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이던가, 전국역사학대회의 공동주제를 '통일시대의 역사학과 역사교육'으로 기억한다. 발표자 중 정현백 교수가 독일 통일과 관련된 내용을 발표했는데, 어떤 대목에서 의외의 이야기로 대다수 청중에게 웃음을 이끌어냈다. 독일 중등교육에선 독일사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데, 그것이 통일을 쉽게 만든 한 가지 조건으로 지목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 이야기가 의외였는데, 요즘 상황에서는 쉽게 수긍이 간다. 통일이나 북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에게 포용적인 태도와 대결적인 태도가 각각 진영을 이루고 있고, 두 진영 사이에는 의혹과 불신이 넘쳐흐른다. 건너편 진영을 '악의 집단'으로 여기는, 대단히 공격적인 태도가 많다.
이 공격성이 양쪽 다 나름대로 '민족'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포용파는 대결파에게 민족 사랑이 없어서 관계 악화를 꾀한다고 의심한다. 한편 대결파는 민족을 상쟁의 길에 몰아넣은 권력, 지금까지도 북녘 동포들을 질곡에 묶어놓고 있는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며 포용파가 이 권력을 도와준다고 비난한다.
양쪽 다 일리 있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서로 의심만 하고 비난만 하기보다 무릎을 맞대고 의논해서 입장을 다듬어봐야 할 것 아닌가? 포용을 하더라도 핵무기는 안 된다든지, 대결을 하더라도 식량 문제는 보장해야 한다든지. 그런데 그런 대화의 노력보다는 극단적인 의심과 원색적인 비난만 판을 치고 있다. 이 대결적 태도가 통일 담론의 발전을 가로막는 대목들을 보며, 독일에서 '민족 사랑'을 앞세우지 않기 때문에 통일이 쉬웠다는 이야기에 수긍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양쪽 진영에 들어 있는 약간씩의 불순분자에 있다. 포용파 중에는 실제로 민족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조직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결파에서 "뼛속까지 친미-친일"인 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아 온 것은 진즉부터 분명히 드러나 있던 사실이다.
▲ <통일을 보는 눈>(이종석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
민족주의는 원래 양날의 칼이다. 순박한 민족감정에는 사회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드는 약효가 있지만 지나치게 격화될 때는 대립과 반목을 키워주는 독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20세기 내내 자연스러운 발전이 가로막힌 식민지체제와 냉전체제에 묶여 있는 동안 전투적 성격을 내면화해 왔다. 그래서 불순분자들의 농간에 쉽게 휘말리는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 이승만, 김일성, 모두 죽었건만...
64년 전의 분단건국 이래 통일은 한국 민족주의 최대의 과제로 존재해 왔다. 이 과제에 대한 인민의 염원이 해방전쟁이니 북진통일이니 주체사상이니 유신이니 인민을 괴롭히는 온갖 짓에 악용되어 왔다. 민족주의 정서를 가진 일반인도 '통일'이니 '민족'이니 하는 말을 불쑥 들으면 일단 마음이 불편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 과제의 실제 의미도 변화를 겪었다. 분단건국 직후, 한국전쟁 때까지만 해도 통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분단은 너무나 엉뚱한 것이었다. 그런데 60여 년을 분단 상태로 살고 보니, 엉뚱하기만 하던 그 상태에도 나름대로 틀이 잡혔다. 이제 통일 과업에는 60년 동안 자리 잡은 틀을 바꿔야 하는 부담이 얹혀 있다.
"우리는 원래 한 민족이니까." 분단 직후에는 그렇게만 말하면 됐다. 소매치기를 그 자리에서 붙잡았을 때 "이건 원래 내 물건이야"라고 말하면 되는 것처럼. 그러나 60년이 지난 뒤에 소유권을 회복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 동안 있었던 사정을 모두 감안해야 한다. 그 물건을 꼭 되찾으려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트루먼도 스탈린도 이승만도 김일성도 모두 죽었다. 60년 전 통일을 직접 가로막던 장벽은 그 동안 사라지거나 힘을 잃었다. 지금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그 동안 만들어진 장애물들이다. 60년 전의 장벽은 밖에서 씌워진 것이었는데, 지금의 장애물은 남북한 사회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외부의 압력이 통일을 가로막을 때는 민족주의의 힘으로 그 압력에 저항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내부에 있는 장애물을 치우는 데 민족주의를 앞세우면 일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를 오래 지내는 동안 민족주의가 여러 가지 기괴한 형태로 자라나 서로 충돌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 마음에는 민족의식이 한 몫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통일 과정의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민족의식을 좀 내려놓고 이 과제를 허심탄회한 눈길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민족의식을 너무 앞세우면 "이래야 한다", "저러면 안 된다"하는 당위성에 얽매이기 쉽다. 최대한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 복합적인 과제의 모든 측면을 두루 살피면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정책 결정 하던 방식으로 독자 설득에 나선 이종석
이종석의 <통일을 보는 눈>(개마고원 펴냄)이 이런 필요에 부응하는 책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일-북한문제에서 유난히 비합리적 요소들이 활개를 치기 때문에, 나는 무엇보다도 진보-보수 이전에 상식과 합리성에 기초해서 이 문제들을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통일-외교-안보분야에서 발생한 기존의 쟁점들을 상식과 합리성의 기준을 가지고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 편견이나 선입관에 가려서 보지 못해온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이를 직시하지 않고는 우리 공동체의 발전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9쪽)
이종석은 세종연구소에서 오랫동안 북한 연구에 종사했고 참여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사무차장과 통일부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햇볕정책의 지지자와 담당자로서 진영 논리로는 포용파로 몰릴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감정에 따라 편파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상식과 합리성의 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역설한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 그에게 민족주의 정서가 아주 없진 않다고 나는 판단하지만, 그런 정서가 연구원과 관료로서 역할에 지장을 일으키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였다고 본다. 그를 연구원이나 관료로 발탁한 임명권자들도 그의 민족주의 정서가 아니라 합리성과 능력을 보고 임명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을 <통일을 보는 눈>을 보며 확인한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통일이라는 과제를 상식적, 합리적인 기준에서 살펴보기 좋도록 적절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제시한 데 있는데, 이 책을 쓰느라고 갑자기 정보를 그런 식으로 모아 정리한 게 아니다. 연구원직과 관직에 있으면서 늘 정보를 활용해 온 방식대로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정책결정자를 설득하거나 스스로 정책을 결정하던 바로 그 방식으로 이제 독자들을 설득하러 나선 것이다.
