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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일성은 못 했던 일, 중국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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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승만과 김일성은 못 했던 일, 중국인들은…"

[중국과 通하다] <중국인 이야기>의 김명호

지난 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펴낸 서평집인 '앎과 삶' 시리즈 1~3권 중 '20대', '교육'과 함께 하나를 차지했을 정도로 '중국'은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관심사이자 변수다. 많은 중국 관련 책들이 나왔고 인기를 끌었다. 그 가운데 주목을 받은 건 주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마틴 자크 지음, 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왜 중국은 서구를 위협할 수 없나>(에드워드 스타인펠드 지음, 구계원 옮김, 에쎄 펴냄), <메가트렌드 차이나>(존 나이스비트, 도리스 나이스비트 지음, 안기순 옮김, 비즈니스북스 펴냄) 등 영미 학자들의 시선이었다. 관심사는 'G2'로 부상하는 이 나라에 대한 경제 분석이 대부분이다.

2012년 6월, 앞으로 10권까지의 대장정을 떠날 <중국인 이야기>(한길사 펴냄)는 앞서 나온 책들과 맥을 달리 한다. 40년간 중국을 "놀이터"로 삼았다는 국내 학자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말 그대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역사서이지만 연대 순이 아니라 <사기 열전>처럼 인물 중심이다. 마오쩌둥, 장제스, 장징궈, 위안스카이 등 유명한 인물들의 비화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 <중국인 이야기 1>(김명호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이 책의 저자 김명호 교수는 경상대학교와 건국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그가 '놀았던' 곳은 학교 바깥이었다. 1971년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방중을 보고 시작된 '놀이'는 지금까지 어림잡아 1000번쯤 홍콩과 타이완을 드나들게 만들었다. 수많은 희귀 사진을 모았고 명사들의 기록을 파헤쳤다. 책에 등장하는 중국 근현대사 속 인물들의 살아 있는 대사는 무협지를 연상케 한다.

그는 중국 최고 권위의 인문학 출판사인 삼련(三聯)의 서울지점 대표를 10년 동안 지내면서 집중적으로 중국 인맥을 쌓았다고 한다. 그의 취재원 중에는 중국 사람들도 취재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문화·예술계 인사가 많았다. 지금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는 '문화 노인'들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중국의 숨어 있던 기록들은 한국 독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중국과 중국인을 보는 관점은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 온 것과 다르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즐겨 찾는 이념적인 구분도, 국제 정세 분석도 그의 붓끝엔 없다.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려우나 "보고 들은 대로 쓰는 것"이 스스로의 힘이라 하는 그의 고백 대로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김명호 교수를 만났다. 다음은 그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중국은 나의 놀이터!

프레시안 : <중앙 선데이>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중국인 이야기>를 펴내게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한 계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김명호 : 그런 거 없어요. 애초부터 글을 쓸 생각은 아니었어요. 글을 써본 적도 없었고…. 그냥 무슨 사건만 터지면 (중화권에) 가서 직접 보다보니 이렇게 된 거죠. 2007년 3월에 <중앙 선데이>가 먼저 연재하자고 접근해 왔고, 두어 달 하다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길어져서 지금이 벌써 6년째죠. 지금까지 연재한 분량은 이번에 나온 1권의 여덟 배예요. 그걸 좀 더 다듬어서 앞으로 10권 정도로 낼 겁니다.

프레시안 : '책을 내면서 덧붙이는 말'에 "중국은 나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 그냥 놀이터였다"고 썼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중국을 놀이터 삼게 되었나요.

▲ 김명호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김명호 :
재밌으니까요. 처음으로 제대로 관심을 가진 건 1971년,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방중을 보고 나서였죠. 그때 외교부 장관이었던 차오관화(喬冠華)가 그렇게 멋있더라고요. 그 다음 날인가, 비원 앞에 작은 중국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궈모뤄(郭沫若)의 <낙엽>이라는 소설을 사서 봤어요. 그게 그렇게 멋있더라고요. 그때부터 틈만 나면 중국, 홍콩, 대만으로 날아가 잡지를 사 봤어요. 일부러 자료를 모으려고 한 건 아니고, 눈에 띄는 대로 사다 놓은 거죠.

