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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와 극우는 정치 세력 아닌 정치 파괴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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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와 극우는 정치 세력 아닌 정치 파괴 세력!

[해방일기] 1947년 7월 6일

1947년 7월 6일

엊그제 정판사 사건에 관한 생각을 한 차례 정리했는데, 좌우 합작도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은 중요한 주제다. 마침 지난 주 '프레시안 books'에 장석준의 "좌우 합작의 실패,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다!"란 서평이 나왔다. 이 글을 보며 해방 공간의 좌우 합작 시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을 한 번 살펴본다. (☞관련 기사 : 좌후 합작의 실패,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다!)

장석준이 좌익의 입장을 표방하면서도 매우 균형 잡힌 시각을 취하는 것이 우선 반갑다. 물론 본인의 노력 덕분이지만, 그 동안 연구의 축적이 그런 시각을 뒷받침해 주게 되었다는 사실에도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균형에 별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을 명확한 실체로 파악하는 데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들이 있다. 한 장의 사진에 비유하자면 여러 이미지들이 그럴싸하게 배치되어 있기는 한데, 그 이미지들이 충분한 현실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적절한 깊이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춘 사진이라야 현실감을 주는 것이다. 해방 공간의 '극좌'와 '극우'를 정상적 정치 세력으로 보는 통념을 장석준이 그대로 따르는 데 불만을 느낀다.

'극우'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이익 집단이었다

과연 해방 공간에서 '극우'가 어떤 세력이었는가? 당시 극우의 존재를 뒷받침한 것은 반탁 운동이었다. 장석준도 "1946년 초에 폭발한 우파 진영의 반탁 운동에 상응하는 대중적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좌우 합작을 시도한 중간파(중도파)의 "치명적인 한계"로 본다. 그렇다면 반탁 운동의 정체를 파악해야 극우파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 회의 직후 터져 나온 반탁 운동은 <동아일보>의 선정적 '오보'로 촉발된 것이었다.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데 소련이 신탁 통치를 고집했다고 하는, '오보'라기보다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조작 기사였다. 반증이 없는 상태에서 이 조작 기사를 접한 조선인은 "소련의 고집만 꺾으면 즉시 독립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품고 맹렬한 반탁 운동에 나섰다. 우파만이 아니라 좌파 인사들도 이에 동조했다.

적성국 지역에 군사 점령과 신탁 통치를 행하는 것은 연합국의 일반적 방침이었다. 조선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 무렵에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도 나왔다. "선거 때 무슨 말을 못하냐?"고 하는 낯 두꺼운 정치인도 있거니와, 전쟁 중에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독립 약속에는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결속력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기 위해 남발한 공약의 성격이 있었다.

이 공약에 호응해서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적극 항쟁이 일어났다면 약속의 무게가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인도 조선인도 연합국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제국 해체를 위해 독립을 시키기는 해도 오스트리아인과 조선인의 만족을 100퍼센트 충족시킬 생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인은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고 10년간의 4개국 신탁 통치를 받아들인 반면 조선인은 "최고 5년"의 신탁 통치를 거부하다가 분단 건국에 이르렀다.

대중 운동이 아니라 동원 공작이 된 반탁 운동

미국이 오히려 더 긴 신탁 통치 기간을 주장했다는 3상 회담 실상이 몇 주일 후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반탁 운동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반탁'의 입장은 지키더라도 당장 운동을 벌일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후의 반탁 운동은 미소공위 좌초를 꾀하는 극우 세력의 도구가 되었다. 큰 각광을 받은 반탁 시위 하나가 1947년 6월 23일에 있었는데, 시위 자체는 규모가 작았다. 경찰의 비호와 조장 때문에 시위가 부각된 사실에 대해 미소공위 미국 수석대표 브라운이 불쾌감을 표했다.

조선신문기자회에서 1947년 7월 3일 오후 서울 시내 중요 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 조사가 있었다. 첫 항목이 "6월 23일 반탁 테러 사건은?"이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이렇게 보도되었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6일)

A 독립의 길이다. 651표(26%강)
B 독립의 길이 아니다. 1736표(71%약)
C 기권. 72표(3%약)


그 시점의 반탁 운동은 대중의 외면 속에 극우 단체의 동원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론조사에서 새 국호로 '조선인민공화국'이 70퍼센트의 지지를 받은 반면 '대한민국'이 24퍼센트 지지에 그친 것을 보면 상해-중경 임정에 대한 존경심이나 기대감도 크게 희석되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무리한 반탁 운동에 대한 염증이 아닐까 싶다.

평양에 있던 조만식은 가장 치열한 반탁 운동가의 하나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1947년 7월 1일 평양을 방문 중이던 미소공위 미국 대표단의 브라운 수석대표가 그를 만났을 때는 그도 신탁 통치를 받아들여야겠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1946년 초의 상황 인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그 사이에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극우 세력 중 가장 공개적으로 정치 활동을 펼치고 있던 한국민주당을 살펴보자. 1945년 창당 당시 한민당에는 김병로, 원세훈 같은 민족주의자들도 참여했다. 그러나 1946년 10월 한민당 주류가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시한 7원칙 중 토지 개혁 조항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하자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탈당했다.

