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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타일 아닌 그이, 왜 자꾸 생각날까?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떼>③

숙을 처음 만났을 때, 용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내 스타일이 아니야. 꾸밀 줄도 모르고 섹시하지도 않고 선머슴 같은 숙은 전혀 용의 이상형이 아니었다. 조금도 매혹되지 않았기에 용은 그녀에게 만만하게 대하고 함부로 말하곤 했다.

함부로 대하다 보니 가끔은 미안해졌다. 미안하다 보니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관심을 가지니 의외로 괜찮은 모습도, 여전히 실망스러운 면모도 보게 된다. 괜찮건 실망스럽건 발견의 순간은 여운을 길게 남겼다. 매우 답답하게도 그녀는 십 년 간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최근에 그 누군가와 막 사귀려는 중이었다. 용이 보기에 그녀의 연애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걸 모르는 그녀는 딱 바보다.

용은 그녀만 생각하면 갑갑하고, 속 터지고, 안타깝고, 짜증스럽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녀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참 길다고. 갑자기 화가 난다. 어느 날 그녀에게 화를 냈고 그녀는 반격해 왔다. 그녀의 반격에 어이없어 하다가 그는 잠을 못 이룬다.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며, 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중얼거린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그녀는 미련 곰탱이일 뿐 내 스타일도 아닌데?

국민 드라마라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이숙과 재용의 사연을 각색해 보았다. 애초에 '재수 없어' 하던 그녀와, 그는 사랑에 빠졌다. 왜 그랬을까?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떼>(민용태 옮김, 창비 펴냄)에 답이 있다.

혹사당한 마음, 사랑에 빠지기 일보 직전

재용과 비슷한 심리에 빠진 인물이 지난 회에 등장한 로따리오다. 지난 회에서 봤듯 안셀모는 둘도 없는 친구 로따리오에게 아내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까밀라가 기회를 갖지 못해서 정숙한 것인지, 누군가 유혹해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정숙한 것인지, 안셀모는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셀모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로따리오와 까밀라는 정말로 사랑에 빠져 버렸다.

▲ <돈 끼호떼>(미셀 데 세르반떼스 지음, 민용태 옮김, 창비 펴냄). ⓒ창비
처음에 로따리오는 친구의 제의에 화를 내다가, 마지못해 임무를 맡았다. 로따리오는 애초에 정말로 까밀라를 유혹하고 싶지 않았다. 안셀모의 제안은 한 마디로 미친 짓이었으니까. 결국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수락하긴 했지만, 시늉만 하려고 했다.

안셀모는 유혹의 기회를 넘치게 마련해준다. 그래도 로따리오는 까밀라를 유혹하지 않았고 후에 유혹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한다. 그러다가 로따리오는 진심으로 까밀라를 욕망하게 된다. 로따리오는 어찌하여 의도와 다르게 죽마고우를 배신하게 되었을까.

로따리오의 심리에 대한 르네 지라르의 유명한 해석.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 까밀라를 간절하게 욕망하는 안셀모의 욕망을 모방하여, 로따리오는 까밀라를 욕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해석. 안셀모는 로따리오에게 까밀라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마련해주며 유혹을 부추긴다. 이 기회는 로따리오에게 다중으로 분열된 의미를 띤다. 유혹은 그에게 명령된 것이지만, 그 자신은 거부하는 것, 그러나 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는 까밀라를 유혹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지만 결사적으로 유혹을 금지해야 하며, 그럼에도 유혹했다고 거짓으로 고해야만 한다. 이런 혼돈 혹은 정신적인 혹사가 로따리오를 사랑에 빠트렸을 것이다.

안셀모의 해괴한 제안 이전에, 아무런 감정 노동을 하지 않았을 때 그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까밀라를 두고 복잡다단한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자, 감정 노동은 곧바로 사랑으로 진화했다.

분열로 찢겨진 혼란스러운 감정 노동은 사랑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랑이 먼저고 이후 분열적 혼돈이 온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순서가 바뀔 수도 있다. 분열적 혼돈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랑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짜증을 부렸다가 미안해했다가 관심을 두었다가 다시 실망하는, 이렇게 뒤집기를 반복하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될 때, 혹은 누군가 그를 사랑하라고 부추기는데 사랑하고 싶지 않거나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때, 이런 뒤얽힌 감정 노동은 사랑으로 연결되기 쉽다.(단순한 예로 싸우다가 정든다는 말이 있다.)

사랑은 아닌데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 내 마음을 분주하게 일하게 하고 때로 혹사시키는 것, 이런 것과 사랑과의 거리는 상당히 가깝다. 사랑의 옛 우리말이 '상다(想多)'라는 말이 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단지 그 사람을 그리워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는 뜻만은 아닐 터이다. 어떤 식으로든, 의아함이든 미움이든 짜증이든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면, 그것은 사랑으로 이어지기 쉽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리비도의 집중 현상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집중된 에너지는 사랑으로 흐르기 일보 직전이다. 그러니 당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을 조심하시라.

