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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에 취한 이유는?

[장석준의 '적록 서재'] 김경일의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태가 주체사상파에 대한 논쟁으로 비화 중이다. 보수든 진보든 수많은 매체들이 북한의 국가 이념이자 1980년대 중반부터 남한 민중 운동에도 뿌리 내리기 시작한 이 사상-운동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안타깝게도 언론의 접근법은 보수 우파의 여론 몰이 혹은 표피적, 선정적 보도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주체사상파 문제 자체는 한국 사회에서 언제고 치열하게 논의, 정리되었어야 할 사안이다. 오히려 2010년대 벽두에야 공개 토론의 쟁점이 된 게 너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체사상파 문제를 검토하면서 반드시 다뤄야 할 주제가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대한 인식과 평가다. 주체사상은 어쨌거나 한반도 산(産)이고 더군다나 북한 내 사회주의 분파들 사이의 투쟁 속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가 이 사상의 주요 구성 부분을 이룬다.

대학생 시절 주체사상에 감복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열이면 열 다들 김일성의 만주 항일 무장 투쟁사를 접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만주 무장 투쟁 경험은 주체사상의 원점이며 또한 이 사상이 한때 남한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갖게 만든 강점이기도 하다.

주체사상은 단지 만주파의 무장투쟁 경험을 '강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중심에 놓고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 전체를 평가, 배열한다. 한 마디로, 1930년대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조국광복회 활동을 '정통'으로 놓고 좌파 항일 운동의 다른 흐름들을 기껏해야 그 '전사(前史)'나 '주변'적 흐름, 더 부정적으로는 '이단'으로 치부한다.

'정통'과 '이단'의 역사관―이것은 학문보다는 종교의 영역에 가깝다. 유일신교의 유구한 전통이고, 우리의 경우에는 조선 주자학을 통해 익숙해진 사고방식이다. 인류사를 보면, 이런 식의 역사관은 반드시 특정한 국가 권력과 연동돼 있으며, 역사 속의 '정통'과 현존 국가 권력의 일체화를 통해 체제 유지에 기여한다. 이 문장에 '주체사상(의 역사관)'과 '북한 국가'를 대입시켜 보면, 그대로 지난 반세기간 한반도 북쪽의 현실이 된다.

따라서 주체사상과의 참다운 대결은 보수 우파 식의 '종북' 매카시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반공 국가주의로 주체사상의 국가주의를 대신하려는 것, 말하자면 우상들끼리의 자리다툼일 뿐이다. 주체사상과 대결하려면 무엇보다도 국가주의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하며, 이에 더해 역사 해석 투쟁을 벌여야 한다. 일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주체사상과는 다른 민족 해방 혁명 운동사의 전체상을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에 대한 연구 성과들

1980년대에 운동권 학생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로는 다음과 같은 저작들이 있었다. 김준엽과 김창준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전5권, 청계연구소 펴냄, 1986년).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전3권, 한홍구 옮김, 돌베개 펴냄, 1986년). 서대숙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현대사연구회 옮김, 화다 펴냄, 1985년).