그 후의 한민당은 엄밀히 말해서 '정당'이 아니라 한낱 '이익 집단'일 뿐이었다. 장석준은 중간파 정치 노선의 예로 백남운의 논설 두 편을 소개했는데, 이와 견줄 만한 정치 논설이 한민당에서는 나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민당의 모든 움직임은 친일파를 포함하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한 정략 차원에서 이뤄졌다.

'극좌' 역시 정치 활동을 외면한 집단이었다

1946~47년의 극우파는 인민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 활동을 외면하고 자파 세력의 강화에만 급급했다. 좌익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 활동을 외면한 극좌파가 대두했다.

장석준은 "좌우 합작을 둘러싼 좌파 내부의 논쟁 때문에 1946년 말의 자생적 대중 봉기에 정치적 구심점을 제시하지 못한 것도 뼈아픈 오류"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치적 구심점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제시한 것이 문제였다. 심지연은 <대구 10월 항쟁 연구>(청계연구소 펴냄) 40쪽에서 항쟁에 대한 좌익의 입장을 박헌영계와 반 박헌영계로 구분해서 요약했다.

박헌영계는 남한의 정치적 반동과 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항쟁이 발생했으며, 인민들의 투쟁은 정당하고, 인민 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사람의 석방과 아울러 박헌영 체포령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강진을 비롯한 반 박헌영계는 "군중 투쟁을 폭동으로 유도하거나 혹은 지도 부대로서 테러를 감행한 것은 우리 진영의 파괴를 유치하고 전위를 대중으로부터 고립하게 하고 국제 문제를 험악하게 하는 죄악"이라고 단언하고, 동지들의 폭동 선전과 선동으로 말미암아 대중 투쟁에 큰 손실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폭동 때문에 총파업이 위기에 처했고, 추수 투쟁도 막대한 지장을 가져와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올바른 지도자라면 폭동을 정당한 투쟁으로 인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테러를 조직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선동가라고 비난했다.


남로당과 민전을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계는 1946년 가을 인민의 불만이 최대한 격렬한 형태로 터져 나오도록 유도하는 데 힘썼다. 이 '신전술'은 인민의 불만을 해소시키기는커녕 미군정과 극우파의 반발을 불러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격렬한 반항이 승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많은 조직원과 지지자들을 희생시킨 이 전술은 좌익 내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정략적 차원의 선택으로 보인다.

헤게모니 장악에만 집착한 박헌영계

박헌영계의 활동은 시종일관 정략적 차원에 치중했다. 장석준은 "1946년 벽두에 반탁 운동이 폭발하고 5월에 미군정의 조선공산당 탄압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의 노선 역시 좌우 합작에 의한 임시 정부 수립"이었으며 "박헌영 노선과 여운형 노선이 갈린 것은 전자가 도중에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1946년 7월 '신전술'을 내걸기 전에도 박헌영계는 통일 전선에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없다. 박헌영이 일시 통일 전선에 다소 유연한 태도를 보인 것은 북한 지역의 정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서중석은 해석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45쪽)

정치 노선의 개발을 위한 노력도 빈약했다. 박헌영계에서 절대적 권위를 누린 정치 논설이 해방 직후 발표된 '8월 테제'인데, 서중석은 이것을 코민테른 '12월 테제'(1928년)의 번안 수준으로 평가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235~238쪽) 1928년 당시 모스크바에 있었던 박헌영의 공산주의 운동 노선 인식이 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인민 전선'으로 바꾼 방향을 그가 해방 때까지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소련영사관 직원이었던 샤브시나의 증언에도 비쳐 보인다.

재건위원회에서 정치 노선을 작성할 때 박헌영은 우리 영사관 도서관에 자료 특히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관련된 자료를 여러 번 의뢰하곤 하였다. (<이정 박헌영 연대기>(임경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14~215쪽에서 재인용)

박헌영계는 장악력에만 치중하며 인민 전선은커녕 좌익의 외연 확대도 소홀히 했다. 우호적 세력에까지 '프락치'를 너무 적극 활용해 불신과 분열을 초래했다. 인민의 신뢰와 지지를 키우기보다 좌익 내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좌익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추구하겠다는 목적으로 이해된다. 해방 직후 박헌영이 서울에 오자마자 소련영사관의 보호와 지원을 찾은 데서부터 일관된 자세로 보인다.

진정한 정치 활동에 나선 것이 바로 중도파였다

해방 시점에서 대다수 조선인이 원한 것은 식민지 체제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염원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로 집약되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자유보다 평등에 방점을 두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였다. 민족주의를 앞세운 것이 우파, 민주주의를 앞세운 것이 좌파였는데, 양자는 절대적 대립 관계가 아니었다. 민의의 실현을 모색하는 진정한 정치 활동이라면 우파건 좌파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배합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배합의 작업이 바로 좌우 합작이었다.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발표한 '7원칙'이 그런 예다. 좌파와 우파에서 합의점과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공동 성명으로 발표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동아일보> 1946년 10월 8일자)

본위원회의 목적(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을 촉성할 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 원칙을 下와 如히 의정함.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3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 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케 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 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제3조 '토지 개혁'을 보자. 좌익의 전통적 주장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는데, 합의된 원칙은 그에 가까운 효과를 가지면서도 조선인 지주, 특히 중소지주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다. 좌익 평등 이념과 우익 민족주의 이념의 조화를 꾀한 것이다.

