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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비정규직 목소리, 왜 늘 비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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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비정규직 목소리, 왜 늘 비장할까?

[프레시안 books]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현장을 통해서 말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거기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이 다채로운 방식으로 드러나고, 공간이 주는 권력관계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통계를 통해서, 그리고 공식적인 자료를 통해서 볼 수 없는 뭔가가 있다. 또 다른 한 편 거기에는 스토리가 있다. 노회찬의 '유령론'처럼 구태여 찾아보자면 볼 수는 있지만, 일상을 살다보면 도무지 포착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의 조선소 체험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인력대행업체를 통해 비정규직 사내협력사 노동자로 채용되어 조선소 야드(현장)에서 일을 하던 허환주의 노동일기, 그리고 이어지는 분석. 위험함, 고됨, 사람대접 받지 못함. 조선소 주위에 있는 상황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뭐랄까? 기사에 등장하는 모든 하청 노동자들은 목소리가 없었다. 고작해야 구시렁대는 소리, 기껏해야 점심 먹을 때 빨리 먹고 1분 1초라도 더 쉬기 위해서 식당으로 달려가는 노동자들의 모습만이 그려졌다. 작업은 고되고, 그들의 얼굴은 일그러져만 있을 법 했다. 모두에게 정시 퇴근도 없을 것만 같고,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에 나오는 것 마냥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기만 하면서 자신을 망가뜨리고만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눈에는 조선소 주변 식당에서 이른 저녁부터 소주 한 잔을 걸치면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연애에 대해서 '음담패설조'로 떠들고, 자신들의 살아온 역사에서 대해서 장광설을 펼치며 소주잔을 잽싸게 털어 넣는 젊은 노동자들의 재치 있는 입담이 먼저 떠올랐다. 그 협력사 노동자들은 같은 사람들이 맞는 걸까, 아닌 걸까?

비슷한 경우는 또 있는 것 같다. 2008년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당시 나왔던 책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권성현,김순천,진재연 엮음, 후마니타스 펴냄)가 그랬다. 집에서는 좋은 엄마이고 싶은데 잘 안 되고, 직장에서도 즐겁게 일하고 싶은데 잘 안 되고. 악덕 고용주, 자본가들은 점점 앉아서 쉴 시간조차 빼앗고 야근을 강요한다. 집에서 남편과도 싸우게 되고, 아이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이렇게 질 수는 없다. 비장해진다.

점점 유령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을 만났던 <부서진 미래>(김순천 등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의 경우도 그랬다. 또 하나의 민중가요가 떠오른다.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늘 울면서 시작해야만하나?

▲ <노동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부키 펴냄). ⓒ부키
질문이 생긴다. 언급한 책, 기사들을 읽으면서 어떤 감각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언급한 책과 기사들은 언제나 '공분'을 유도한다. 구조적 부조리에 대해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어서 말한다. 그 목소리들은 어느새 비슷해지고 오롯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위해서 '동원'된다. 물론 나는 비장하게 공분을 유도하여 세상의 문제를 바꾸려는 시도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래, '비장 르포'라고 부르자. 이러한 '비장 르포'들이 전하려는 목소리는 하나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목소리를 좀 더 '비참'하게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의 공분을 유도하여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다. 나는 그 의도에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별로 태클을 걸 생각도 없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오히려 나는 다른 두 가지 종류의 불만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저항의 정치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인류학적인 불만이다. 첫 번째 불만은 저자들과 기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글을 풀어낸다 해서 아무 것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다는 점이다. 숱한 촛불, 용산, 김예슬 선언, 반값 등록금 투쟁, 강정에서 발견한 어떤 '불가능성'과 '비장 르포'에서 느끼는 감정이 같다.

그리고 두 번째 불만은 서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목소리의 다양함이 온전히 제거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늘 불쌍하고 착한 사람들. 괴롭히려 드는 '악의 무리'같은 흡혈귀(자본가)와 깡패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협잡꾼들. 그 구도에서 선택의 여지는 전혀 없는 것만 같아 보인다.

소개하려는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최희봉 옮김, 부키 펴냄)은 '비장 르포'들과 전혀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런라이크의 서술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인 글쓰기를 제안한다.

<노동의 배신>은 '보편적 복지'(welfare)에서 '일하는 복지'(workfare)로 전환되던 미국 클린턴 정부(1990년대 중반)의 복지 '개악'의 시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노동의 배신>은 미국에 사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파견직·실업자·노숙자)의 이야기다. 집값이 비싸(서브 프라임 이전) 허름한 모텔을 렌트하고, '김밥천국'대신 월마트의 싸구려 음식을 사서 먹는다. 돈은 모이지 않고 언제나 뭔 일만 벌어지면 그나마 간신히 보전했던 자산은 곧바로 부채가 된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에서 싯누렇고 듬성듬성 빠진 이, 그리고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망가져버린 몸은 그러한 프레카리아트들의 삶을 정확히 묘사한다.

또한 우리는 이미 한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어디에서든 접할 수가 있다. 기자의 워킹 푸어 체험담인 <4천원 인생>(안수찬 등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이 대표적이다. '별 일 없이 산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불안정 노동에 구조적으로 노출되어있는 상황에 처한 프레카리아트에게는 '별 일'이 생각할 때마다 일을 열심히 해봐야 카드 값과 부채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

한국에서도 '생경한'이야기만은 아니다. 정규직 트랙에 안착하지 않고 조금만 겉돌아도 최저임금 시간당 '4580원 + 알파'를 벌어서 간신히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지만, 그 외에 아프거나, TV와 인터넷 외의 문화생활은 기대할 수 없고, 집을 사거나 변변한 전세를 구할 수 없다는 진실. 또한 그러한 불안한 심리를 이미 '영리'를 목적으로 금융화된 '보험자본'이 "안심하세요"라며 자극하고 빨대를 대고 쪽쪽 빨아먹는다는 불편한 진실.