그 한 1~2년 전에는, 봉은사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한문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도 난, 그런 것보다 근현대 쪽 얘기가 재밌더라고요. <논어>에 나오는 얘기라는 게 워낙 상식적이니까요. 사람들이 잊어버리기 쉬운 것들을 일깨워주니까 위대하긴 한데 난 공자보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더 똑똑한 것 같아요. (웃음)

사실 중국 근현대사라는 게, 우리에게는 사각지대 안에 있지 않았습니까. 중국 하면 고사만 생각할 줄 알았지. 그러니까 중국을 폐쇄된 사회로 받아들였던 거죠. 중국은 오히려 개방 사회를 많이 경험했어요. 개방과 폐쇄를 반복해 온 거죠. 그래선지 개방이 사회를 얼마나 활력 있게 만드는지 체험적으로 더 잘 아는 것 같아요. 덩샤오핑(鄧小平)이 '개방'에 대한 정의를 간단하게 내렸잖아요. "개방이라는 건, 여행의 자유화다." 북한이 왜 폐쇄된 사회겠어요. 개방을 하면 개혁이 따라오는 거고, 중국이 이렇게 빨리 성장한 저력도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언론이 오보를 낸 이유

프레시안 : 중국에 자주 가셨는데, 직접 가서 보니 무엇이 다르던가요.

김명호 : 안에 있으면 잘 안 보이죠. 예를 들어 톈안먼 사태 때, 전 우리나라 사람들 중국 보는 눈이 영 엉터리라고 느꼈어요. 한 사립대에 교수로 있을 적인데, 돈은 많이 들었지만 어떨 땐 일주일에 두 번 홍콩이나 대만엘 갔어요.

그때 한국 사람들은 그냥 책상머리에 앉아서 동구권 몰락이니 중국의 자유화 물결이니 (당시의 국제정세적 상황과 결부시켜) 떠들어 대는데, 가서 보면 절대 그런 생각이 안 들거든요. 왜인 줄 아세요? 중국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장 강력한 정권이에요. 당시엔 정권 수립도 얼마 안 됐을 때고.

그때 덩샤오핑이 '다른 나라에선 100만 명이 시위하면 큰 규모이지만, 우리 중국에서 100만 명은 소수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보기엔 톈안먼 사태를 진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가 그래요. 그냥 불만 가진 놈들 다 나와라, 나와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그 다음에 모조리 때려잡으려고 했다는 거죠. 그 과정에서 중국 정보기관원들도 시위대에 투입돼 버리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망명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때 정보기관원들도 같이 망명한 것 같아. (웃음)

프레시안 : 당시 한국 언론에서 큰 오보를 냈었죠. 개인적으로는 한 일간지 국제부에 있었을 땐데, 현지에서 나오는 국지적인 정보로는 전체 그림을 알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믿을 만하다고 알려진 일본 언론에 많이 의존했죠. 그런데 일본에서 '덩샤오핑 군과 자오쯔양(趙紫陽) 군이 충돌했다'는 보도가 나와서 다들 받아썼는데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김명호 : 그랬죠. 예를 들어 장쩌민(江澤民)이 국가주석으로 등장했을 적에, 한국에서 그를 리센녠(李先念) 사위라고 보도를 했어요. 일본에서 발간된 중국 인명록에 그렇게 나와 있었기 때문이죠. 헌데 오보였단 말이죠. 그때도 한국 언론이 기자들한테 어지간히 투자를 안 하는구나 생각했지요. 언론사에서 젊은 기자들에게 돈 두둑하게 주고 '마음껏 다녀봐라' 하면 제대로 보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프레시안 : 한국 지식인들이나 언론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틀이 있어요. 저희 세대의 경우, 대학 다닐 때 많이 읽은 리영희 선생의 영향이 컸죠. 그런데 그 관점엔 이념적인 정향이 있었고, '문화대혁명은 인간 개조를 위한 위대한 실험이었다'는 식의 설명은 실제와는 많이 다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김명호 : 나는 실수라고 생각 안 합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그렇게 부분적으로 더듬는 게 틀린 건 아니지요. 저도 예전엔 리영희 선생 글을 보고 '이 분은 중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리영희 선생 말도 맞는 거예요. 중요한 건 중국이라는 나라는 전체적인 파악이나 표현이 불가능하단 사실입니다. 한국은 작은 나라라 비교적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쉬운데, 그래서 한국 사람들도 그토록 단정내리길 좋아하는 건가 봐요. (웃음)

프레시안 : 저희 세대 중 일부에는 중국 혁명에 대한 동경을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인물에 있어서도 '마오쩌둥(毛澤東)은 혁명가, 장제스(蔣介石)는 독재자', 이렇게 극명하게 구분해서 보았죠. 중국이 점점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든가요.

