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하고 외롭다. 아마도 감기에 걸렸기 때문일 거야."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짧은 고백을 책 첫 장 상단에 배치하며 시작하는 <감기의 과학>(제니퍼 애커먼 지음, 한세정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은 감기를 둘러싼 세간의 끈질긴 오해와 편견, 그리고 실익을 도모하기 위해 대중의 무지를 눈감고 오해에 가담하는 의학계의 공모를 다룬다. 환자라는 비전문 집단의 무지와 의학계 전문 집단의 방임이 만든 웅장한 오해의 장막에 막혀 감기의 진실은 길 위를 헤맨다.
나는 2008년 좀체 떨어지지 않는 감기로 한 달여 애를 먹은 후에 감기 관련 자료를 뒤지다가 '변종 바이러스가 발병 원인인 감기에는 치료약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의학계의 상식을 뒤늦게 접했다. 감기는 복합체다. "감기는 최소 200여 가지의 각기 다른 바이러스 때문에 발생 한다. (…)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이토록 다양하기 때문에 백신을 만드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워진다."(22쪽) 그러니 "감기 바이러스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인간 병원체"(68쪽)일 밖에.
▲ <감기의 과학>(제니퍼 애커먼 지음, 한세정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
하지만 <감기의 과학>은 내가 오랫동안 신망한 비타민C의 특효마저 부인한다. "그가 누리던 명성 덕분에 폴링의 이론은 빈약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믿음을 얻었다."(181쪽)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비타민C가 감기 예방이나 증상 완화에 효과가 없다는 데에 동의"(276)해서라고.
그럼 2008년 이후 감기 증상이 감지되면 비타민C가 함유된 오렌지주스 섭취로 효과를 본 내 개인 체험은 어찌 설명될까? <감기의 과학>을 따르건 지난 과거를 스스로 냉정히 되돌아보건, 치유 요인이 비단 오렌지주스(비타민C)의 효과였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바이러스에 내성이 생길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러 자연 치유의 덕을 봤을 수도 있고, 비타민C에 대한 환자의 강한 기대감, 즉 환자 보고 편향(Reporting Bias)이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켜 회복에 도움을 받은 건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에 이르는 엄중한 병들에 서열이 밀린 가장 흔해빠진 이 성가신 전염병 감기에 대한 일반인의 상식지수는 처참할 정도로 낮다. 뜻밖일 테지만 전염병임에도 감기는 쉽게 감염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감기 환자와 1분 30초간 키스를 나눈 피실험 커플 16쌍 중 고작 한 쌍만 감염되었다. 침에는 감기 바이러스가 거의 없단다.
일반인의 상식과 배치되는 건 더 많다. 감기환자의 재채기를 뒤집어쓴 사람도 어지간해서는 감염되지 않는다. 공기로 감기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감기환자와 밀폐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무사했던 자신들의 숱한 과거사를 떠올려보시라. 때문에 마스크 착용은 감기예방에는 무의미한 수준이다.
여전히 감기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는 논쟁이지만, 저자가 찾은 자료에 따르면 표면 접촉이 가장 효율적으로 바이러스를 옮긴다. 공공장소 손잡이와 엘리베이터 버튼, 키보드의 엔터와 전송 버튼에 병균들이 결집해 있단다. 외출 후 '손을 자주 씻기'가 가장 신뢰할만한 감기 예방 준칙인 이유다. 이외에 감기를 둘러싼 편견은 산처럼 쌓였다. 추위가 감기를 유발한다는 믿음이 대표적이다. 많은 나라에서 감기를 칭하는 용어는 대부분 '추위'와 연관되어 있지만(영어로는 'common cold'라고 표현한다), 낮은 온도와 감기 감염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감기 전문가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낮다고 평가한다.
감기 예방과 치료를 둘러싼 두터운 편견의 층을 거둬낸 <감기의 과학>은 마지막 장에 '부록: 감기에 걸렸을 때 우리를 위로하는 것들'을 배치한다. 각 증상별(따끔거리는 목, 두통, 코막힘, 재채기 등) 잘 듣는 처방을 소개한다. 제도 의학의 숱한 감기처방의 허술함을 나열했다한들 이 책이 세칭 민간요법을 지지하는 건 결코 아니다. 책의 목적이 엄정한 과학적 기준으로 감기를 응시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유통되는 종합 감기 의약품의 무용론을 털어놓은 것처럼, 세간에 화제를 몰고 온 '감기 보조제 시장'의 허황된 과열은 훨씬 강도 높게 비난받는다. 2004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서 감기 특효약인 양 선전된 '에어본'이 대표적이다. 이 감기 보조제는 할리우드 스타 케빈 코스트너가 출연한 TV 광고의 힘을 입어, 연간 1800억 원어치를 팔아치운 마이다스의 손이 되었다.