하지만 에런라이크의 책을 2012년에 다시 읽는 마당에 느끼게 되는 감각은 '워킹 푸어'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아니다. 그건 바로 그녀가 택하는 연구 혹은 취재의 전략이다.

에런라이크는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이 전지구적으로 통용되고, 중산층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클린턴 정부가 호언장담하던 그 때 바로 '현장'으로 들어간다. 80년대의 '학출 노동자'처럼 '존재 이전'을 하진 않았지만, 이미 생물학 박사로 중산층으로 적절하게 자리를 잡은 그녀는 페미니스트이자 좌파로서의 '윤리'를 지키듯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준에서만 자신을 보호하고 현장으로 들어간다.

허스사이드, 제리스와 같은 식당에서는 웨이트리스의 입장으로, 메이즈와 같은 청소대행 업체에서는 청소부의 입장으로, 월마트에서는 여성복 담당 점원의 입장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간, 자신이 '연구자'나 '저널리스트'로 위에서 아래를 쳐다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상태와 상황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점검하고 분석한다는 점이다. '저널리스트 바버라'가 아닌 '월마트 점원 바브'의 입장에서 자신을 살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버라 자신의 위치설정 덕택에 <노동의 배신>은 빛나는 이야기들을 뿜어낸다. 바버라는 선행 자료를 통한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워킹 푸어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그들의 삶을 적어내려 가기에 한 가지 방향으로 환원되는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메이즈에는 임신을 했으나 남편이 원해서 일을 해야 하고, 또한 관리자에게 '인정'받음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품위'를 세우길 바랐던 홀리가 있고, 월마트에는 스탭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거만한 아시아계 여성이 있다. 그녀들의 삶의 목소리를 단순히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고만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가부장제의 논리를 이미 각인하고 있는 '명예-남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바버라는 그들에 대해서 손쉽게 판단하지 않고 유보하면서 독자에게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한 '성급한 개입'과 '판단'이 보류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좀 더 공평한 진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책의 출간 이후 복지와 최저임금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미국사회에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유보'가 가진 힘이다. 바버라의 주변 동료들에 대한 공감하는 시선은 소외되는 목소리들 자체를 다채롭게 펼쳐준다.

그리고 바버라는 '비장'하지 않다. 물론 시간당 7달러를 벌어서 주단위로 모텔비를 내고, 밥을 먹는 와중에 파스 값과 알레르기 약, 약물검사를 피하기 위한 약을 사먹는 돈 때문에 결국 적자가 나는 바버라 스스로의 상황에 대한 '익살스런'묘사가 훨씬 더 몰입도를 높인다. "왜 임금을 묻지 않았을까?"하는 자책을 통해서 우리는 은연중에 대형 마트의 고용관리 기법을 확인할 수도 있다.

분명 책에서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난하고, 하루를 지탱하기가 쉽지 않고, 이러면 안 될 텐데 하는 측은함을 주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바버라는 그것들을 손쉽게 '분노'로 끌어내지 않는다. 심지어 월마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방불케 하는 '선동'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유머와 해학은 잊지 않는다.

너무나 담담한 기술 덕택에 나오는 헛웃음이지만 그것들은 엉성한 체제의 허점들을 오히려 잘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서 있어야만 하고, 최적의 업무몰입을 위해 '시간 절도'를 막고 있는 월마트에서 갑자기 이탈해버렸을 때 아무도 잡지 않는 점에서 드러나는 '완벽해 보이는 체제'의 허점. <식코>를 보면서 부조리함에서 분노가 아닌 웃음을 짓게 되는 포인트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 사회과학자'혹은 '좌파 운동가'의 책을, 그들이 관찰했던 사람들은 잘 읽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숱한 노동자들이 에런라이크의 책을 읽고 영감을 받고 뭔가 움직일 여지를 찾아내곤 했었다.

'한 방'에 체제를 뒤집어야 한다는, 혹은 뒤집을 수 있다는 망상. 지금 이 시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부조리이며 '근본적이며 핵심적인 약한 고리'를 바꾸기만 하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관념. 나는 그러한 망상과 관념들에 대한 강박들의 시효가 만료했다고 본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한국판 시리즈의 제목처럼 '배신'. 뭔가 믿었던 것들이 다 붕괴해버렸을 때의 '배신감', 그리고 곧 이어 이어지는 '멘붕'(멘탈붕괴)로 인해 아노미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단 하나의 진실'을 통해 뭔가를 극복해보자 하는 시도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매번 굳어있는 표정을 짓기보다는, 좀 웃고 다양한 삶의 감각들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데 '비장 르포'들은 언제나 '절대악'의 세계를 타도하자는 식으로 귀결되고 안 그래도 '멘붕'한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줄 뿐이다. "내 삶의 피로의 근원이 정치라면…"하는 화법이나 "이 모든 원인은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는 식의 화법들은 이미 '멘붕'한 사람들의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할 수 있는'일들을 엮어내고 고립되지 않고 이슈로 만들고, 구체적인 것들을 명민하게 포착하는 것. 소외된 목소리들을 명랑한 목소리로 다채롭게 들려주고, 그 목소리들의 관계 안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지금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의 글쓰기에 환기시키는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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