새로 생겨난 영토를 구분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식민지도 얻지 못한다면 뭣 하러 전쟁을 한단 말인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내지(內地)/외지(外地)'라는 용어가 제시되었다. 일본은 문명의 안쪽이며, 식민지는 문명의 바깥에 놓인 야만의 땅이라는 위계 관계로 '제국-식민지' 관계를 대체하는 완곡어법. 소위 '포섭'과 '배제'를 동시에 구사하는 전법이다. 이를 통해서 조선인을 같은 국민으로 포섭하는 동시에, 국민이라고 다 같은 국민인줄 아느냐 국민에도 등급과 위계가 있다, 하고 공표하는 사기술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남이가?"와,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의 공존.

안과 밖을 차별하는 언어 사용법은 기실 오래된 역사를 지닌다. 봉건 시대에는 '문밖 것들'과 '문 안의 양반들'을 구분하였으며, 다 알듯이 서구의 '부르주아' 역시 '성 안 분들/성 밖 것들'이라는 구분에서 나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안쪽은 가치 있는 것의 위치였고, 바깥쪽은 가치 없는 것이 자리할 곳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조선인들은 졸지에 모두 '바깥'으로 내몰렸으니, 내지/외지란 안과 밖의 위계성을 급격하게 역전시키라는 요구였다.

일본은 오랫동안 조선을 경유하여 중국 문명을 받아 들여왔지만, 이제 근대 서구 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자로서 자신을 문명의 안쪽으로 조선을 문명의 바깥으로 각각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문명과 야만'의 구분을 단박에 역전시킨 경우는 세계의 어떤 다른 '제국-식민지'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모든 제국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 인종도 문화도 다른 곳을 식민화했을 뿐, 혈연적 문화적 전통이 유사한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적은 없었다. 일본의 조선 식민화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더불어 '유이(唯二)'한 예외였고, 그래서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은 아일랜드를 매우 빈번하게 조선과 동일시했다.

일제는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서구 제국들의 사례를 참조하였으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조선 통치에 딱 맞아 떨어지는 모델을 찾을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였다. 일제가 식민지를 식민지라고 부르지 않기로 한 것, 프랑스적 동화 정책을 빌리면서도 일정한 변형을 주어야 했던 것은 이러한 조선과 일본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내지/외지라는 용어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일제 검열 당국은 식민 종주국을 부를 때 '일본'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고 '내지'라고 부르라고 강요했다. 조선과 일본은 이미 한 나라가 되었는데, 본토만 떼어내어 일본이라 부른다면 합방을 부인하는 언어라는 것. 하지만 오랫동안 일본을 '문명 밖의 땅'으로 간주해온 조선인들은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이런 강요에 다양한 방식의 우회로 반응했다.

'일본 내지'라는 복합어는 대표적인 검열 우회어였다. 금지어('일본')와 권장어('내지')를 결합시켜서 기묘한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비합법과 합법의 경계에 있는 이 용어는 조선인들에게 폭넓은 호응을 받았고 계속 확장되었다. '조선 내지' '몽골 내지' '중국 내지' 등등. 이렇게 되면 '내지'라는 단어의 일본적 용법 속에서 존재했던 문명의 위계화란 실종되어 버린다. 모든 나라는 스스로에 대하여 '내지'라는, 평등성을 구현하는 용법이 정착된 것이다.

그러자 다시 새 기준을 만들어 금지했다. "내선(內鮮) 관계 문자 사용에 대하여 (…) '일본 내지' '일본 내지인(日本 內地人)' 등을 썼으나 금후는 '내지' '내지인' 등으로 쓸 것(<편집에 대한 희망 및 그 지시 사항>, 1939). 일제 말기로 가면서 검열 우회어들은 점차 힘을 잃고, 내지/외지의 구분은 일제의 요구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문들은 침략 전쟁에 나선 일본군을 '일군(日軍)'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점차 '아군'이나 '황군(皇軍)'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처 '내지 들어간다'는 표현은 일상화되었고, 해방 직후에는 '일본 들어간다'고 바뀌었다가 이제 '미국 들어간다'가 굳어져 가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강남 영어 유치원에만 가보면 '창씨개명'도 이미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영어 이름 하나 가지는 게, 그리고 유치원생들이 서로를 그렇게 부르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강남 유치원 어린이들은 한국 이름은 서로 잘 모른다나.

권력이 특정한 용어를 자기 입맛에 맞게 바꿔 쓰라고 강요하는 검열은 이후에도 물론 지속되었다. 대표적인 것 하나만 보자면, 노동자를 '근로자', 즉 '열심히 노동하는 자'라는 뜻으로 바꿔버린 경우. 식민지 시기까지도 '노동자'라는 가치 중립적인 단어를 썼지만, 해방 이후 남북 대결 체제 속에서 수난을 겪게 되었다. 물론 박정희의 작품이다. 1963년 그러니까 5·16 쿠데타를 일으킨 2년 뒤부터 그는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꿔치기했다. 사회주의적 냄새가 강하게 난다는 것이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운운을 소위 '혁명 공약'으로 내걸면서 공산주의자였던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려 했던 자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로서의 자기 노동을 자본에 판매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기결정권으로서 파업권 단결권 단체교섭권들조차 거의 온전히 부정되었다. 오로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하라는 강요이다. 자본은 온갖 '자유'를 누렸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몸뚱이에 대해서조차 자기 결정권을 부정당한 것이다.

