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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체포를 막아라" 안재홍의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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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체포를 막아라" 안재홍의 고군분투

[해방일기] 1947년 6월 25일

1947년 6월 25일

6월 23일의 시위와 관련해 이튿날 나온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특별 담화' 기사다.

"24일 오전 10시 민정장관 안재홍 씨의 특별 지시에 의하여 23일 무허가 시위 행렬 배후지도자 엄항섭, 김석황(민정장관 지명인) 등을 행정 명령 제3호 위반죄로 체포하게 되었음."

그리고 이 위법 행위인 무허가 시위 행렬에 대하여 경찰 당국은 당일 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시위에 대하여 아무런 제지도 없이 최후까지 수수방관할 뿐만 아니라 수도청장 장택상 씨는 동 데모를 한 대표자 3명을 미소공위 수석대표 면회 알선까지 하여 일반은 당일 경찰이 취한 태도에 대하여 자못 의아의 감을 느끼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장 총감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3일 일어난 시위 행위는 무허가이므로 위법이다. 경찰은 당일 이를 제지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하였으나 흥분된 군중을 무리로 해산시키려면 유혈참극을 야기할 염려가 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소공위 양측 대표에 면회를 알선한 것은 동 대표자들이 면회를 하기 전에는 해산을 않겠다 하므로 속히 해산시키기 위하여 브라운 소장의 승낙을 얻어 알선한 것이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6월 25일)


장택상이 시위를 해산시키기는커녕 보호하고 안내한 이야기는 22일자 일기에 적었다. 그런데 6월 24일자의 이 담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엄항섭과 김석황의 체포가 안재홍 민정장관의 '특별 지시'와 '지명'에 의거한 것임을 거듭거듭 강조한 사실이다. 불법 시위 책임자 체포가 민정장관의 지시와 지명 없이 경찰 독자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단 말인가?

엄항섭과 김석황은 한독당 간부였다. 안재홍이 최근 한독당에서 떨어져 나올 때까지 맞서던 임정계 간부였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 체포령을 안재홍이 내렸다고 장택상이 강조하는 데는 그 책임을 안재홍 개인에게 돌려 미움의 표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 체포령에 대한 안재홍의 태도가 기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6월 25일 기자 회견에서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6월 26일)

"반탁 의사 표시는 자유이나 데모는 시기가 좋지 않았고 무허가의 옥외 집회인 고로 제3호 행정 명령 위반인 데다가 소련 대표가 탄 자동차에 투석까지 한 일이 있어 사태가 국제적으로 재미없고 소련 측에서는 공식 논의까지 있는 터로 법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석황, 엄항섭 양씨를 나의 명령으로 체포하는 것은 문제가 군정장관의 명령이 민정장관의 명령이냐로 된 때에 제3호 행정 명령 발령 책임자인 나의 명령 형식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김-엄 양씨가 반탁 시위의 책임자라는 것은?" 하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경찰이 조사한 결과 그렇게 판명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책임자 판명은 경찰에서 한 일이고, 자기 이름으로 체포령이 나간 것은 형식상 민정장관의 책임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안재홍은 6월 27일 공보부 특별 발표로 성명서를 내어 다시 입장을 밝혔다.

"금월 23, 24일 경무부에서는 본관에게 모모인들이 법을 위반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여 왔다. 이 해당의 법령은 금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정의 공중 집회를 금지하는 행정 명령 제3호였다. 그러나 그 후의 본관의 행동에 있어 본관은 이 특별 명령을 준수치 않았다는 이유로서가 아니라 법 자체를 침해하였다는 이유로써 그 행동을 결행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남조선 전민중이 명백히 이해하여야 할 것을 본관이 행정 부문에 있어 전 국민의 대표자로써 법을 준수할 것을 맹서하였던 것이다. 남조선 과도 정부 행정부에서는 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체포를 명령할 것이다.

금반 사건은 불법 시위를 행하고 있다는 경무부의 보고를 통하여 본관의 주의를 환기하게 되었다. 경무부에서는 본관에게 그 책임 지도자의 명부를 제시하였는데 그 지도자들은 우연한 일치로 본관의 친구이며 이전에 동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관은 이 사건에 대하여 숙고하게 되었으며 본관의 입장은 곤란하였으나 민정장관으로서의 본관의 책임은 본관 개인의 친구에 대함이 아니라 조선 전 민중에 대한 것이라는 불가피한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본관은 사적 문제에 당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결정하였다. 이 명령이 본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다대한 고통을 주었으나 본관은 정부의 책임자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여 체포를 명령하였던 것이다.

금후도 본관은 계속하여 우리 정부의 법률을 준수하며 전 국민의 최선의 권리를 위하여 이를 실시할 것이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6월 28일)

안재홍에게는 이 일이 몹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던지, 나중에 상세한 회고를 남겼다.