김명호 : 그렇게 보는 게 편하지 않습니까. (웃음) 그런데 소위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절대 아닙니다. 그냥 자본주의 국가죠. 기본적으로 중국 사람들한테 사회주의가 안 맞아요. 사유 재산 제도가 제일 먼저 발달한 곳 아닙니까? 뭐든지 소유권을 놓고 이야기하고. '처제 엉덩이 반쪽은 형부 것'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사회주의를 하려고 했으니 그게 되겠습니까. 과거에 인민공사에서 농민들한테 농사지으라고 소 한 마리 주면 얼마 못 가 그 소가 죽었어요. 그거 데리고 열심히 농사지어봤자 자기한테 오는 게 없단 걸 알거든요. 하지만 소가 죽어버리면 그래도 고기 한 점 얻어먹잖아요. 그러니 '집단 농장' 같은 게 어울릴 리가 없죠. 사회주의는 차라리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잘 어울리죠.

ⓒ프레시안(최형락)

중국 근현대 백가

"1925년 10월 19일, 장징궈(蔣經國)는 "혁명인지 뭔지 하는 괴물이 남편을 물어가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잡으려 한다"는 어머니의 한숨을 뒤로 했다. (…) 장징궈는 배 안에서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를 탐독했다. (…)

(장징궈가 유학을 간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온 중국인 학생들의 관계는 국·공 양당처럼 복잡했다. 서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충돌과 마찰이 그치지 않았다. (…) 장징궈는 학생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질 때마다 항상 공산당 편에 섰다. 국민당 쪽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와 맞서려 하지 않았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의 아들이어서가 아니었다. 장징궈는 대연설가였고 청년단원이었다." (<중국인 이야기 1> 186~187쪽)

프레시안 : 이 책에는 수많은 인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가 시기 순이 아니라 인물별로 펼쳐져 있어요.

김명호 : 동양의 역사는 역시 사건보단 사람에 의해서죠. 중국이란 나라는 특히 더 그래요.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정수로 평가받는 건 <사기-열전>이잖아요. 그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인물'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하죠. 마테오 리치도 중국에서 선교할 때 한 명 한 명 붙잡고 하는 것보다 영향력 있는 한 명을 붙잡는 게 훨씬 좋다고 했다나요.

프레시안 : 이 책의 인물 이야기는 '국-공'으로 이분된 인물관을 깨게 만듭니다. 그 중에서 장제스의 아들이자 제6·7대 대만 총통이었던 장징궈 얘기가 기억에 남아요. 소련에서 12년을 있었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 이유서를 제출하면서 아버지 장제스를 독하게 비난하기도 했다고요.

김명호 : 장징궈는 그 평생에 가장 좋아했던 노래가 '인터내셔널가(歌)'예요.

프레시안 : 그런 사람이 대만을 몇 십 년간 통치했단 사실이 희한하게 느껴지네요. (웃음)

김명호 : 난 희한하다고 생각 안 해요. 중국적이라고 생각해요. 루쉰(魯迅) 글에도 나옵니다. 데모하는 과격 학생들을 진압하는 경찰지휘관도 옛날에는 학생이었고, '진보적'이었다고.

프레시안 : 같은 맥락에서 중국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대만 학자 후스(胡適)에 대한 평가도 새로웠어요. "중국의 21세기는 후스의 시대가 될지 모른다"고 쓰기도 했는데요. 어떤 의미입니까?