소문이 창출해 낸 사랑

염소치기 에우헤니오가 들려준 무척이나 매력적인 이야기. 에우헤니오와 안셀모는 미녀 레안드라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둘 모두를 거절한다. 수많은 구혼자들을 물리친 콧대 높은 레안드라는 비센떼에게 반하여 함께 도망친다. 하지만 사흘 후 그녀는 모든 것을 그에게 도둑맞고 버려진다. 아버지는 그녀를 수도원에 감금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레안드라가 사라지자 에우헤니오와 안셀모는 살아갈 의욕을 잃고 마을을 떠나 산골짜기에서 양과 염소를 키운다. 목동이 된 두 사람은 함께 아름다운 레안드라를 더러는 칭송하고 더러는 비난하는 노래를 부르며 다닌다. 그들을 본 따서 레안드라의 수많은 다른 구혼자들이 산중으로 들어온다. 그들의 수가 하도 많아서 그곳은 목가 천국 아르까디아나 다름없게 된다.

모든 곳이 가축우리와 목동들로 가득 차고, 곳곳마다 아름다운 레안드라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 없을 정도니까요. 어떤 사람은 그녀를 욕하고, 바람둥이라느니 변덕쟁이라느니 부정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경솔한 여자, 쉬운 여자로 몰아붙이기도 하지요. 어떨 때는 그녀가 죄가 없다고 용서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녀를 벌하고 비난을 퍼붓기도 하고, 어떤 이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자질을 부정하지요. 결국 모두가 그녀를 욕하고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지요. 그 광기가 하도 많이 퍼져나가서 어떤 사람은 그녀와 말 한번 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소연하기까지 한답니다. 그녀는 누구에게 질투를 주어본 적도 없지만, 미칠듯한 질투로 병들어 울고 다니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렸듯이 자기가 욕심을 내기 전에 이미 자기가 앓을 병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1권 739~740쪽)

흥미롭지 않은가. 레안드라에게 버림받은 구혼자들이 그녀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며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또 다시 그녀를 칭송하다가 비난한다. "결국 모두가 그녀를 욕하고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정말 희한하게도, 그 광기가 퍼져 나가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그녀에게 버림받았다고 하소연하고, 미칠듯한 질투로 병들어 운다.

이토록 거대한 집단적 사랑 혹은 광기를 만들어 낸 것은 레안드라에 대한 논쟁과 비난이다. 담론은 없는 사랑도 만들어 낸다. 누군가를 두고 비난과 옹호를 교환하며 갑론을박하는 담론을 접한 사람은 그 누군가에 감정적·이성적 에너지를 쏟게 된다. 앞서 말했듯, 집중된 에너지는 쉽사리 사랑으로 둔갑한다. 담론이 사랑을 창출한다.

말을 바꾸어 보자. 소문이 사랑을 발명해 낸다. 이것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인간 본성의 한 사례도 될 것이다. 무엇을 욕망하는 타인들이 너무나 많을 때, 그 욕망을 모방하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때 욕망의 대상의 실체는 없다. 레안드라의 실체는 비밀에 감싸인 채 단지 그를 향한 타인들의 욕망만 무성하다. 인간 본성이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는 욕망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남들이 그것을 욕망하므로 따라서 욕망할 뿐이다. 가령 부(富)의 실체를 모르면서 남들이 부를 원하므로 우리는 부를 소망한다.

사랑하는 자는 어떤가. 상대의 실체를 알지 못하면서, 또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욕망한다. 우리의 욕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대상의 실체가 아니라 대상을 둘러싼 소문이다. 대상의 실체는 수도원에 갇힌 레안드라처럼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군중이 욕망하는 것은 또한 레안드라가 아니라 레안드라로 인해 고통 받는 타인의 감정이다. 군중은 레안드라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녀에게 버림 받은 사람들처럼 고통 받고 슬퍼하고 싶은 것이다. 부유함을 쫓는 사람이 부의 실체를 모르면서 실제로는 다만 뻐기기를 원하듯. 명문대의 실체를 모르면서 실제로는 다만 으쓱해지기를 원하기에 명문대를 꿈꾸듯. 우리는 종종 실체보다는 그 부대 효과를 더욱 욕망한다.

한편 여기에서 군중은 알지 못하는 레안드라를 사랑한다는 환각에 빠져 있으나 '실제로' 질투하고 슬퍼한다. 소문 속에서, 환각은 현실이 된다. 가짜 욕망도 우리를 아프게 한다. 내용이 사라진 채 허울로만 존재하는 욕망. 그 허울을 좇으면서도 사람들은 울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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