그러나 에어본 대박 후 허위광고를 질타하는 집단 소송이 뒤따랐다. 연방통상위원회는 "에어본을 복용할 때 감기의 정도를 약화하고 지속 시간을 단축한다는 (…) 세균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어떤 믿을 만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고 발표한다. 그렇지만 에어본은 합의금 360억 원을 환불하고 포장재에서 감기라는 용어를 지운 것으로 이 의약품 사기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런 사기가 통용되는 조건은 판매자 개인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맹신하는 소비자 그룹이 맞은편에서 떠받칠 때 초대형 사기는 완성된다. 과대광고로 떼돈을 번 감기 보조제는 에어본 말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법정에서 패소한들 에어본처럼 시장에서 여전히 건재를 과시한다. 거짓말의 존립을 보장할 만큼 소비자는 쉽게 속기 때문이다. 임상실험보다 지인에게 건네 들은 소문에 마음을 여는 나약한 존재(그러니 감기에도 잘 걸리지!)가 바로 대중 아니겠나.
<감기의 과학>은 흡사 쉽게 떨어지지 않는 감기를 닮았다. 바로 그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감기에 관한 일반적 오해를 전문가의 임상실험 결과로 차분히 반박한다. 대중의 오랜 무지가 과잉 대응을 부르고, 과잉 대응은 특정 소수의 호주머니만 두둑하게 채울 뿐 원인(감기)을 제거하진 않는다. 이런 불상사는 대중의 무지가 가라앉지 않는 한 계속 반복될 것이다. 감기를 둘러싼 작은 진실과 거대한 무지의 관계를 읽다보면, 바른 감기 예방이라는 책의 본래 메시지와는 별개의 깨달음이 파생되는 느낌을 받는다.
'삶에 편재한 작은 악, 높은 전염성, 털어내기 어려운 악의 생존력, 집단 무지가 만든 과잉 대응 등등'. 어떤가? 일견 감기에 대한 기술 같다. 물론 맞다. 그렇지만 동일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생의 난관이 세상에는 무척 많다. 종교 맹신이 형성한 비이성의 열광, 기어이 법정까지 가고만 타진요의 아집, 구시대 정치인을 향한 무지몽매한 팬덤. 이 모두는 바로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사회 현상이다. 이들도 감기를 닮아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 쉽게 전파된다.
<감기의 과학>은 감기에 대한 방대한 오해를 늘어놓지만 감기를 털어낼 특단의 처방을 알려주진 않는다. 그런 건 현재 없기 때문이다. 다만 대중에게 줄기차게 외면 받아온 전문가의 단순한 처방을 몇 차례 반복할 뿐이다. '손 자주 씻기', '아무 일 안하고 푹 쉬기'.
감기와 우리가 겪는 비이성적 사회 현상의 증상이 유사하다면, 종교 맹신, 정치인 맹종, 비이성적 자기 확신에 대처하는 방법마저 유사하지 않을까? 변종 바이러스가 유발하는 감기는 인생의 작은 난관이다. 단 한 번에 깨끗이 퇴치해준다는 의약품과 보조제 시장의 광고에 현혹되지 않고, 감기를 생의 조건으로 수용하고 푹 쉬며 감기가 떠나길 기다린다면 자연치유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특정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를 향한 비이성적 팬덤은 추종 인물이 마치 단기간에 현재적 고난을 구제할 것 같은 착시(혹은 그런 공약에 대한 맹종)가 만든 것일 게다. 물론 그런 만병통치약을 닮은 공약은 실현되지 않는다. 2007년 이미 경제 구원자인 양 집단 오해한 유권자들의 표가 모여 현재 회복 불가능한 대민피해로 연결된 걸 우리는 본다.
한 차례 크게 당했지만 2012년이 되자, 1970년대 경제 개발의 향수에 젖은 민심이 구시대적 구원자를 현실 속에서 찾으려 한다. 절차적 공정성을 느린 속도로 완성하는 데엔 관심이 없다. 언제나 급한 성미가 일을 망친다. 감기 퇴치도 정치 퇴행의 방지도. 민생을 한 번에 해결할 정치 영웅을 기원하는 건, 감기약과 보조제로 감기를 단숨에 치유하고픈 성마른 환자의 심리와 같다. 당장의 고통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그걸 하나의 조건으로 수용하는 건 감기 환자나 유권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회복은 기다림을 요구한다.
책에서 감기의 치유요인으로 짧게 지목된 플라시보 효과도 눈여겨 볼 생의 교훈이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나 환자의 긍정적 감정과 감기 치유 사이에는 유의미한 연관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닥터 골렘>(해리 콜린스·트레버 핀치 지음, 김명진·이정호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은 아예 장 하나를 플라시보 효과에 할애한 현대의학 분석서다. 플라시보 효과는 양날의 칼이다. 엉터리 대체의학의 난립과 과학적 세계관의 위협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환자의 기대심리와 낙관주의가 통증 경감과 생리적인 호전에 작은 영향을 미치는 점까지 <닥터 골렘>이 부인하진 못한다.
감기 치료에 관해 환자의 플라시보 체험이 안 좋게 작용한 경우는 치유력이 의심되는 감기 보조제의 대박, 감기 회복이 자연치유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잉 치료에 대한 환자의 믿음이 과잉 내원과 약 복용을 정당화하는 현상 등이다. 그러나 감기의 진실을 토대로 환자가 플라시보를 활용하면, 좋은 결과를 낳을 게다. 휴식, 기다림, 위생, 관리만으로 사라지는 감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면, 그 체험이 쌓여 감기가 아닌 다른 종류의 생의 고난에 대해서도 섣부른 결단보다 여유와 기다림이라는 대응을 택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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