ⓒ프레시안(최형락)
김명호 :
후스도 한국엔 무슨 어용학자 비슷하게 알려졌는데, 물론 그런 면도 있죠. 틀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용학자면서도 늘 최고 통치권자를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책에도 '최고 권력자 장제스의 쟁우(爭友)'라고 표현했잖아요. 전에 제가 타이페이에서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후스의 무덤에 가게 되었는데요. 장제스가 멋있는 비문을 남겼더라고요. '세월이 지나면 이 무덤도 허물어지고, 이 산도 평지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남긴 언론 자유의 소중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어요.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중국에 아주 유명한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있었는데, 말년에 <70년의 경력>이라는 회고록을 냈어요. 거기에 저자가 과거에 반(反) 기아 운동 때문에 잡혀갔다가 누군가에 의해 구명된 경험이 쓰여 있어요. 알고 보니 구명을 위해 가장 힘쓴 사람이 후스였다는 겁니다. 저자는 후스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그토록 써 붙였는데 말이죠. 하지만 후스는 "지금 저 젊은이들 나이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다"라며 수사기관원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얘기를 몇 십 년 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밝힌다고 고백했어요. 실제로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후스를 추앙한다는 고백이 많이 나왔습니다. 개혁·개방 때문에 그 숫자가 늘어난 게 아니라 그때에 이르러서야 사실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중국공산당 정부 초기엔 후스 비판 운동이 거셌거든요. 삼련서점에서도 후스 비판 자료집까지 냈을 정도니까요. 내용을 보면 어린 시절 누가 후스한테 뭘 떼어 먹혔다느니, 별 유치한 게 다 있어요. 게다가 후스의 아들은 (압박에 못 이겨) 아버지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나중엔 자살했어요.

프레시안 : 위안스카이(袁世凱)도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었다고 썼어요. 우리는 그를 아주 보수적이고 부패한 군벌이라고 정의 내리곤 하는데요.

김명호 : 그게 '촌스럽다'는 겁니다. (웃음) 중국에서 과거제도를 없애고, 모든 벽을 허문 사람이 누굽니까? 위안스카이입니다. 책에도 썼지만 그는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국가 운명의 판도를 바꾸는" 사람이었어요. 어디를 가든 항상 주역이었고요.

쑨원(孫文)은 그에 비하면 훨씬 떨어지는 사람이었어요. 신해혁명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쑨원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요. 주로 해외에서만 활동했으니까. 그러다보니 나중에 쑨원이 귀국할 때 혁명파들이 대 함대에 온갖 무기에 돈을 들고 와서 혁명을 하겠다고 요란법석을 떤 거죠. 그런데 있긴 뭐가 있어요. 빈손으로 왔지. 그런데 그때 한 얘기가 뭡니까. "'혁명 정신'을 가져왔다." (웃음)

중국의 세 점, '진시황-수양제-장제스'

프레시안 : 그럼 장제스는 어떤 지도자였다고 봅니까. 한국에는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요. 이 책에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 의식 때 톈안먼 광장을 공습하려다가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김명호 : 역사의 죄인이 되기는 싫었겠죠. 장제스는 시종일관 중국공산당을 적대시했지만 '하나의 중국'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중공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분열과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산당보다 더 무자비하게 다뤘어요. 이 점에 있어서는 마오쩌둥도 장제스를 높이 평가했죠.

그래서 마오쩌둥도 장제스가 절대로 그때(중화인민공화국 선포 개국대전 의식) 톈안먼을 공습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어요. 장제스의 역사의식이 그러하기도 했고, 폭격해서 공산당 지휘부를 섬멸한다고 한들 중국 북방이 이미 붉은색으로 물든 판이라 대세 역전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문화혁명 때도 장제스의 고향에는 홍위병들이 못 들어가도록 보호했지요. 장제스는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니까요.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중국공산당은 톈안먼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개국대전 의식을 거행했다. 이른 아침 타이완의 장제스 관저에는 개국대전 식장 공습 명령을 하달해달라는 공군사령관 저우즈러우의 전화가 빗발쳤다. 장제스는 출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좀 기다려라"가 회답이었다.

