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진실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사회적 고발자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진실을 말했어도 성립되는 명예 훼손죄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307조 1항)
200여 개 글을 올려 정부의 경제 정책을 분석하고 경고했는데, 그 중에 딱 두 건에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었다면? 그것도 처벌되어야 한다고 우리 검찰은 우긴다. 미네르바 사건. 물론 헌법재판소가 전기통신법 해당 조항을 위헌으로 판결함에 따라 풀려났지만 그는 104일 동안 미결수로 갇혀 있어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홍보 활동을 하는 기업에 대해서 불매 운동을 벌이면? 영업 방해죄로 유죄란다. '언소주(언론 소비자 주권 국민 캠페인)' 사건. '조·중·동'의 광고주를 억압했던 '괘씸죄'의 성격이 강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법원마저도 일부 유죄 판결을 했다.
이 정권 들어 대한민국에는 '유령'이 떠돌기 시작했다. 박경신이 이름 붙인 바에 따르면 유령의 이름은 '진실 유포 죄'이다. 이제 인터넷에 댓글이라도 하나 달기 이전에, 미리 변호사와 상의하지 않으면 안 될 판이다. 글쎄 변호사들이야 일거리가 많아지겠지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사회인가. 오늘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나. 북한인가, 아니면 박정희 시대인가.
▲ <진실 유포죄>(박경신 지음, 다산초당 펴냄). ⓒ다산초당 |
이런 거창한 사건들 말고도 세계적 기준에 어긋나는 것들은 많다. 인터넷에서 익명 비판을 할 자유, 학문적 양심에 따라 교과서를 집필할 권리, 불매 운동에 나설 권리 등은 보편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명예 훼손 죄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문화되었으며, 욕설을 할 권리(감정 표현의 자유)까지도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식민 시기와 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신체에 각인되어 버린, 자유와 권리 감각은 한껏 위축된 것에 불과하며, 세계 보편적 기준은 훨씬 폭넓게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시민들은 "거의 모든 표현이 허용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누구도 "이렇게 말해도 되나"를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은 빼고.
한숨이 나오는 분들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박경신도, 자신의 강의를 듣고 난 시민들이 '사법 개혁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매우 실천적인 질문을 해온다고 말하고 있다. 제3장에서 법과 관련된 각종 제도와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이런 물음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다.
사법 시험을 절대 평가로 바꾸고 합격자 수를 크게 늘려야 한다는, 즉 지나친 시장 제한은 특권을 낳게 마련이라는 주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변호사 면허 제도를 '농사 면허 제도'와 비유하는 상상력은 발랄하고 통렬했다. 만일 농사짓는 데 면허 제도를 실시한다면, 그리고 그 면허증의 소지자 수를 엄격하게 제한한다면, 쌀 배추 보리 등의 값은 얼마나 뛰어오를지, 그리고 그런 사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피폐화하고 소외시킬지를 상상해 보라는 것이었다. (박경신이 이런 자유로운 상상력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법 시험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좀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이렇게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개선책까지를 제시한다는 점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하지만 아무리 박경신이 촉구한다고 해도 사법적 제도와 관행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선출 권력이 아닌 사법부의 내부 개혁이란, 외부적 계기가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법부의 양식에 호소하는 박경신의 주장은 유감스럽게도 무력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사법부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변화 촉구의 힘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듯하다. 예컨대 영화 <부러진 화살>을 소재로 삼은 54화. 저자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분노하며 "그래,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을 잘 뽑아서 좋은 판사들이 임명되도록 하자"고 결의하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다고 말한다(293쪽). 이 영화의 가치는 재판 관행의 심각한 문제를 잘 드러낸 점에 있으며, 오히려 법원 내 권위주의의 개혁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옳은 말이다. 하지만 사법부 관행의 개혁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 개혁을 위해서 일반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선거 잘하는 것'을 통해 정치권력을 쇄신하고 이를 통해서나마 사법 제도와 관행의 개혁까지도 기대하는 것은 과연 '바보짓'이란 말인가. '바보짓' 말고 '현명한 짓'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
사법부 개혁 뿐만 아니라 법제의 개혁 방향에 대해서도 여러 제안을 던진다. 특히 사회적 강자와 약자의 현실적 역학 관계를 염두에 둔 채로 표현 자유를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주목할 만하다. 강자를 보호하는 법률인 '모욕 죄' 대신에 약자를 보호하는 '혐오 죄'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명예 훼손이나 모욕 죄 등은 주로 강자를 보호하면서 약자의 표현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다. 국왕 모욕 죄, 대역 죄, 불경 죄 등의 고색창연한 법의 개념을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는 그 법들을 폐지하기는커녕, 소위 사이버 모욕 죄라는 것을 신설하여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처벌할 수 있도록 강화하겠노라고 나섰던 적이 있었다. 박경신은 이를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바, 이 대목에 대한 서술들은 그런 박경신다운 날카로움과 명민한 논리가 돋보인다.
