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찬양고무죄로 처벌받는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너희 나라에서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말해도 처벌당하니?"
난센스라는 단어를 연발하면서, "한국이 아직도 그런 수준이냐"고 반응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도 적지 않게 상한다. 왜 죄라고 주장하는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다보면 내가 검열 연구자인지 공안검사인지 헷갈린다. 한국에 돌아오면 물론 역전된다. 왜 국가보안법, 특히 찬양고무죄를 규정한 제7조가 폐지되어야 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해야 한다. 말난 김에 한 번 더.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은 양심에 대한 검열이다. 자신의 양심에 의한 판단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면 이는 찬양고무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데, 마침 북한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이는 찬양고무에 해당한다. '가카'는 지금이라도 하야하는 게 옳다, 4대강 사업은 망국적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은 바람직하지 않다 등등의 발언을 했는데, 마침 북한에서 비슷한 주장이 나오기라도 하면 당신은 국가보안법 사범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느냐고?
1986년 신한국당 유성환 의원은 정기국회 본회의의 대정부 질문자로서 '이 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이는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인정한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의원직을 버려야 했으니 정치적으로는 매장되어 버렸다.
국가보안법은 매우 빈번하게 '정권'보안법이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도 말하리라." 시 '귀천'의 시인 천상병은 어느 날 느닷없이 체포되어 6개월간 고문을 받고, 생식력을 잃어버리는 등 심신을 망쳐 평생 방황하였다. 가난한 시인이었던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백 원 오백 원씩 달라고 하여 막걸리를 사 마시곤 했는데, 그 돈을 준 사람 중에 한 동창생이 동독을 방문했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말을 듣고도 동창생을 신고하지 않았으니 불고지죄였다. 작곡가 윤이상, 이응로 화백 등 문화계의 거물들을 포함한 194명을 구속한 소위 동백림 사건. 1967년 삼선 개헌으로 악화된 여론을 역전시키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작품이었다.
천상병 시인은 그 참혹한 일을 겪고도 "이 세상은 아름다웠더라" 읊었지만,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고문에 의해 조작된 간첩 사건들이 발표되었고, 무고하게 복역해야 했던 유학생, 어부, 학자들의 인생은 그 사건으로 끝장나버렸다. 가족들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으며, 연좌제에 의해 취업 제한은 물론 해외여행조차 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많은 분들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그들의 인생이 어찌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다 안다고? 하지만 다 옛날이야기 아니냐고?
이 정권 들어서 부활했다. 경찰은 2010년에만 인터넷 게시물 8만 여 건을 친북적이라는 명목으로 삭제 요구하였으며 거의 실제로 삭제되었다. 정부 비판을 친북이라고 몰아버린 혐의가 강하다. 국가보안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인터넷 글쓰기까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많은 사람들을 다 국가보안법 사범으로 만들 수는 없었지만 운이 나쁘면 기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박정근 씨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 박정근 씨. ⓒ박정근 트위터 |
사정이 이러하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결국 무슨 주장을 하기 전에 북한이 어떻게 생각하고 주장하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로동신문>과 담화문을 샅샅이 읽어두어야 할 판이지만, 그것을 읽는 행위 역시 금지되어 있으니 도대체 어찌하란 말인가. 정치적 발언을 가능한 삼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담론 위축의 효과이니, 그것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찬양고무죄란 남한의 담론장에서 북한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도록 보장해주는 셈이다. 김정은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발언하고 싶어? 내게 먼저 물어 봐."
당신의 주장이 만일 불운하게도 북한의 주장과 결과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치자. 당신이 찬양고무죄를 벗을 수 있는 길은 유일하다. 북한을 찬양 고무하겠다는 목적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학문 연구의 목적이나 단순한 호기심이었다는 등의 목적을 스스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자, 당신은 이제 내면을 까발려야 한다.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 북한하고 똑같은 주장을 한 거요'라는 심문 앞에서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의도가 북한 찬양과는 관계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명백한 사상과 양심에 대한 검열이 아닐 수 없다.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공권력이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찬양고무죄의 경우는 검찰의 유죄입증은 너무도 쉽다. 피고인의 주장과 북한의 주장이 일치함을 입증하는 일이야 뭐 그리 어렵겠는가. 그러니 실제로는 찬양고무죄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셈이다. 자신의 내면과 양심을 모조리 까발리면서, 북한을 이롭게 하겠다는 목적이 없었음을 제발 믿어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형사사건의 입증 책임을 실질적으로는 피의자에게 넘겨버리는 매우 예외적인 방식이다.
