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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인들은 '100일'을 기념할까?

[숨 고르는 100]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

2010년 7월 31일 창간호를 낸 '프레시안 books'가 2년 만에 100호를 냅니다.

이번 프레시안 books는 100호 그리고 2주년을 자축하면서 숫자 '100'을 열쇳말로 꾸몄습니다. 또 100호를 내면서 프레시안 books 100년을 상상합니다. 2013년 100주년을 앞둔 일본의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을 찾아가고, 100년이란 시간을 견딘 서점, 도서관 등을 둘러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필자는 자신의 추억과 '100'을 엮은 글을 선보입니다. 여러분도 프레시안 books가 펼쳐 나갈 100년을 함께 지켜봐 주세요. <편집자>

어렸을 때 나는 산수에 젬병이었다. '수의 세계에는 반드시 답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대신 산수에 젬병인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수와 도형의 질서 바깥에서 쓸데없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0은 왜 이렇게 생겼지? 삼각형과 사각형에게는 세모와 네모라는 딴이름이 있는데, 오각형과 육각형에겐 왜 없지?

그런 의문들은 산수에서 수학으로 넘어간 뒤에도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가령 확률과 통계에 특별히 젬병이었던 나에게 사뭇 그럴싸했던 의혹이자 딴죽은, "왜 하필 '백'인가?"였다. 수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전체를 100으로 친다. 예로 드는 데이터 값이 아무리 복잡한 수치들로 이루어져 있어도, 계산을 하려면 결국 100이라는 척도로 환산해야 한다.

아니, 대체 100이 뭐길래? 44나 77같은 수를 기준으로 하면 안 되나? 계산이야 훨씬 복잡해지겠지만, 어차피 수학에는 답이 있는 법이라며! 물론 조금도 논리적이지 않은 이런 망상을 펼쳐봤자, 남는 건 100으로부터 아스라이 멀어지는 수학 점수뿐이었다. 어쨌건 백분율의 법칙이 통치하는 한, 수학에서 숫자 100은 '이미-영원히' 합의된 약속처럼 보였다.

수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100은 인간 세계에서도 강력한 척도의 단위로서 등장한다. 심지어 때로는 '가치체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대중문화의 영역 곳곳에서 백분율의 레토릭이 소비자의 심리를 자극해 온 것을 보라.

한때 '2프로 부족할 때'라는 음료가 누린 (그 카피의) 선풍적 인기도, 오렌지 주스라면 너나없이 우려먹는 '100퍼센트'라는 클리셰도, '1퍼센트의 아기들'만을 위한다는 이유식이 99퍼센트의 모든 엄마들의 지갑을 열게 하는 블랙 코미디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만점, 완벽, 혹은 1등이라는 말로 대체 가능한 100퍼센트라는 이름의 완전체. 그리고 그 완전체를 향한 우리의 불가항력적 욕망과 판타지.

판타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임홍빈 옮김, 문학사상 펴냄)라는 소설 제목은 또 어떤가? (눈치 채셨겠지만,)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다.

▲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이노우에 마사지 글·그림, 정미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영원히 분분할 문제일 것이다. 허나 이런 경우엔 수학에서 백분율이 누리는 권위가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차후에 그 영향력은 '100'이라는 수 자체에 점점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부여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이어갈 부부의 연을 백년해로라 일컬을 때 의미상 100년은 '죽을 때까지'가 된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에서 100년은 몇 대 가문의 탄생과 소멸을 거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나긴 세월이다. 명망 있는 옛 시인이나 음악가의 탄생 백주년이 되면, 사람들은 그들의 시와 음악을 다시금 꺼내 읽고 듣는다.

그뿐인가? 연인들은 첫 만남으로부터 100일째 되는 날을 이유 없이 자축하고, 어머니들은 새벽마다 100일 기도를 나가신다. 셈의 규칙을 떠나, 우리는 분명 숫자 100이라는 단위가 제시하는 특정한 시간의 덩어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프레시안 books'도 마침 100회를 맞았다. 특집 청탁을 받고 곰곰 돌이켜보니, 지난해 초 '프레시안 books'에 '책 100권 읽기'를 타이틀로 독서를 권장하는 머리기사가 올라왔을 때, 그 숫자 '100'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던 일도 새삼 기억났다.(역시 어디서건 그놈(?)의 숫자 100이 말썽이다.)

전형적인 작심삼일형 인간인 나는 장기간 프로젝트를 성공해 본 사례가 거의 없다. 하지만 비슷한 시도는 있었다. 몇 년 전 여름, 폭염의 기간을 대형서점 어린이 코너에서 보낸 적이 있다. 한번 가면 죽치고 앉아 그림책과 동화책만 몇 시간씩 들여다보다 오는 거다. 100권 독파를 염두에 두긴 했지만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모르겠다. 다 헤아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수십 권을 읽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참고로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주변의 어린이 고객들을 개의치만 않는다면, 힘 안 들고 돈 안 드는 꽤 괜찮은 피서 방법이기도 하다.)

그때 어린이 고객들의 무시무시한 독서 방해 공작 속에서도 유난히 마음에 남았던 책 중 하나가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이노우에 마사지 글·그림, 정미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다. 마을 과일가게에 사과 한 개가 놓여 있는데,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과를 보며 한마디씩 한다.

의사는 아침에 먹는 사과와 건강의 관계에 관해. 화가는 사과가 띠고 있는 빛깔에 관해. 출근하는 회사원은 아무 말 없이 헐레벌떡 사과 곁을 지나간다. 그러는 동안 한 개였던 사과가 순식간에 백 개의 사과가 된다.

여기서 '된다'는 건 물론 순전히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다. 모든 사물은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에서 '하나라도 백 개인 사과'가 남기는 여운은 제법 길다. 독자로 하여금 '하나'와 '백 개'의 사이를 무한의 레이어로 채우게 하고, 또 백 개 이후를 계속해서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책 속의 사과가 하나이면서 백 개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과는 백 개에서 끝나지 않고 천 개가 되고 만 개가 된다.

어린이를 위해 그려졌지만, 한 권의 그림책이 전하는 말은 이런 유의 인지적 충격에 식상해진 어른에게도 때로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100이라는 숫자에 매달리는 건 그 상징성 때문에, 혹은 100이 큰 값의 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숫자가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숨 고르기'의 기회, 혹은 '돌아보기'의 기회. 그리고 그 계기가 하필 100인 건, 글쎄 그건, 순전히 우연이거나, 별 이유 없거나, 아니면… 악의 없이 벌이는, 숫자와의 '짜고 치는 고스톱'일 뿐이라고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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