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관련이 없다" 대통령 박근혜의 말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자신의 무관함, 그리고 대통령 당선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주장에 힘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 해법은 "국회에서의 논의"로 압축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자신의 관련 여부와 관계없이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라는 민주주의 유린 사태에 대해 전혀 격노하거나 문제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무관하면 아무런 논란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식이다. 공적 사안에 대한 최고 책임자의 자세가 아닐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기초적 인식조차 없다. 자신의 당선에 기여한 부서에 대해 애정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식은 대통령의 국기 수호 의무라는 점에서 참으로 위태롭다. 여기서 국기는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국정원에 대한 국회에서의 논의"라는 방식은 국정원에 대한 국회의 조사에 대해 정부의 성실한 협력과 국정원 개혁의지가 전제되는 경우 옳다. 그러나 박근혜의 발언은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로 들린다. 아니라면, 의도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된 자신의 회피하기 어려운 책임도 함께 거론하면서 국정원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강조했어야 한다. "정말 박근혜가 당선되기는 한 거야?"라는 의문으로 자신이 혹여 억울한 처지에 놓여 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문제 처리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나와 주어야 했다.
정상회담 발언록 발췌 공개, 박근혜가 승인했는가?
그런데 지금 현실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국정원에 대한 여론의 포화가 작렬할 기세를 보이자, 남북 정상회담 발언록을 발췌 공개함으로써 이 사안을 덮으려는 의도가 분명한 국면이다. 더군다나 정상회담 발언록 공개가 어떤 외교적 파장을 불러 오는지 알지 못할 리가 없는 대통령이 이에 대해 일체의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것은 이 나라가 향후 국제적으로 어떤 시선을 받게 될 것인지 암담해질 지경이다.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정원의 행태에 대통령이 관여한 바가 없는가? 국정원은 오직 대통령에게 일차적 책임을 지는 기밀 부서인데 대통령의 승인도 없이 국정원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면 이는 대통령의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대통령의 재가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면 박근혜의 향후 남북관계 정책은 심각한 모순과 위기에 처하고 말 것이다. 당장의 정치적 곤경을 벗어나겠다고 제 발목을 스스로 묶은 격이다.
정보기관의 민주주의 교란 행위와 대통령의 침묵
이번 사태의 흐름을 보면, 민주주의 압살을 위해 분단체제의 냉전정책을 동원해왔던 군사정권 시대의 악습을 반복하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으로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가 제기되자 이를 더는 정치사회적 논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분단 상황에 따른 안보논리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집권세력의 매우 추잡한 태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 제3세계 국가의 민주주의를 파괴한 미국의 "더러운 전쟁(dirty war)"의 아류다.
국정원의 댓글 사건은 단지 댓글 몇 개로 선거 결과가 달라졌으리라는 식의 논리에 따른 문제 제기가 아니다. 댓글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더 큰 기획이 드러나지 않았을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댓글사건으로 확인된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는 정보기관이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 방식을 교란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이에 대해 일체의 문책과 국정원에 대한 개혁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국정원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박근혜의 태도는 국정원의 역할에 대해 이 정부가 어떤 생각과 지침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경악스럽다. 자칫 이는,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최고 권력자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럴 경우 결국 박근혜는 국정원에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면허를 주는 셈이 된다.
대통령에 의한 국기문란 사태
<조선일보>는 25일 사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록 공개와 관련해 "대통령에 의한 국기문란사태"라고 규정했는데, 그것은 사실관계에 맞지도 않고 도리어 대통령 박근혜의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 아닌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국가기관에 대해 문제 삼기는커녕 옹호하고 있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으니 이는 용납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주권을 지키는 체제다.