6월 23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보스턴으로부터 돌아온 승리의 마라톤 선수들을 환영하는 대중적 회합에서, 내외 귀빈도 일석에 모인 때이었는데, 세종로 거리에는 반탁 시위의 행렬이 두어 차례 돌아드는 것이었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나 퇴청시각이 된 때, 나는 반탁 시위에 관한 보도를 많이 듣고 앉은 끝에, 군정장관 러치 소장 귀미 중에 그 대리를 보는 헬믹 준장의 사무실에 초치되어 갔었다.

그의 얼굴은 우울이요, 말은 거룩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오늘 반탁 데모에 관하여 시위 행렬하는 군중이 덕수궁에 와서 상당한 적개심을 발로하면서, 자기들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의 노선을 절대 지지한다고 하였는데, 그 외에 또 소련 대표의 타고 나오는 자동차에는 투석 등 무례가 있었다고 항의가 왔으므로, 미 측으로서는 면목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투석 사건은 추후 엄사한 결과 무슨 착오된 말일 뿐이어서 사실은 아니었으나, 따로이 난문제는, 오늘 가두 시위 행렬이 진행되는 중에 '미시다(미스터) 김구'가 종로의 화신상회 2층에다가 확성기를 달고 두 시간에 걸치어 반탁 시위를 지휘 선동하여 미소공위를 파괴한 것인즉, 민정장관인 당신의 동의만 얻으면 '미시다 김구'를 법에 비추어 상당 재판하겠다고, 지금 미군 최고 책임부로부터 지시 있어, 전화통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터인, 그것을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받은 정보로써 김구 선생의 화신 방송은 허보일 것이다. 그것은 안 된다"고 하였다. "김구 선생은 일생을 투쟁하여 투옥과 망명에 일관하여 나려온 혁명가인데, 어떠한 위압에도 겁을 낼 리도 없고, 또 그런 일은 한국의 독립을 원조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갓 민중의 큰 반향만을 일으킬 일이니, 단연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언제든지 이 일은 나의 의견을 듣지 않고, 당신들의 전단으로 하여서는 안 된다"고 다져두었다.

조금 지나 회답은, "그러면 하룻밤 더 생각하여 보고 결정하자"는 통지가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일 저녁 여덟 시 경무대 관저에 헬믹 준장을 방문하여, 다시 만일의 문제 없기를 다져두었고, 이튿날에는 당시 미소공위의 미 측 수석대표인 브라운 소장을 방문하고 일래의 사사를 담의하는 중, 김구 선생 일신의 안전의 때문에 역설하였다. 브라운 소장은 "당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중요 문제를 처단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 24일 오전에는 또 하나의 난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는, 군정장관대리와 수석고문 열좌한 회합에서, 한측(韓側)에는 나와 경찰 수뇌자가 모두 열석한 우에, 헬믹 준장의 발언은 "미시다 김구의 건은 당신의 의견대로 하거니와, 보고에 의하면 엄항섭-김석황 양인이 23일의 가두 시위를 직접 지휘하였다고 하니, 좌방의 범법자는 법에 의하여 검거하면서 우방의 범행자는 방치할 수 없는 터에, 우 양인은 곡 체포하여 법에 붙여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사실이 있다면은 체포할 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즉, "행정 명령 제3호는 민정장관의 명의로 발표된 것이니, 민정장관의 명의로 이번 체포 명령을 내리어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또 엊그제까지 일당의 동지로 있다가 바로 며칠 전에 미소공위 관련 사항으로 제명되어 있는 나로서는, 그 체포 명령을 내리기가 매우 거북하다는 이유를 표명은 하였으나, 공무-사정 구별론에 좇아, 결국 나의 명의로 하는 것을 동의하였다.

이때에는 세칭 4지사 이동안을 걸고 헬믹 준장 상대로 그 단행을 요구하는 중에 있어, 체포 명령 문제도 나는 민정장관의 직무상 나의 명의를 내어걸게 되는 터인즉, 4지사 이동안도 민정장관의 책임 있는 제안을 승인하는 것이 군정장관으로서 당연하지 않은가"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다음에 엄-김 양씨는 모두 사실에 상위되어 석방되었고, 다음 김승학-백홍균 양씨와 외타 14, 15인은 나와는 관련없이 일시 구금되었으나, 일률로 민정장관의 명령이라고 선전되어, 세간에서는 허다한 잡음을 일으키고, 공박 매우 성하였다. (<민세 안재홍 선집 2>('백범 정치 투쟁사'), 443~445쪽)