시간이 임박해오자 저우즈러우는 "출격이 지체되면 제시간에 목적지 도달이 불가능하다"며 재차 명령을 청했다. 그제야 몸을 벌떡 일으킨 장제스는 "임무를 취소하라"고 단호히 말했다." (401쪽)


ⓒ프레시안(최형락)

중국을 보는 눈,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중국 역사에 25개의 왕조가 있었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통일 왕조는 한나라와 당나라입니다. 1998년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할 적에, 비행기를 베이징이 아니라 한·당 문화의 중심인 시안(西安) 즉 장안에 내렸거든요. 클린턴을 시안에 내리게 했다는 것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도 순수한 한족 문화, 한·당 문화의 계승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한나라 이전에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게 진시황이었죠. 하지만 통일의 과실을 누린 건 한이었습니다. 그게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졌고, 중국을 상징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위·진 남북조 등 혼란이 이어졌고, 그걸 수습한 게 수양제입니다. 그 다음 대륙 통일의 과실을 누린 건 당이었어요. 또 시간이 흘러 청나라가 몰락한 뒤 장제스가 국공 합작을 펼쳐 오로지 국내 통일을 주도했어요. 그 다음 대륙에 들어선 게 중화인민공화국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을 역사적 점으로 놓고 보면 왕조로는 한나라-당나라-중화인민공화국, 인물로는 진시황-수양제-장제스로 보는 게 맞아요. 중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봤을 때 장제스는 엄청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평가할 땐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틀은 필요 없어요. 얼치기 지식인들이나 하는 소리죠. 큰 시각으로 봐야 해요. 예를 들어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20세기 후반의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어요. 호불호를 떠나 인정해야 하는 엄정한 사실인 거죠.

프레시안 : 그렇다면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김명호 : 마오쩌둥은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아니라 토머스 모어의 후계자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제스가 없으면 마오쩌둥도 없다고 봐야죠. 그래서 중국인들이 톈안먼 광장에 장제스 초상도 함께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두 명의 초상을 함께 걸어야 정상이라고. 얼마 전에 실제로 한 시골 농부가 자기 돈을 들여 마을에 장제스와 마오의 동상을 나란히 세우기도 했어요.

이승만-김일성, 겸상이라도 한 적 있나

프레시안 : 결국 종합해 보면, 한국인들이 중국을 보는 데 있어 '너무 심하게 편을 가른다'는 게 문제라고 볼 수 있겠네요.

ⓒ프레시안(최형락)
김명호 :
왜 그리들 좌우라는 구분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현 정부에 대해 약간만 비판적인 말을 하면, 전부 좌익으로 몰아버리잖아요. 고약하죠. 실제로 (비판 대상인) 그들이 진짜 우파도 아니거든요. 솔직히 한국에 진짜 보수·진보가 있나요? 진보·보수는 남이 평가를 하는 거지, 자기 스스로 주장할 게 아니죠. 저는 요새 자기가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이 먹어서 더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해요.

게다가 말로는 '팩트', '팩트' 하면서 진짜 팩트는 구분 못 하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어떤 신문사 고위급 인사가 "여기 어떤 회사가 이사를 왔는데, 내가 보기엔 저 회사에 돈이 없는 것 같다. 저 큰 빌딩을 사 왔으면서 리모델링을 안 했으니까"라는 말을 하더군요. 이사를 왔고, 큰 빌딩을 산 건 팩트죠. 그런데 '저 회사 돈 없는 것 같다'는 불확실한 거죠. 그게 지금 우리 기자라고요. 직접 돌아다니며 많이 보지를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남과 북도 자주 만나다 보면 뭔가 제대로 보이는 게 있을 텐데.

프레시안 : 우리는 북한만 다녀와도 간첩 취급을 받으니까요. (웃음)

김명호 :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차이가 있지요. 우리는 해방 이후, 양쪽에서 집권한 세력이 각각 '놀던 동네'가 달랐어요. 이승만과 김일성이 밥 한 끼 같이 먹어본 적 없었거든요. 같이 뭘 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중국인들은 국공합작, 항일전쟁으로 뭉친 경험이 있잖아요. 그러고 나서 또 싸웠죠. 이런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러니 이 사람이 내 편인지 네 편인지 확실히 구분도 안 가요.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 국민당 쪽에 있다가 공산당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걸 보통 전향이란 의미를 담아 '귀의'했다고 하잖아요? 한번은 전 국민당원인 어떤 사람 하나가 공산당 모임에 나타났는데, 저우언라이가 '저 사람은 귀의한 게 아니라 '원대 복귀'한 거다'라고 했대요.