모두 나름대로 명저들이고, 반공 분단 체제 때문에 남한에서 좌파 항일 투쟁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힘들 때 선구적 역할을 한 책들이다. 지금도 박헌영이나 김일성에 대한 1980년대 운동권 세대의 입담들을 들어보면, 위의 책들을 읽었던 기억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남한에서 출판된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의 1세대 연구서들이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의 '상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저작을 통해 접하는 우리 사회주의 운동사의 모습은 그다지 자랑스러운 게 못되었다. 오히려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보였다. 전문 연구자들이야 행간을 읽어내는 신묘한 능력을 발휘했을지 몰라도, 보통의 독자라면 누구나 그런 인상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분파들의 나열, 이들 사이의 논쟁과 분열의 어지러운 전개에 대한 평면적 서술 그리고 결국에는 '해방'보다는 '분단'에 기여했다는 총괄 평가. 이것은 한계와 오류의 반복과 집적으로 보일지언정 가슴 뛰는 투쟁사는 아니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1세대 연구서들이 제시하는 과거 운동사의 이러한 부정적 인상이 주체사상이 남한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데 길을 닦아준 셈이 되었다. 김일성 등장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사는 기회주의와 종파주의의 역사였고 김일성 일파야말로 이러한 전사(前史)를 극복한 '새 세대' 혁명 주역들이었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일제하 운동사 평가의 요점이다. 위의 1세대 연구서들은, 물론 그 결론은 주체사상과 전혀 달랐지만, 전제(조선공산당사에 대한 부정적 평가)만은 주체사상과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 역사학계에서 1980년대 변혁 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 학자들의 연구 작업이 진행되면서, 적어도 역사학자들이나 현대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인식이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이들 연구자들의 학위 논문이 속속 발표되었고, 그 중 상당수는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 이러한 새 세대 연구서가 하나 둘 선보일 때마다 일제 강점기의 운동사가 한 꺼풀씩 장막을 걷으며 그 생생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결코 '종파쟁이들'의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투쟁사였다.

이들 저자 중에 내가 기억하는 이름만으로도 지수걸, 이준식, 신주백, 임경석, 전명혁 등이 있다. 이들은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좀 딱딱한 박사 학위 논문 외에 최신 연구 성과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책들(가령,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이야기>(이후 펴냄, 2009년)나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펴냄, 2008년)도 냈다.

▲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1930년대 서울의 혁명 운동>(김경일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그런데 이런 성격의 책들 중에서도 지금껏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김경일의 <이재유 평전>(창비 펴냄, 1993년)이다. 이 책은 2007년에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1930년대 서울의 혁명 운동>(푸른역사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왔다. 2007년판은 본문 뒤에 부록으로 첨부된 자료들이 보강돼서 좀 두꺼워졌지만, 내용 자체는 크게 바뀐 것이 없다. 그만큼 1993년 초판은 완결성을 갖춘 수작이었다.

'이재유'라는 이름이 좀 더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이 책 뒤에 나온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펴냄, 2004년) 덕분이었다. <경성 트로이카>는 이재유 조직에 직접 참여했던 생존자의 귀한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김경일의 연구서와는 또 다른 독자적 의의를 지닌다. 또 소설가의 필치로, 역사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무는 서사를 전개하고 있기에 훨씬 핍진하게 이재유와 그 동지들의 투쟁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미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김경일의 저작이 없었다면 <경성 트로이카>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김경일의 책 초판이 나온 1993년 무렵, 30년대 서울의 적색 노동조합 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 투쟁의 실상을 처음 접하고 나서 오래도록 남은 그 감흥을 잊을 수 없다. 그 감흥 속에서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검은 덧칠은 색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과 전태일 사이에서 오래도록 안개에 싸여 있던 그 역사가 이제는 찬란한 색채로 우리의 미래에 빛을 밝혀주는 듯했다.

'정통'론을 넘어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읽기

이 지면에서 이재유와 그 동지들의 투쟁사를 장황하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제 경찰에 잡힌 뒤에도 몇 차례나 도주를 시도해서 결국은 탈출에 성공한 전설 같은 무용담, 코민테른의 권위를 내세워 운동권을 정리하려는 인사들에게 현장 투쟁의 당당함으로 맞선 일화, 나중에 국문학자 김태준의 부인이 된 박진홍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등은 '신화'로 만들려고 마음만 먹으면 북한 측의 '불멸의 력사' 연작에 버금갈 만한 소재들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신화화 촌극을 따라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더구나 이재유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시기 식민지 조선 곳곳에는 이재유의 경성 그룹에 맞먹는 규모와 치열함으로 적색 노조, 농조 투쟁 및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인 또 다른 투사들이 있었다. 약간의 예만 들어도, 원산의 이주하 그룹이 있었고, 평안도의 주영하 그룹, 함경도의 오기섭 그룹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이후 북한 정권의 숙청 명단과 겹친다.)