정상회담 발언록 공개가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할 여지조차 없다. <조선일보>는 국가 이익이 전제될 경우 발언록 공개가 시기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발언록 공개에 대한 국가 이익을 비롯한 실익 판단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시기를 통과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집권세력에게 유리한 것은 언제나 공개대상이 되는 선례가 만들어지는 폐해를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회담 외교 발언록에 대한 공개여부는 국제사회에서 여야의 정쟁대상이 아니라, 이후의 역사에 맡기는 원칙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국정원의 발언록 발췌 공개는 그러한 국제사회의 외교윤리와 원칙 전체에 대한 도전과 위반이며, 우리 외교에 대한 국제적 신뢰에 타격을 입히는 국가이익 훼손 사건이다. 정작 누가 국가이익에 손상을 입혔는지는 이로써 분명해지지 않는가? 그런 기관은 당연히 법적 심판대에 올려놓고 철저한 해부와 변화를 꾀하도록 해야 한다.
공개된 발언록에 대한 치열한 논쟁 필요
한편, 이미 공개된 이상 2007년도 남북 정상회담의 발언에 대한 논란과 평가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왕지사 이리 되었다면 치열한 논쟁이 요구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회담의 중심에는 남과 북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공동의 평화경제체제를 수립하는 동시에, 강대국 미국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남북 협력체제 강화의지 표명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북방한계선 NLL의 경계선에 갇혀 있는 않은 분단체제 극복 전략의 일환이자 평화체제 건설을 위해 대단히 중대한 구상이자 제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말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갖고 있는 면모에 대한 여러 상반된 평가가 나올 수 있겠지만 결국 핵심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이러한 가치를 지닌 발언과 프로그램을 존재하지도 않은 "NLL 포기 발언"이라는 식으로 왜곡하고, 그 모든 논의의 과정과 내용을 거두절미한 채 최근의 국정원 사태를 막기 위한 방어책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집권세력이 남북관계 해결과 평화의 미래를 만들 능력이 없는 집단임을 말해주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의 이른바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도 단지 과정이라는 의미에 불과할 뿐 그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 프로세스의 단계별 목표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부재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평화협정 체제 논의 공식화해야
지난 6월 21일 신선호 유엔주재 북한 대사가 평화협정체제와 함께 이루어질 비핵화에 대한 발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북이 꾸준히 전개해온 논리의 확인이다. 지구상 어떤 핵무장 국가도 자신의 핵무장 해체에 조건을 단 적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만이 유일하게 평화협정과 연동된 비핵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볍게 간과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북의 비핵화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협정논의만 배제하자고 할 까닭과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물론 북이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실제로 이행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따져봐야 하겠으나 일단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가는 것은 남북 쌍방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전면적인 비핵화가 실천된다면 그 이상 좋을 일은 없다. 아닌가?
이에 더하여, 미군의 주둔에 대해 북이 유엔사의 형식이 아닌 한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해석되는 대목도 주시해야 한다. 이는 향후 동북아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갖게 되는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의 제안에 대해 남쪽이 그대로 침묵하고 있게 된다면, 아마도 평화협정 논의 국면에서 또다시 아무런 주도권도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른다.
자충수
민주주의의 유린에서 분단체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해법을 갖지 못하고 인식의 기본마저 되어 있지 않은 정부라면 그 미래는 우리 모두에게 위기로 돌아오게 된다. 취임 100일은 그 정부의 핵심 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걸 풀어가는 역량이 입증되는 시기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박근혜 정부는 실패하고 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다고 여길지 모르나 생각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오류의 반복이라는 늪에 빠져 임기 내내 허우적댈 것이다. 그리고 더는 버티기 어려워지면 중도에 정상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무책임하고 무능한 집권세력, 아니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참으로 후안무치한 권력과 마주하고 있다. 자신들은 지금 정국의 방향 전환을 위한 수를 제대로 놓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스스로 판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 하다. 그건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전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란 결국 공학이 우선이 아니라 먼저 정도(正道)를 걸을 때만이 진가를 발휘하게 되어있다. 그걸 알지 못하고 술수를 쓰면 그것은 도리어 자신을 포박하는 그물이 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이다.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길을 자초하는 권력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 우리는 이미 적지 않게 보아왔다. "박근혜"라는 이름이 이 운명의 명단에 추가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여전히 방법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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