해설이 필요한 몇 곳에 밑줄을 그었다. 둘째 문단의 "러치 소장 귀미"는 바로 이 무렵 러치가 미국에 다니러 간 일을 말하는 것이다. 23일에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헬믹이 대행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문단의 "착오된 말일 뿐"이라 한 것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공식 발표에 따른 것이다. 소련 대표단에서는 투석이 있었다고 불평했는데, 조병옥은 조사 결과 투석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1946년 6월 26일 "소 대표 승용차에 투석 사실은 무근-조 경무부장 담화 발표") 안재홍은 남조선 과도 정부에 속한 몸으로서 남조선 과도 정부 경무부의 공식 입장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넷째 문단의 "미군 최고 책임부"와 여섯째 문단의 "회답"은 하지 사령관을 가리킨 것이다. 군정 사령관 하지와 민정장관 안재홍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공식 회합 외에는 만나지 않는 관계였던 것이다. 안재홍은 김구 체포 명령을 내려달라는 요구를 철회시키기 위해 헬믹과 얘기했고, 브라운을 찾아가 만났다. 그런데 하지와는 만나지 않았고, 하지의 지시와 회답을 모호한 주어로 표시한 것이다.

군정 사령관과 민정장관 사이에 개인적 대화의 길이 없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누가 대화의 길을 거부한 것이었을까? 짐작에 맡길 뿐이다. 군정장관은 업무 때문에 민정장관과 접촉을 가지는 입장이었지만, 사령관과 대화의 길이 없는 민정장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도 짐작에 맡길 뿐이다.

아홉째 문단의 "4지사 이동안"이란 도지사 네 명의 자리를 옮기는, 안재홍의 장관 취임 이후 최대의 인사 조치였다. 이 조치의 핵심은 인사행정처장 정일형을 충남 지사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민정장관으로서 안재홍의 큰 목표 하나가 군정청 인사 개혁이었다. '통역 정치'의 폐단을 벗어나기 위해 정일형이 장악하고 있던 인사권을 빼앗아야 했다. 정일형은 이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민세 안재홍 씨는 민정장관이란 요직에 앉게 되었으나, 여운형 씨 비슷하게 중간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부처장들의 협조와 신임을 얻지 못하였고, 특히 영어를 자유자재하게 구사하지 못해 군정 책임자들과도 잘 연결되지 않아 그 기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고 고전하였다.

안 장관은 러취 군정장관이 잠시 귀국한 틈을 타서 전반적인 인사 이동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맨 먼저 인사행정처장직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고 나를 충청남도 지사로 전보 발령하였다. 러취 장관이 돌아오게 되어 나는 다시 물가행정처장으로 전임 발령을 받게 되었고, 행정기구개혁위원회의 위원장직도 겸직하게 되었다. (<오직 한 길로>(을지서적 펴냄), 163쪽)


참 솔직한 증언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회고가 스스럼없이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연구자에게는 다행스러운 점도 있는 일이지만, 미군정 분위기가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다. 중간 노선을 걷는 사람이라서 조선인 간부들의 협조와 신임을 받지 못했다거니, 영어를 자유자재하게 구사하지 못해 군정 책임자들과 잘 연결되지 않았다거니, 이 책이 나온 1991년까지도 '극우 통역 정치'에 대한 반성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일기>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안재홍 선생께 묻는다" 가상 인터뷰로 안재홍의 입장을 부각시키는 데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화려한 표현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고, 민정장관직에서 미군정에 '협력'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대답해 왔다. 그에게는 화려한 표현이 없는 대신 착실한 표현이 많았으며, 미군정에 대한 그의 '협력'은 통상적 의미의 것이 아니었다고.

외래 통치자에 대한 '협력'이라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민족에 대한 '배반'을 통상 떠올린다. 그러나 안재홍의 미군정 협력은 고행의 길이었다. 6월 23일 시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 고행의 성격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남조선 과도 정부'로 최근 공식 명칭을 바꾼 군정청의 고위 간부직은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내통하는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병옥과 장택상이다. 그들은 시위를 방관하는 정도가 아니라 방조까지 해놓고는 한독당 임정계 인물들이 시위를 선동했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김구까지 얽어 넣으려 했다. 그리고는 민정장관의 명령이 있어야 체포할 수 있다고 뻗댔다. 헬믹 군정장관 대리 등 미군 간부들은 이에 동조했다. 김구 한 사람 빼내기 위해서도 안재홍은 고군분투를 해야 했다.

상세한 회고가 없는 다른 일도 이로부터 가히 유추할 수 있다. 안재홍 같은 중간파 인물을 민정장관 자리에 앉힐 필요가 미군정 측에 있기는 했지만, 그 필요는 상징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안재홍이 제시하는 노선의 의미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미군 장교는 많지 않았다. 안재홍은 미군정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군정에 '협력'했지만 그것을 고마워하는 미국인은 별로 없었고, 고까워하는 조선인은 많이 있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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