1930년대에 조선에서는 이렇게 치열한 혁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들은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을 계승하면서 이를 재건하려 했지만 20년대 운동과는 또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상황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인정받은 전국 당 조직도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파시즘화로 이제 조선노동총동맹이나 신간회 같은 합법 조직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이재유 세대의 운동가들은 당 운동(조선공산당 재건)과 대중 투쟁(적색 노조, 농조)을 중첩시키는 투쟁 방식을 펼쳤다.

이 운동 방식은 1920년대의 한계, 즉 지식인 중심의 당(조선공산당)과 대중 조직(직업별 노조)의 엄격한 분립 구도를 일정하게 극복한 것이었다. 그 결과, 전국 당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도 각 지역의 민중들 사이에 노동, 농민 운동과 사회주의 이념이 스며들어갔다. 이 저류가 해방 직후 지표면 위로 삽시간에 분출한 것이 제1대중 정당의 위상을 자랑한 조선공산당이었고 55만 조합원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였다.

이렇게 코민테른과의 직접적 연계 없이 어려운 투쟁을 밀고 나가는 와중에 '보편적 이념의 토착화'라는, 모든 보편주의적 이념·운동이 대결해야 할 과제에 대한 고민도 무르익어갔다. 김교신이 "기독교도 조선의 기독교가 되어야 하고 공산주의도 조선의 공산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의 그 '조선의 공산주의'가 싹을 보인 것이다.

워낙 단편적 자료들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 시대 고민의 전체상을 온전히 복원하기는 힘들지만, 이 점에서 동시대 투사들 중에서도 단연 앞서간 사람이 이재유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제출한 <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라는 짧은 글(이 짧은 글이 그에게 허락된 '옥중 수고'의 전부였다)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에서 일정한 발전 단계로서 민족 혁명,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을 띤 혁명도 없이 끝날 것인가? 즉, 조선 민족적 입장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방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혁명이 없이 끝날 것인가?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혁명! 민족 혁명이 있어야 한다."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294~295쪽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민족'이란 단지 거대한 추상적 단위만은 아니다. 조선 민중들, 즉 이재유가 직접 함께 부대끼며 생활하고 투쟁하고 꿈을 나누었던 그 구체적인 민중들이 이 말 뒤에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에 대한 살아 있는 감각이 '민족 혁명!'이라는 단호한 언명을 뒷받침한다. 이재유는 코민테른 공식의 단순 적용을 넘어서 이들 '현지(現地)' 민중들의 논리와 정서로 혁명을 사고하고 요구하며 추진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1930년대의 한 국내 혁명가가 보여준 이러한 성취의 '(재)발견'은 1990년대 민중민주(PD) 운동권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어떤 정파는, 마치 주체사상이 김일성의 운동 궤적을 '정통'으로 내세우는 것처럼, 이재유의 그것을 남한 변혁 운동의 '정통'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통'의 자리에 서야 할 게 누구냐가 아니다. '정통'과 '이단'이 구분되는 역사관 자체가 극복 대상이다. 일제 말기에 '보편적 이념의 토착화'를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갔던 사회주의 운동 흐름이 주체사상이 말하는 것처럼 조국광복회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 여러 흐름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후 주체사상이라는 초유의 국가사회주의로 귀결된 흐름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내장한 흐름들도 있었다(가령 오기섭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강조하다가 비판받은 것을 재평가해볼 수 있다).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을 비롯한 최근의 한국 현대사 연구들은 이러한 '잃어버린',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시도'되어야 할 역사적 '기회들'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준다.