이런 악법은 왜 그대로 살아남는가. 사회는 하루가 바쁘게 바뀌지만, 법전은 스스로 바뀌지 않으니 독재 시기의 악법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우리 국회의원들은 너무들 바쁘시니 그 악법을 개정하는 본연의 임무에 투여할 시간이 충분치 못하다. 그러니 민주적 정권에서라면 현실에 맞지 않는 법들을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사문화(死文化)시켜 버리지만, 독재적 정권이 들어서면 정권의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는 검찰은 케케묵은 법전의 먼지를 털어낸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프란시스코 고야)
사문화되었던 강시 같은 법들은 부활하고 괘씸 죄에 걸린 사람들은 줄줄이 악법의 호출을 받는다. 미네르바와 정봉주와 언소주는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보안법 또한 이 정권 들어 강시처럼 부활했으며(유감스럽게도 이 책에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언급은 그 중요성에 비해 충분치 못하다), 만일 박근혜 정권이 탄생된다면 강시의 수명은 연장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생생한 구체적 사례들 속에서 표현 자유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에 널리 보도된 사건들 말고도 풍부한 사례들이 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는 바, 그 사례들은 박경신이 방송통신심의위원, 즉 일종의 검열관으로 활동하면서 다루었던 것들이다. 이 정권 들어 표현 자유에 대한 억압은 어떤 사례에 대해 어떤 수준에서 어떤 과정에서 이뤄지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저자의 이름을 일반인들이 널리 알게 된 '성기 사진 노출' 사건 역시 이 과정에서 나온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례에 기대면서 표현의 자유는 과연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오랫동안 한국의 검열자들은 음지에서 일해 왔다. 식민지 시기 검열의 기준은 오랫동안 비밀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검열자들은 자신의 업무를 공공의 담론 장에 내놓기를 꺼려했다. 그 까닭은 물론 표현 자유에 대한 정당성 없는 제약이 그들의 업무였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력의 하명에 의해서 그 제약은 이뤄져왔다. 제멋대로였고 폭압적이었다.
한국에서 표현 자유는 늘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왔지만, 기실 어떤 사회이건 무한정의 표현 자유가 보장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인 바, 이 합의를 위해서는 공적 담론 장을 통해 표현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첫 검열관으로서 박경신의 '커밍아웃'은 그런 의미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검은 안경' 쓰고 밀실에 머물렀던 검열관들의 오랜 전통을 그는 통쾌하게 거부했다. 이 책과 그의 블로그에 연재되는 '검열자 일기'는 이런 역사적 의미만으로도 매우 값지다.
옥에도 티가 있다고 한다. 훌륭한 책이라고 아쉬움이 아예 없기야 하랴. 몇 가지 들어보자.
첫째, 이 책은 세계 보편적 가치(주로 미국의 예를 들지만)와 한국의 오늘을 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국 법학 박사다운 면모이다. 물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며,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보여주는 데 효율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만도 있다. '표현의 자유=근대 서구'라는 등식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다. 표현 자유는 근대 서구에서 비롯되어 세계에 전파된 것일까. 또한 현재 그 지역의 사례들이 모범적이기만 할까.
예컨대 조선 시대는, 물론 양반 계층의 남성으로 한정되긴 했지만,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도 그에게는 사초(史草)를 보여주지 않았으며 유림들의 상소는 거리낌이 없었다. 한국에서 의사소통의 자유란, 서구적 근대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싹튼 것이 아니라, 식민 체험과 독재 시기를 겪으면서 왜곡되고 후퇴된 셈이다.
게다가 식민 시기와 독재 시기에,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표현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은 무수히 많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보완될 때 이 책은 설득력이 더해지지 않을까. 현재로서는 '서구=모범항'이라는 인식만이 지나치게 강력하다. '선진국/후진국'이라는 서구 중심주의적 용어들까지 아무 거리낌 없이 동원된다.
