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는 민간 신문 허용과 동시에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창설하여 정보의 수집 분류 배분을 일원화하였다. 3.1운동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정보 기능을 크게 강화한 것이다. 김종필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모델로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지만 이미 1920년에 그 원형은 이 땅에 도입된 셈이다.
식민 권력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의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권력은 대중들의 삶에 대한 개개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가공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는 확산하면서 불리한 정보는 차단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근대 시기에는 그 정보를 얻기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오가작통법'이라는 방식으로 다섯 가구씩 묶어 서로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신고하지 않으면 연대책임을 물었다(북한의 5호담당제는 그 불행한 유산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쉬워졌다.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도청기술이 발전했으며(얼마 전 숙청된 중국의 보시라이는 수뇌부를 도청하다가 발각된 것이 숙청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한다), 여론조사 기관은 성업 중이다. 이 정권은 대대적인 민간인 불법사찰을 감행하기도 했다.
고급 정보는 늘 제한적으로만 공개된다. 국민들은 자신이 선출한 권력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국가기밀이라는 이름 아래 고급정보들은 늘 어둠의 통로에서만 움직이며 국가의 주인이라는 대중은 알지 못한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1976년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가 의장을 맡은 위원회의 청문회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결과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명분 삼아 수많은 결정이 행정부 단독으로 비밀리에 행해졌다. (…) 미국의 건국자들이 만든 헌법 초안과 현재의 미국 헌법은 정책 결정이 어느 일인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지 못하게 했지만 국가 기밀활동에서는 예외가 된다. (…)
타당한 국기기밀이란 무엇인가. 어떤 기밀이 행정권을 가진 기관 혹은 정식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감시와 미국 국민의 평가를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는가. 암살 음모?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것? 미국 국민에 대한 강제적인 약물 테스트? 케이블 방송을 차단하는 것? CIA와 군사기관에 의한 대규모 미국 내 첩보활동? 정부기관이 인권단체를 매수 조정해 관의 나팔수로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 이것은 모두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각각의 사례들은 비밀 첩보활동이라는 이름 아래 국회와 대중의 심사를 면제받았다." (<감시의 시대>(아르망 마틀라르 지음, 전용희 옮김, 알마 펴냄))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아니 좀 더 완벽한 형태의 검열이다. 검열이란 특정 정보가 수신자에게 전달될 기회를 사전적으로 박탈하는 행위이라면, 이것이 비판받는 주된 이유는 정보에 대한 제한 없는 접근이 보장될 때에만 인간은 올바로 판단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게 될 터이라는 점에 있다. 그런데 자신들에 불리한 정보를 국가기밀로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권력은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헌법에 금지된 검열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발화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아예 발화자에게 정보가 입수되는 것 자체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정보 독점은 단순한 검열보다 더 위험하다. 더욱이 정보의 비대칭성은 주권재민의 원칙, 즉 주권은 국민에 있고 다만 선출된 권력이 이를 위임받아 통치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키리크스는 이런 정보의 비대칭성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국민주권의 원칙을 복원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키리크스의 폭로 중에는 한국에 관한 것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었을 당시 버시바우 주미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노무현 정권은 반미감정을 이용하는 정권"이라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도 한국 정부가 반미감정을 이용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매국적임을 넘어 거의 간첩 행위에 가까운 발언이며, 역시 "뼛속까지 친미인 정권"임을 확인하게 된다. 위키리크스의 폭로가 조금 일찍 터졌더라면 대선 결과가 달라졌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권력은, 총구에서가 아니라, 정보에서 나온다.
'가카'의 '기다려 달라' 발언도 위키리크스를 통해 확인되었다. 즉 2008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후쿠다 총리가 일본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표기하겠다고 통보하자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답변했음이 사실이라는 것. 위키리크스 이전에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지만 청와대는 펄쩍 뛰면서 한국민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이라는 둥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둥 법석을 떨었다. 물론 우리의 '조중동'도 역시 장단을 맞추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문서의 영어표현은 "hold back"인 바, 이 표현은 여러 의미가 있어서 꼭 '기다려 달라'고만 번역할 수 없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물 타기에 불과하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미 그 발언을 '기다려 달라'라고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도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가카'의 한국어 발언을 "hold back"으로 번역했는데 그 해석이 다양하게 될 수 있다면, 같은 발언을 일본어로 번역한 경우가 가장 중요한 참조점 아니겠는가. 그러니 '기다려 달라'가 원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위키리크스는 설립 3년 동안 <워싱턴포스트>가 30년 동안 올린 특종보다 훨씬 더 많은 특종을 공개했다고 한다. 그것도 기성 언론과는 달리 완전한 무료였다. 권력이 결사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정보를 파헤치고 그것을 무료로 공개하는 일은 전혀 새로운 형식의 언론이 아닐 수 없다. 어산지는 정보 종사자들의 정의감과 네티즌의 정보 공유 욕구를 세계적 차원에서 조직하는 방식으로 대안 언론을 만들어 냈다. 내부자의 고발을 통해 고급 정보를 입수하고 검증을 거쳐 전 세계에 공개하는 시스템.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세계적 대안 언론을 만들어냈다.