한민당은 여기에 반대함으로써 민족주의가 아니라 대지주의 이익에 집착하는 본색을 드러내고 민족주의자들의 대거 탈당 사태를 겪었다. 한편, 박헌영계가 장악한 남로당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공산국가 소련이 점령한 이북과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점령한 이남 사이의 상황 차이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고, 민족주의와의 배합을 통한 통일 전선 결성의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겉보기로는 극좌와 극우가 극한적 대립 관계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적대적 공생 관계'가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이 공생 관계가 우발적으로 형성된 역설적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극좌와 극우의 속성을 이해하면서 이 관계의 필연성을 깨닫게 되었다. 두 세력은 정상적 정치 활동을 봉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고, 모든 강령에 '절대'를 붙임으로써 중간파의 배합-타협 노력을 가로막았다. "3상 회담 절대 지지"와 "신탁 통치 절대 반대"는 서로 반대되는 강령이면서도 미소공위 파탄을 위해 힘을 합쳤던 것이다.

비극의 원인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일단 한반도에 두 국가가 수립된다면, 전쟁은 필연이었다"

장석준의 이 말에 동의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분단 건국은 독일과 인도-파키스탄에서도 이뤄졌지만 한반도와 사정이 다른 나라들이었다. 독일은 전범국이었기 때문에 분단을 감수해야 했고, 인도-파키스탄은 민족 통일성이 약했기 때문에 통합을 향한 압력도 적었다. 분단 건국은 한민족에게 극히 부자연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통합을 향한 내부 압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컸다.

당시 조선인의 절대다수가 통일 건국을 원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수 인민의 염원이 어그러진 까닭이 무엇인가? 정치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정치를 작동시키려는 노력은 있었다. 좌우 합작이 두드러진 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왜 실패로 돌아갔나? 지도자들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잘못을 따지게 된다.

그런데 '정치인'의 범위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를 작동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라야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정상배'와 '혁명가'는 '정치인'이라 할 수 없다. 정상적 정치의 작동을 방해하거나 왜곡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의 정치 현상을 흔히 '좌우 대립'으로 인식하는데, 나는 그보다 정치인과 사이비 정치인 사이의 대립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익이나 이념을 위해 정치를 파괴하려는 사이비 정치인들의 힘이 인민의 염원을 실현시키려는 정치인들의 노력을 압도했기 때문에 통일 민족 국가를 바라는 대다수 인민의 뜻이 좌절된 것이었다.

극우파의 반탁 운동 같은 대중 운동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중간파의 "치명적 한계"였다고 장석준은 아쉬워한다. 반탁 운동이 어떤 힘으로 일어난 것이었던가? 1945년 말에 일어난 격렬한 운동에는 <동아일보> 조작 기사 등을 통한 선동과 미소공위 반대 세력의 책동이 큰 몫을 했다. 반탁 운동은 돈과 권력의 힘으로 만들어낸 움직임이었고, 진정한 대중 운동은 경찰과 극우파의 물리력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극우파는 미군정의 방조 아래 엄청난 자금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소련의 후원 아래 진행된 이북 지역의 혁명적 변화는 많은 혁명가들을 극좌의 길로 유혹했다. 중간파의 힘이 약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노력을 좌절시킨 돈의 힘과 꿈의 힘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서 독립한 것과 비슷한 상황에서 독일로부터 독립한 오스트리아 경우를 보자.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은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고 10년의 신탁 통치를 거쳐 무난한 건국에 이르렀다. 조선의 중간파 정치인들도 오스트리아 정치인들 못지않게 성실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는 조선과 같은 사이비 정치인들의 발호가 없었다.

조선의 사이비 정치인 발호는 미국과 소련의 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저희들 멋대로 38선을 그어놓고 각자 점령 지역을 자기네에게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 힘이 너무나 커서 그에 편승한 사이비 정치인들이 민의의 실현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 뿐, 다른 외세의 압박을 조선인에게 가져왔다. 그 압박 때문에 조선인은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칠 여건을 누리지 못하고 분단 건국과 전쟁을 겪었다. 한반도는 그 압박이 남긴 일그러진 모습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일그러진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65년 전의 선배들을 짓누른 그 압박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애쓸 여지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식민지 시대부터 분단 시대까지 고통의 시대를 꿰뚫고 살아온 이구영의 말씀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좌우 대립은 외세 작용의 결과로서 피상적 현상일 뿐이며, 시대 조건의 파악이 분단 극복을 위해서도 첫 번째 과제라는 생각에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통일의 문제 역시 민족 문제입니다. 혹자는 분단의 원인은 이념 문제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분단은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이 약육강식의 세계사에서 겪지 않을 수 없었던 민족 문제였다고 봅니다. 따라서 당연히 통일의 문제도 민족 문제의 일환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심지연 지음, 소나무 펴냄), 21쪽)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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