▲ 2012년 구글의 노동절 로고. ⓒgoogle.com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글에서는 올해 노동자의 날을 맞아 메인 화면의 로고를 바꾸었다. 노동자가 구글 로고를 떠받치고 있는 이미지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떠받치는 것인지 억눌리고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노동자를 육체 노동자로만 한정짓는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 등의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노동절을 뭔가 기념해야 하는 날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만은 긍정적이다. 우리 포털 사이트는 크리스마스나 한글날 등을 맞으면 메인 화면을 바꾸면서도 노동절에는 아무 변화가 없지 않은가. 예수는 목수, 즉 노동자 아니었던가.

만일 한국의 어떤 포털 사이트가 노동절을 맞아 메인 화면을 바꾸면 반응은 어떨까. '좌파/빨갱이'라는 인식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는 단지 포털 사이트의 무감각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노동과 노동절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의 문제가 아닐까. '노동자'는 '불온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자기 스스로를 불온한 자로 인식하도록 만든 검열 권력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불온이지만, 그 불온은 이처럼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노동자라는 단어는 또한 육체 노동자로 한정되었다. 누구도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표상으로서의 노동자. 무식함, 가난함. 술에 절어있고 아내를 두들겨 패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자들의 이미지. 그렇게 되기 싫어서 젊은이들은 공부라는 이름의 살인적 학습 노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교사나 교수, 화이트칼라들은 결코 노동자일 수 없다는 뿌리 깊은 편견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 노동력을 임금과 교환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의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한국에서 그리 많지 않음에도. 자본가와 자영업자를 제외하고는 없음에도 그렇게들 인식한다.

이렇게 한국의 노동 계층은 근로자와 노동자로, 또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로 나뉘어 분할통치라는 전형적인 식민 통치술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가, 1987년 봄 민주화 대항쟁의 주역이었던 '넥타이 부대'는 8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동조하고 지원하기보다는 거의 완전히 외면했을 뿐이다.

'미국 들어간다'와 '근로자'라는 어법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시작되었지만 교묘하게 연결된다. 미국 들어가는 자들, 자본과 권력과 지식을 지닌 한국인들이 그것을 지니지 못한 한국인들, 즉 '외지'에 사는 한국인들을 '노동자'로 밀어내는 형국인 셈이다. 소위 '내국적 식민지'이다. 프란츠 파농은 '자기의 땅에서 유폐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건 자기 땅에서, 자기 말에 의해서, 자기 동족에 의해서, 소외당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노동절은 1994년 다시 5월 1일로 환원되었다. 노동계의 끈질긴 요구 덕분이었다. 물론 이름은 여전히 '근로자의 날'이지만 날짜만은 제자리를 찾았다.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항쟁을 피로 진압했던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을 기념하는 의미를 되살린 것이다. 하지만 '내지/외지'의 구분은 그대로이다. 아니 더 이상 권력의 강요는 없어졌음에도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미국에 '들어가면' 무조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에 '들어갈' 수도 있다. 시카고에서 핸콕 센터 구경이 아니라 헤이마켓을 보고자 한다면 '들어갈' 수도 있다. 그곳은 노동 운동의 세계적인 한 '중심'이므로, 청계천의 '전태일 광장'만큼이나 중요하다. 미국의 멕시코 침략 전쟁에 내 돈이 쓰인다면 납세할 수 없다면서 투옥을 감수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호수를 느끼기 위해서라면 미국에 '들어갈' 수도 있다(널리 알려진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湖島)>는 우리나라에는 그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로만 소개되었지만, 바로 이 소로우의 월든 호수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미국 들어간다'는 이런 맥락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저 미국의 모든 것은 세계의 중심이며, 본받아야 할 모범항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섬겨야 할 '중심'은 변해갔지만, '내가 사는 지역은 변방에 불과하며 나 또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만은 유구한 셈이다.

억압당하는 자가 자기 스스로를 열등한 자로 인식하고 타자화하도록 만드는 검열은 꽤 오래된 것이다. 중세에는 '쌍놈'이어서, '전생에 죄를 지어서', '어쩔 수 없는 팔자 소관'이라고 인식하도록 세뇌했다. 근대 이후로만 따지더라도 '내지/외지'의 구분은 100년이 넘었고, 박정희가 검열을 통해 만든 노동에 대한 불온시의 감각 역시, 노동절 용어 변경에서만 따지더라도, 벌써 50년이 지났다. 오래된 검열은 일상화되고, 일상화된 것은 우리의 무의식으로 자리 잡는다. 훨씬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간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검열 기준이란 지속적으로 바뀌었다. '일본'만 금지하는 게 아니라 '일본 내지'까지 금지하는 식으로 금지어 목록은 계속 길어졌지만, 언어는 무한한 자원이므로 그때마다 검열 우회어는 새로 만들어졌다. 금지들이 대중들에게 수용되지 못할 때 지속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중들에 의해 수용되지 않는 검열이 무슨 소용이랴.

게다가 검열 기준은 검열 당국만이 만드는 게 아니다. '황국신민서사'가 '국민교육헌장'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결국은 폐기되지 않았던가. '한나라당'이라는 용어를 대중들이 금지어로 규정해버릴 때 그들은 이름을 바꾸지 않았던가. '근로자의 날'과 '미국 들어간다'를 대중들이 더 이상 수용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바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단지 용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고 사고의 변화는 현실의 변혁을 추동한다. 그래서 김춘수는 <꽃>에서 이렇게 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노동자가 '꽃'이 되는 세상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자랑스럽게 부르기 시작할 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외치기 시작할 때, 그리고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니 '최선의 선택'이니 하는 자가 '선택'되지 않을 때, 그 때 비로소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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