둘째, 그가 제시하는 '현존하고 명백한 위협이 있을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표현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서도 이의는 없지 않다. 물론 이 원칙은 우리로서는 쟁취해나가야 할 모범 항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언제나 옳기만 한 것일까. 예컨대 식민지에서 반(反)식민 담론은 언제든 현존하고 명백한 위협일 수밖에 없다. 일제 시기 한국의 독립 담론, 영국 식민지 시기 미국의 독립 담론들은 모두 '현존하고 명백한 위협'이었다. 시리아 정부의 입장에서도 시민들의 반정부 담론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동의와 위임에 의한 통치'라는 원칙이 적어도 형식 논리적으로는 달성된 지역에서 설정된 이 이론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상식적인 문제제기이고, 박경신이 모를 리는 없지만 이 책에서는 아쉽게도 주목하지 않았음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 까닭은 이 책이 칼럼 모음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엄밀한 체계를 갖춘 책이라면 이런 논점을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세 번째 불만으로 이어진다.
셋째, 주로 신문에 실었던 칼럼을 모은 책인데 거의 그대로 단행본으로 냈다는 점이다. 신문칼럼은 분량 제한이 심하니, 압축과 생략이 많을 수밖에 없고, 여기 저기 쓰면서 다소 중복되는 내용들도 생길 수밖에 없다. 나중에 책을 내면서 손질을 했다지만 이런 설명 부족이나 중복까지 말끔하게 잡혔다고 보기는 어렵다(167쪽에는 '편집자 주'로 보이는 내용이 휩쓸려 들어가기도 했다). 저자의 블로그에 실렸던, 매수 제한 없이 썼던 글들이 가장 짜임새도 있고 술술 읽히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도 역시 그가 책을 내면서 충분히 손질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신문 칼럼과 단행본은 다른 매체이니 만큼 더 많은 손질이 필요했지만 그 노력이 충분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왜 박경신은 이 책에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을까. 짐작에 불과하지만, 아마 검찰에 의해 기소당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는 점도 한몫 했으리라. 박경신은 자기 방어를 위해 시간을 잘라내야 했고, 그만큼 표현 자유를 위한 활동(이 책의 손질을 포함하는)은 위축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은 기소 자체로 박경신을 검열하는 효과를 불러온 셈이다. 무죄가 되더라도, 검찰이 잃는 것은 별로 없다.
'밑져야 본전'인 검찰, '벌어봐야 손해'인 박경신. 국가 권력이 이런 폭력적인 기소를 남발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박경신이 소개하는 '입 막기 소송 방지법'(미국의 법 이름은 '공공 참여를 봉쇄하기 위한 전략적 소송 봉쇄법 : SLAPP')은 이런 점에서 매력적이었고, 만일 이런 법이 한국에도 있었다면 박경신 피소 사건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박경신에게 투정을 늘어놓고 있다는 자괴감이 생긴다. 하지만 박경신은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분이다. 그런 믿음에 기대어, 이 서평에서는 좀 더 욕심을 내보았을 따름이다. 곧 다른 책을 통해서 나의 기우를 일축할 것으로 믿는다.
이런 저런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한 권의 책에서 모든 이야기를 다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올해 출간된 에마뉘엘 피에라 등의 <검열에 관한 검은 책>(권지현 옮김, 알마 펴냄),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전용희 옮김, 알마 펴냄)를 함께 읽길 권한다. 박경신의 책이 한국의 표현 자유에 대한 법학적 접근이라면, 이 번역서들은 좀 더 폭이 넓다.
세계 여러 나라(물론 주로 서구에 중심을 두지만)의 정보기관·군대·자본·종교 기관 등이, 언론은 물론 학문 연구·영화·광고·만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어떻게 시민들의 눈을 가리고 재갈을 물리면서 지배를 강화하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고발한다. 서구에서도 표현 자유는, 한국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긴 하지만,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위협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투쟁에 대해서도 소홀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글을 맺으려다 보니 <진실 유포 죄>의 가치에 비해 너무 많은 불만을 적어버린 느낌이다. 크게 배우고 작게 불만을 느꼈음에도 이 서평은 아무래도 균형을 잃었다. 하지만 손질은 하지 않기로 한다. 책의 가치를 높이 상찬하는 글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 있다는 점을 주로 감안한 것이다.
이미 나온 말들을 무슨 맛에 반복하랴. 그러니 차라리 이 불균형을 그대로 두는 편이 오히려 큰 국면에서의 균형 잡기에 기여하리라 판단한다. 그래도 오해의 소지를 남길까 두려워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렇다. '티끌'이 있다고 해서 '옥'이 아닌 것은 아니다. 직접 읽어 보면 이 책의 장점과 매력을 스스로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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