북한에 관한 정보의 유통이 많이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도 제약이 많다. 또 제도적으로는 풀려 있어도 북한 얘기만 나오면 노이즈가 너무 많이 따라서 일반인에게 정보 습득이 어려운 문제도 있다. 연구원과 관료로 오랫동안 큰 책임을 수행해 온 저자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정보를 공들여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북한과 통일에 관한 생각의 안정된 발판을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다.
책 내용의 설명 없이 내 하고 싶은 얘기만 너무 길어졌다. 10개 장, 41개 절로 이뤄진 책인데, 장 제목보다 절 제목이 더 친절하다. 특히 영양가 높다고 여긴 몇 개 절의 제목을 옮겨놓는다. 제목 앞의 숫자는 장과 절을 표시한 것이다.
1-2 사회주의 붕괴와 북한경제 위기
1-4 중국에 점점 의존하는 한국경제
2-3 막대한 통일비용 때문에 통일을 반대한다?
3-3 남한-북한-중국이 윈윈하는 황해경제권
4-2 분단비용, 얼마나 되나?
4-4 통일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5-3 우리 안의 모순을 극복하자
6-2 국민소득 1000달러인 북한에서 웬 아사자?
7-3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 군대의 나라
7-4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 위기의 나라
8-2 김정일은 어떤 지도자였나?
9-1 진화하는 포용정책, 어디로 가야 하나?
9-2 '다름'이 공존하는 한반도
10-2 중국의 성장, 위협인가 기회인가?
10-3 왜 동북아 다자협력체가 필요한가?
접어놓은 민족의식, 언제 어떻게 펼치나?
저자는 이 책에 두 가지 소망을 담았다고 한다. 하나는 통일의 필요성을 젊은 세대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설명이다. 분단이 고정된 뒤의 세상만을 살아온 젊은 세대일수록 민족의식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납득시키려면 민족주의에 의지하지 않는 설명이어야 한다.
또 하나의 소망은 진보-보수에 관계없이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이다. 충분한 근거 위에 합리적 설명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용적 기준으로 우리 사회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것이다.
저자 개인에게는 나름대로 민족의식도 있고 정치이념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의식도 이념도 내세우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노력에 대해서는 합격점을 주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목적의식을 가졌다면 '통일' 아닌 다른 말을 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 권하고 싶다. '통일'은 오랫동안 당위의 의미를 강하게 띠고 쓰여 온 말이다. 전쟁과 분단의 경험이 절실한 사람에게는 피 냄새까지 나는 말이다. 당위가 아니라 실용적 기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면 '화해'처럼 당위성이 느껴지지 않는 말을 쓰고, '통일'은 단일국가로의 통합만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화해'와 '통일'의 중간에 '통합'의 한 단계를 더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라도 '화해'의 필요성을 납득할 것이다. '통합'에 바람직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책 한 권의 목적으로 그것이면 충분하다. 화해가 이뤄지면 통합이 자연스럽게 진전될 것이고, 그에 따라 '통일'에 대해 진지한 생각도 저절로 늘어날 것이다.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는데, 써놓은 것을 훑어보니 너무 착한 서평이 되었다. 예의상으로라도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대목을 하나는 짚어놓아야겠다.
우리는 흔히 통일을 민족공동체의 복원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남과 북은 오랫동안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왔지만,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를 형성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통일은 과거에 전재했던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되었다. (102쪽)
근대화 이전 민족국가의 의미를 너무 작게 본다. 한민족은 전 세계에서 민족국가를 제일 오랫동안 누려온 민족이기 때문에 분단 상태를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정도가 심하다. 민족국가 1천년의 기억은 우리 언어와 문화, 습속에 두루 배어 있다. 근대국가가 아니었다 해서 민족국가의 기억에 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절되어 있는 지금 그 기억이 막혀 있지만 화해를 통해 접촉이 늘어나면 잊을 수 없는 그 맛이 되살아날 것이다.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종석의 믿음이 나보다 물렁한 편이라고 생각해 둔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의 결함은 아니다. 접촉의 길을 일단 열고 보자는 지금 단계에서는 오히려 더 넓은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의 민족정체성이 얼마나 크고 깊고 힘센 것인지, 접촉의 길이 넓어지면서 저절로 확인될 것을 기다려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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