저는 톈안먼 사태 이후 홍콩에서도, 그 사태 때문에 도망 나온 사람들이 홍콩 내 대륙 관헌 쪽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자주 봤어요. 장제스랑 마오쩌둥만 놓고 봐도 그래요. 마오쩌둥은 국민당 초대 선전부장입니다. 참고로 마오쩌둥이 국민당 선전부장 할 적에 장제스는 당 창당 대회에 들어가지도 못 했어요.

일본 신문도, 'G2'도 버려라

프레시안 : 오랫동안 중국인들을 만나 오셨죠. 한국인들과 뭐가 가장 다릅니까?

김명호 : 다른 점 너무 많죠. 생긴 게 비슷해서 자꾸 우리와 닮은 게 많다고 착각하는데, 사고방식은 중국 사람들이 훨씬 더 서구적이에요. 개방적이고, 수용력이 뛰어나죠.

프레시안 : 최근에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 행사 도중에 발생한 중국인 시위대의 폭력 사태라든지,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이나 네티즌끼리의 싸움 같은 한·중 젊은이들 사이에 '민족주의'가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명호 : 민족주의는 그들만큼 우리도 강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웃해 있는 나라이니까 원체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거겠죠. 하지만 사이 나쁜 이웃집끼리도 눈 맞아 결혼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동반자'일 수는 없지만, 가끔은 그러기도 하는 게 한·중 관계라고 봅니다.

프레시안 : 한·중도 한·중이지만, 미·중 관계가 국제적 화두입니다. 'G2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김명호 : 별로 관심 없어요. 그 말 자체를 얼마 전 처음 들었어요. (웃음)

프레시안 :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 언론에서 중국 관련 기사를 쓸 때 외국 보도에 많이 의존한 게 사실입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일본 신문을,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 자료를 보고 기사를 썼어요. 그러다보니 언론은 물론이고 대중이 중국을 보는 눈까지 '우리 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명호 : 우리 눈으로 중국을 보는 훈련이 안 되어 있죠. 마오쩌둥이 '오성홍기의 붉은색에는 조선인들의 선혈이 배어있다'는 말도 했었어요. 중국 혁명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거죠. 하지만 막상 한국 사람들한테 중국 얘기를 하라고 하면 나오는 게 빤합니다. 루쉰과 마오쩌둥에서 끝나죠. 한·중 수교도 그냥 빨리 성과를 내려고만 했지, 정부고 언론이고 민간 차원에서도 너무나 준비가 안 되어있었거든요. 그러니 헛갈리는 건 당연하죠.

그건 중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헛갈리는데 자기들이라고. 가끔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만나고 나서 저한테 한 소리를 하는데, 그럼 저도 기분이 나빠요. 당신들은 한국에 대해 뭘 아냐고 한 마디 해주죠.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데, 젊은 학생들은 중국을 보는 관점이 어떻던가요?

김명호 : 예전과 전혀 다르죠. 혁명이니 뭐니 관심 없고요. 하지만 전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이 중국을 보는 눈은, 과거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어떤 대학생들이 방학 동안 중국 연안에 가겠다고 했대요. 연안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중국 학생들과 '연안 정신'(편집자 주)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고요. 그 얘길 듣고 황당했지요. 중국 학생들은 속으로 '연안보다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웃음)

프레시안 : '김명호가 중국을 보는 관점'을 한마디로 정리해 주신다면요?

김명호 : 없어요. 그냥 '사실'이 뭔가 보고 싶은 거죠. 하지만 어떤 걸 발견하려고 기를 쓴 적도 없고요.

프레시안 : 이번 책은 역사적 사건 순으로 쓰이진 않았어요. 제목대로 '이야기'인데요. 언젠가 통론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김명호 : 우리는 항상 '체계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따지는데, 인생이나 역사가 그렇게 따지는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중국은 원래가 뒤죽박죽인 나라예요. (웃음) 그렇기 때문에 끝없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통론을 쓸 생각도 없습니다. 이 책 역시 쓸려고 해서 나온 게 아니잖아요. 다니면서 보기에도 바쁜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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