이재유와 그 동지들이 제시한 '우리 시대'의 과제들

'정통'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무오류'론에서 벗어난다는 것이기도 하다. 자랑스러운 역사라도 잘못은 잘못 대로 평가해야 한다. 오히려 위대한 성취를 보여준 인물이나 사례일수록 그 오류와 한계에 대한 점검도 더욱 철저해야만 한다. '잃어버린' 대의를 '다시 시도'하기 위한 역사 읽기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슬라보예 지젝이 늘 인용하는 사뮈엘 베케트의 문구("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처럼, "지난번보다 '더 낫게' 실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유와 그 동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36년에 이재유 그룹이 낸 <적기> 제1호(<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315~333쪽)를 보면, 정치 방침의 혼란이 눈에 띤다. 한편으로는 "반파쇼 반제 인민 전선 운동의 수립"을 주창하고 "불란서 스페인 인민 전선을 절대 지지하자!"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민정(民政) 사민(社民) 파벌 섹트주의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비판 청산 극복 박멸"하자면서 당시 중국에서 민족 통일 전선으로 건설된 조선민족혁명당을 사정없이 공격한다.

이것은 이들이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결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7차 대회의 '반파시즘 통일 전선' 결정은 1928년 제6차 대회의 극좌 기회주의적 결정들을 정정하는 것이었다. 독일 혁명의 실패, 소련 공산당 내의 격렬한 논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1차 국공 합작을 통해 추진한 중국 혁명이 국민당 우파의 배신으로 처참하게 실패한 충격 속에서 개최된 제6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을 주적(主敵)으로 삼는 극좌적 방침을 결정했다.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주요 결정인 <12월 테제>가 작성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12월 테제>의 방침에 따라 조선공산당 중앙당 재건은 미래의 과제로 유보되었고, 이후 이 문서의 극좌적 편향이 각 지역에서 당 기층 조직 재건 운동에 나선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재유와 그 동지들도, 비록 어렴풋이 새로운 코민테른 결정을 접하기는 했지만(그래서 '인민 전선'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코민테른 6차 대회와 7차 대회 사이에 전개된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고민과 모색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 힘들다. 즉, 6차 대회의 사고틀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같은 시기에 만주나 중국 관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은 7차 대회의 노선 전환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송영인 옮김, 동녘 펴냄, 2005년)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만 하더라도, 이미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극좌 노선에 맞서 투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노선 전환을 반겼고 이를 적극 실천하려 했다(놀랍게도 그는 이를 대중 민주주의의 강조와 연결시킨다). 아마도 이런 젊은 사회주의자들 중에 만주의 항일 빨치산들도 있었을 것이다.

즉, 어떤 쟁점에서는, 가령 통일 전선 문제에 대해서는 국외 좌파 항일 세력이 동시대 국내 사회주의자들보다 앞서갔던 것이다. 이런 점은 해방 이후 북한 국가 건설에서 국내파보다 오히려 해외파가 주도권을 쥐게 된 사정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이 단지 해외파가 소련으로부터 더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무오류의 새로운 영웅들을 기대했다면, 분명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냉정한 평가를 거친 뒤에야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가 정말 새롭게 만나야 할 선배 투사들의 맨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재유 그룹의 경우에 그 맨 얼굴은 시대의 한계에 갇힌 정치 방침과 함께 제시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대중 운동 과제들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이런 요구들 말이다.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 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 계약제의 반대
부인, 청년의 이중 착취 반대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
부르주아적 산업 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 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 임금 확립
임금 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 보험의 즉시 실시." (<적기>제1호,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323-324쪽에서 재인용)

70년 전의 구호들인데, 전혀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년기 계약제"는 고스란히 지금의 불안정 고용, 비정규직 문제다. "1주 40시간제"나 "하루 7시간 노동제"는 초과 근로 때문에 지금도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부르주아 부담의 (…) 국가 보험의 즉각 실시"는 결국 복지 국가를 실현하자는 이야기다. 모두 다 지금 우리 노동 운동의 현안들이다.

알고 보니, 거의 한 세기 전 선배 투사들의 운동은 21세기의 우리와 이런 식으로 직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거대한 한 강물 줄기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저들을 '패배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아직 너무 이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우리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금 여기의 투쟁을 과거의 '잃어버린' 대의를 '만회'할 기회로 바라보는 역사관(<역사 철학 테제>에서의 발터 벤야민의 역사관)만이 '정통'-'이단'의 역사관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 '종북주의'와 '반공주의'로부터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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