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 모델
광둥이 뜬다. 보시라이의 낙마로 충칭 모델이 주춤하는 사이, 광둥 모델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광둥 성은 인구 9000만에, 국내 총생산(GDP)은 한국에 필적한다. 일개 성(省)으로만 간주하긴 힘든 물리적 실체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광둥 성 서기 왕양(汪洋)은 차기 공산당 지도부에 진입하여 중원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커졌다. 광둥의 실험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열쇳말은 '행복 광둥'이다. 행복 추구는 인민의 권리라고 한다. 당과 정부가 인민에게 시혜를 베푼다는 낡은 사고를 청산하자는 것이다. '만능 정부'를 대신한 '유한(有限) 정부'를 강조하고, 경제 건설을 대체한 사회 건설을 목표로 둔다. 유한 정부와 사회 재건이 겨냥하는 표적은 당과 정부의 기득권 세력이다. 개혁 개방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이익 집단이 권력과 자원을 장악하고 체제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개혁의 장애가 이념 집단이었다면, 지금은 이념 없는 이익 집단이 복병인 것이다.
그러나 충칭처럼 재차 이념에 호소하는 정책과 대중 운동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민간의 참여를 독려하는 법과 제도의 정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일견 통치(government)에서 협치/공치(governance)로의 전환이라고 할 법하다. 개혁 개방이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권한 이전에 촉발되었다면, 광둥은 그 지방 권력의 일부를 다시 민간으로 하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민관 협치의 거버넌스로 그치지도 않는다. 선거 확대로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노동조합에도 투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래서 각종 직능 기구의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칸(烏坎)'의 촌민 자치로 상징되는 풀뿌리 민주도 수용했다. <남방주말>을 비롯한 자유주의 언론이 광둥에 다수 포진하고 있음도 상대적인 언론 자유의 보장 탓이다. 이렇게 관과 민이 '함께 건설하고 함께 향유함(共建共享)'이 광둥 모델의 요체인 것이다. 당과 정부의 주도 하에 부의 공유(共富)를 강조했던 충칭 모델과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일각에선 광둥판 '신정(新政)'이라고도 한다. 제법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에 근접해 보이기 때문이다. 허나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혐의가 꼬리표처럼 따른다. 당정 개혁의 발판으로 시장 메커니즘을 적극 활용하려기 때문이다. 정부의 권력을 풀고 민간의 활력을 키운다는 발상이 실상 작은 정부/큰 시장의 논리를 답습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천안문 사태를 짓밟고 단행된 남순 강화(1992년)처럼, 중앙이 충칭 모델을 누르고 광둥 모델을 띄워 신자유주의를 재가동하려 한다는 독법도 있다. 광둥이 그 역할 모델로 홍콩을 학습한다는 점에서 이런 의구심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광둥의 실험을 충칭에 견주어 좌우의 구도로만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단견이 아닐까 싶다. 좌우가 공유하는 그 우심한 중심/중앙 주의야말로 병통인 탓이다. 돌아보면 지방 간의 상호 경쟁과 모방, 학습이야말로 개혁 개방의 활력을 낳은 토대였다. 다양성이 보장하는 일종의 '공진화(co-evolution)'였던 것이다. 습속에 따라 마땅함을 따른다는 옛 지혜의 복원이기도 했다. 즉, 중국은 이미 국민 국가의 테두리를 훌쩍 벗어나 제국적 지평에서의 민주화 경로를 밟고 있는 것이다. 좌우의 척도는 좁고 낡았다. 따라서 질문해야 할 것은 광둥의 남다름에 자리하는 역사의 깊은 뿌리이다.
광둥 네트워크
광둥은 일찍이 대외 무역의 거점이었다. 베이징이 조공-책봉 체제의 중심(center)이었다면, 광둥은 무역 네트워크의 허브(hub)였다. 즉, 북방의 위계적 질서와는 사뭇 다른 호혜적 관계망이 남방에서 작동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옛 질서를 조공-책봉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몹시 일면적이다. 그러한 인식 자체가 중앙 중심의 '국가 간 체제'에 침윤된 것이다.
특히나 조공이 드문드문 열리는 단속적인 연례 행사였음에 비하여, 광둥을 중핵으로 삼은 경제망은 촘촘하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가령 베트남의 베이징 행은 4년에 한 차례에 그치는 것이었지만, 광둥과의 교역망은 매년 계절풍을 따라 반복되었다. 생활 세계의 실감에서 어느 쪽이 더 가까웠을까? 왕조 간의 조공보다도 민간과 지방의 네트워크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방이 구질서의 보루였다면, 남방은 신질서의 선봉이었다. 바닷길로 활짝 열린 서구와의 접촉과 교류로 광둥은 새로운 지식과 문화가 유입되는 관문인 동시에, 중국인의 해외 진출의 첨병이기도 했다. 그래서 혁명에 혁명을 거듭한 중국의 현대사는 대저 광둥 발(發)이다. 태평천국운동의 홍수전, 변법자강운동의 캉유웨이/량치차오, 신해혁명의 쑨원이 모두 광둥 출신인 것이다.