게다가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다. 학자들이라면 학문 연구가 목적이었다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일반인의 경우라면 그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는 식의 변호가 가장 유력할 뿐이다. 하지만 "호기심? 왜 하필 북한에 대해 호기심을 가져. 당신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정도의 반응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비교적 민주적이었던 두 정권 아래서 이런 불합리성은 훨씬 줄어들었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서 국가보안법은 마치 강시처럼 부활하였다. 특히 찬양고무, 이적표현 등을 단속하는 제7조의 적용 비율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매우 드물게 이적단체 구성이나 이적행위 등 구체적 행동에 대해 적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리한 기소여서 무죄 판결이 나고 있다. 행동이 아니라 표현에 대한 금지라는 점에서, 특히 정치적 표현에 대한 금지라는 점에서, 국가보안법 특히 찬양고무와 이적표현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모조리 처벌하겠다는 제7조는, 검열 금지라는 헌법 정신에 명백하게 위배된다.
국가보안법이 행동이 아니라 표현에 대해 적용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은, 이 법이 실질적으로는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말한다.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이란 이미 끝났으며, 남한 사회에서 이미 국가보안법이 금지해야 할 행위 자체가 거의 사라졌음을 말한다. 게다가 만일 이적행위가 생기더라도, 보안법 말고도 처벌할 수 있는 다른 법 규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다면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법학자들의 정설이다. 검찰이 이적 찬양이라 지적하는 표현들에, 도대체 '현존하는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 국민들 중에서 누가 북한 체제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겠는가. 이 정권은 그렇게도 자신감이 없는가. 아무리 대한민국 사회가 썩고 비인간적이고 파렴치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북한 체제에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음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왜 자신이 없는가. 무엇 때문인가.
역시 국가안보를 빙자한 정권 안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고 마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은 이미 우리의 내면을 형성해버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해적기지 발언, 천안함 사건 등 주요 계기마다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발언에 대해서는 무수한 비난 댓글들이 달렸다. 당신은 왜 북한에 이로운 발언을 하는가, 그러려면 북한에 가서 살아라,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 맞느냐, 뭐 이런 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에 이롭다면 안 된다? 보안법에서는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처벌한다. 즉 허울뿐이지만 목적범을 처벌한다는 규정은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댓글은 '결과'적으로 북한에 이로운 주장은 모조리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들의 정서적 반응이 보안법보다도 더 가혹하고 불합리한 셈 아닌가. 보안법 자체보다, 오랫동안 그 법으로 인해 우리의 내면에 각인되어버린 이런 집단적 무의식이 훨씬 더 무서운 일이 아닐까.
빨갱이 콤플렉스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시처럼 되살아난다. 보안법은 법전이나 공안검사의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근대 이후 종교와 문화는 평소에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듯하지만, 위기 국면마다 인간들의 판단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뒤르켐의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문화부터 바꿔보는 게 어떨까.
이름부터 바꿔보자. 보안법을 긍정적이라고 느끼도록 만드는 주된 힘은 그 이름에서 나온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면, 국가 안보에 크나큰 위협이 생길 것 같다는 불안감은 그 이름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너무 그 실질과 어울리지 않을 경우는 별명이 더 널리 사용되게 마련이다. 차라리 "북한보안법"이라 고쳐 부르면 어떨까. 우리의 양심과 이성적 판단의 모든 근거를 북한의 주장과 동일한가의 여부에 두도록 강제하는 법이니까. 보안법으로 우리를 기소하는 것은 검찰이지만, 검찰의 판단 근거는 북한에 있으니까.
아니, 보안법과 그 수호자들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자. 이렇게 북한을 우리의 판단 준거로 삼도록 강제하는 보안법이야말로 '이적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 아니겠는가. 보안법 수호자들은 너무 숫자가 많아서 누굴 고발할까 망설여지는데 최근 유력한 후보가 한 사람 더 늘었다. '종북 몰이'에 앞장선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 그는 최근 제1야당 대표와 전 대표들, 그리고 유력한 대권 후보인 문재인 씨를 '종북분자'로 지명했다. 그런데 이한구씨는 첫 징병 검사를 받은 뒤 10년 만에 면제를 받은 '신의 자손'이고, 문재인 씨는 특전사 출신이다. 수상쩍은 병역 면제자가 국방의 의무에 누구 못지않게 충실했던 분을 '종북'이라고 몰아간다면, 과연 누구에게 이로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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