어떤 정부도 어떤 자본도 위키리크스를 환영하지 않지만, 세계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한다. 권력은 정보 독점에서 나온다. 권력이 고급 정보를 독점한다면,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국가를 운영해나갈 수 있게 된다. 국가 권력의 정보 독점에 큰 구멍을 낸 위키리크스는, 결국 민주주의와 국민주권 원리의 충실화를 위해 크게 기여하는 셈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주인이다. 주인을 속이는 머슴들의 속임수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
웹은 자유로운 공간이지만 기본적으로 그 정보를 보관하고 유포시키기 위해서는 서버와 호스트를 관리 유지할 최소한의 공간은 실재해야 한다. 정보의 공개에 적극적인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이런 일을 해준다. 제보된 정보를 검증하고 서버를 유지하려면 돈도 필요하다. 독지가들의 기부에 의해 운용된다. 예외적인 권력, 예외적인 돈에 힘입어서 위키리크스는 발붙일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스위스는 세계 시민의 주권회복을 위한 민주주의의 세계적 성지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국격'이란 이런 데서 비롯된다.
물론 반격도 만만치 않다. 위키리크스에 대해 세계 곳곳에서 후원금이 답지하자 비자카드와 마스터카드는 그 후원금 처리를 거부했다. 그러자 '사이버 의적' 어노니머스가 지원에 나서서 그 두 카드사에 디도스 공격을 가했다. 이렇게 투명한 정보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네티즌 대 권력 및 자본의 싸움은 점점 가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계적 대변혁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다. 언론들이 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네티즌들이 직접 나섰다. 어산지가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한 자료들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웹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위키리크스 한국. 한국의 대중지성이 활약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바로 가기).
"죽어라고 영어공부를 했어도 써먹을 데가 없었는데 마침 잘됐다"면서 위키리크스의 한국 관련 내용을 번역하는 일에 동참하는 네티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무료로 번역하여 올리며, 들어와서 읽는데도 돈은 필요 없다.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하는 곳에서 네티즌의 자발적인 정보공유 체제가 생겨난 것이다. 어떤 노동은 돈과 바꿔지지 않을 때 오히려 환금노동보다 훨씬 커다란 성취감과 보람을 준다고 하거니와, 이 경우야말로 이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한국 정부와 언론이 떨어뜨린 국격을 네티즌들이 앞장서서 회복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위키리크스란 위키피디아의 이념과 용어를 따온 것인 바, 'WIKI'는 'What I know Is'의 약자이다. 즉 대중들이 직접 쓰는 백과사전인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파가 지식의 대중적 전파를 통해 민주화에 도달하고자 했다면, 위키피디아는 아예 그 지식을 대중들이 직접 생산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대중은 지식의 전수자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자임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파워엘리트들이 정보 독점을 통해 민주주의를 우중정치로 타락시키려는 시도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월급을 받고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어떤 정보는 도저히 독점되어서는 안 될 불의한 정보라는 판단이 드는 것을 제보해오면, 이를 검증하고 웹을 통해 공유하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세계적 정보 독점이라는 거대한 파이프라인에 큰 구멍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정권 안보를 위한 '기밀'들은 대중에게로 유출(leaks)되었다.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통해 활성화된 대중지성은 이제 지식의 창조와 공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보 독점에도 균열을 내는 셈이다. 그 균열은 권력에는 큰 타격이지만, 동시에 정보 공개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의 붕괴를 막는 버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키피디아, 위키리크스, 어노니머스 등 인터넷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대중 운동은 세계시민의 대항쟁이며, 후세에 프랑스 대혁명에 버금가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으리라. 백과사전에서 위키피디아로, 또 위키리크스와 어노니머스로 이어지는 흐름은 대중지성의 확립과 이를 통한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 ⓒAP=뉴시스 |
물론 한국 땅에 앉아 있으면서 어산지 성폭행 공방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CIA를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의심스럽다. 왜 하필 그 시기에 고소가 이뤄졌을까. 권력이 정치적 저항자를 파렴치범으로 몰아버리는 방식은 사실 오래된 단골수법이다. 물론 돈과 여자관계가 주 메뉴이다. 돈을 횡령했다거나,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식의 정보를 슬쩍 흘리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정보 장사'에 목을 매고 있는 황색 언론들이 다 알아서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돈 문제로 올가미를 걸었다. 여자 문제는 어산지에게 던져진 올가미가 아닐까. 돈 문제라면 확실한 물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물증을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한국 검찰이라면 증거 없이도 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식의 소설을 쓰고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지만, 영국 경찰은 그 지경은 아닌듯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성폭행 혐의란 어산지의 입을 틀어막을 유일한 죄목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산지의 입을 틀어막는 데는 혹 성공하더라도, 위키리크스의 '유출'은 결코 틀어막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 대중지성의 지속적인 분출이라는 인류의 근세사는 그것을 보여준다. 위키리크스는 이미 도도한 흐름이며, 어산지의 것만도 아니고, 어떤 검열로도 틀어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민주권의 의기양양한 확인이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보아도 흥겹다'(신경림 <파장> 부분)에서 보이는 '못난 자'들의 연대에 의해 이룩되는 '거대한 뿌리'이다.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 아이스크림은 미국 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김수영, '거대한 뿌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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