그들의 활동 무대 또한 광둥을 훌쩍 넘어 홍콩, 도쿄, 고베,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넘나든다. 일찍이 광둥 상인들이 개척해 둔 혈연/지연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즉, 광둥 네트워크는 돈과 상품이 오고가는 물류망이었을 뿐 아니라, 개혁과 혁명의 뜻이 오가는 문류망이기도 했다.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는 '신광둥'이야말로 '신중국'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이 연결망에 조선도 전혀 무연치만은 않았다. 인천 개항장을 주름잡던 화교들이 광둥 출신이었을 뿐더러, 광둥의 혁명에도 조선인들이 동참했던 것이다. 지금도 광주 코뮌(1927년) 열사묘에는 조선인 혁명가 150명이 묻혀 있다. 김산의 행적을 그린 님 웨일즈의 <아리랑>(송영인 옮김, 동녘 펴냄)에도 당시의 일화가 절절하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다. 이 '아열대의 소나무'야말로 (동)아시아 속의 광둥이라는 혼종성을 상징한다.
아니 동아시아만으로는 부족하다. 광둥 출신 화교는 전 세계 3000만을 헤아린다. 세계 화교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들은 동남아는 물론 태평양 건너 미국 화교의 절대 다수를 이룬다. 광둥이 개혁 개봉의 선두에 섰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 퍼져 있는 화교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들 화교들의 규모와 경제력은 어지간한 국가를 능가하는 것이다. 베이징 어와 발음이 전혀 다른 광둥 어가 지방의 사투리임에도 '비즈니스 언어'로 명맥을 유지하는 저력도 여기에 있다. 유태인 네트워크에 버금가는 화교 네트워크의 허브라는 점이야말로 광둥이 보유한 으뜸 자산인 것이다. 광둥은 '화교들의 이스라엘'이다.
동아시아 경제 질서
광둥 네트워크란 호시(互市)의 일종이다. 변경의 '자유무역지대'로 국가에 덜 구애받는 민간 교류의 장터였다. '지방(local)' 간 무역을 증대시켜 상호 의존 관계를 심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호시는 조공의 위계적 관계의 경직성을 완화하는 호혜적 보충재로 기능했다.
흥미로운 점은 서구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광둥 네트워크가 해체되지 않았음이다. 도리어 더욱 확산되었다. 중화 질서의 해체와 국가 간 체제로의 재편이라는 '천하대란' 속에서도, 그 난세를 기민하게 활용하면서 광둥 네트워크는 대약진했던 것이다. 1842년 난징 조약 체결로 상하이가 개항하자, 가장 먼저 진출한 이들이 광둥 상인이다.
이들은 1858년 일본이 개항하자 요코하마와 고베 등지에도 새 둥지를 틀었다. 조선이 개항하자 인천의 상권을 틀어쥔 것 또한 광둥 화교들이다. 즉, 동아시아 경제 질서의 재편 또한 그 실상을 보자면 '서구의 충격'으로만 갈음할 수 없는 것이다. 광둥을 허브로 한 네트워크가 동아시아 개항장을 노드로 삼아 확충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 도시 간 네트워크로 엮이는 경제 질서란 '국민 경제'의 총화인 한·중·일 삼국지와는 사뭇 다른 구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청을 눌렀을망정, 경제적 실권은 여전히 화교들이 장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 또한 일본-조선의 양국 관계로는 온전히 파악될 사태가 아니다. 동북아와 동남아를 누비며 엮어낸 화교들의 상업-금융 네트워크에 일본이 뒤늦게 참여한 것임이 실상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처럼 광둥 네트워크는 홍콩, 싱가포르, 마카오는 물론 나가사키, 고베, 오사카, 요코하마, 인천, 부산 등 주요 경제 도시로 확산되었다. 중국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동원되기보다는 동향/친족 네트워크로 탈주와 탈영토화를 거듭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공황과 중일 전쟁의 아수라장이었던 1930년대도 동아시아 역내 교역만큼은 도리어 한층 활성화되는 역설이 일기도 했다. '동아 협동체', '대동아 공영권'의 구호가 먹힐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역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쑨원이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했던 장소가 고베였음은 의미심장하다. 그를 초청한 인사 또한 광둥 화교였던 것이다. 즉, 대동아의 주체 또한 비단 제국 일본만은 아니었다 하겠다. 이렇듯 광둥은 중국의 지방이자, 화교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횡단하는 네트워크의 허브이기도 했다. 작금 광둥의 활력 또한 이 거대한 뿌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광둥 모델이 모색하는 '사회 건설'은 청말 지방의 공론장이었던 '향리(鄕里) 공간'을 연상시킨다. 각 성 간 실험과 학습의 상호 경쟁은 중국판 지방 분권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앙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각 지방은 이웃 국가들과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 가령 동북 3성과 북조선의 합작은 북중 관계보다는 '성-국(省-國)' 관계라고 해야 온당할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나진·선봉과 신의주도 본래 북방에서 이루어지던 호시의 장소였다. 남방과 북방을 아울러 도처에서 민간 장터가 새로운 형태로 복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제 질서가 점차 20세기형 발전 국가의 '국민 경제'를 잠식해 가며 동아시아의 육체성을 확보해가고 있다.
정녕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는 오래 지속된다. 아니 그 뿌리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근대의 언어와 관념이 실상을 압도하며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브루노 라투르가 그랬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정곡을 짚은 통렬한 비수다. 포스트모던이라는 한때의 유행 또한 근대의 완고한 실체성을 승인한 이후의 사유라는 점에서 허황한 말놀음이었을 따름이다.
근대의 껍데기는 사라지고 있다. 20세기의 과제가 '개화(開化)'였다면, 21세기는 근의 맹목을 거두는 '개안'(開眼)'에서 출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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